습관적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정장까지 갖춰 입고 나서야 비로소 어제 사표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는 것이었나.

새벽같이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시 침대에 들어가 잠을 자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다시 집에서 입는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난 후에, 노트북을 펼쳐 신문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정치, 사회, 경제... 구독하고 있는 모든 일간지의 기사를 읽고 나서야 문득 책상 한 켠에 놓인 명함에 시선이 갔다.

호시미 프로덕션
사장 겸 프로듀서 
사에구사 신지

아이돌 프로덕션이라.

당분간은 쉬면서 천천히 다음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빨리 입사 제안이 들어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업계이지만, 흥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번 뿐이지만, 아이돌 콘서트에 가 본 적도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깨달았다. 

나가세 마나.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한 이 시대의 전설적인 아이돌. 아마도 3년 쯤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에서도 대서특필할 정도로,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소녀였다. 호기심에 문득 콘서트 티켓을 예매했었고, 홀린 듯이 그녀의 무대를 감상했었다. 그 나가세 마나의 소속 프로덕션이 바로 호시미 프로덕션이었다. 이 사실을 지금에서야 다시 깨닫게 될 줄이야. 

앞으로 일주일.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고 했던가. 다시금 인생의 진리를 곱씹으며 그렇게 호시미 프로덕션과 소속 아이돌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하루종일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돌 프로덕션에 무경력직으로 입사했다. (2)]





일주일 후.


"야마다 군. 다시 만나서 반갑군.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연락이 없길래 초조한 나머지 잠을 다 설쳤지 뭔가."


도쿄로 새로 이전한 사무실에서 만난 사에구사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야마다를 환영했다.


"직전에서야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면 된 거지. 안타깝게도 오늘은 마키노 매니저와 소속 아이돌들이 외부 촬영 스케줄로 사무소를 비우고 있다네. 소개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덜컥 채용이 되는 건 저로서도 아직 실감이 잘 안 납니다만... 일단 이력서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자네는 처음부터 채용할 생각이었으니 그런 서류 쪼가리는 굳이 안 가져와도 되네. 하지만 정식으로 고용하게 되면 아무래도 필요한 서류 절차가 있으니 그걸 위해 일단은 받아두는 걸로 하지."


야마다의 이력서를 대충 살펴본 사에구사가 살짝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 맥킨지 출신인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거물이 들어와서 황송할 지경이야. 괜히 미안해지는군. 이런 영세 프로덕션에 입사를 해 준다면 더없이 큰 영광이네. 외자계 컨설팅 기업이라고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일 줄이야."


사에구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연봉은 전 직장에 비교하면 초라할 지경일 텐데."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기대하지도 않았고,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널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있긴 있습니다."


"자네, 유머도 좀 칠 줄 아는군. 1/3토막이라도 상관없는 건가?"


"맥킨지도 기본급 자체가 엄청 높은 건 아닙니다. 이런저런 수당과 성과급이 많죠. 영세 프로덕션임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군."


사에구사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제기랄. 이거 아무래도 사장 직을 그냥 자네에게 맡겨버리고 나는 프로듀싱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거 영광이군요. 전 직장에서 퇴사한 일개 샐러리맨 출신이 일주일 만에 사장으로 파격 승진이라. 이걸 주제로 판타지 소설을 써도 그럭저럭 팔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은 뭐가 좋겠습니까? 요새는 제목도 길면 길수록 좋다던데요. 예를 들면 [일개 샐러리맨 출신인 내가 이직 하루 만에 사장이 되었다?]"


"맥킨지 출신은 다들 그런 농담을 하는 건가? 진심 같아서 무섭군 그래."


"맥킨지식 농담이 통하니 다행입니다."


"그런 농담을 두 세 번 더 듣다가는 정말로 사장 자리를 넘겨줄 수도 있겠군."


사에구사가 이내 책상 서랍 속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자네가 입사하는 것을 전제로 미리 계약서는 써 놓았네. 자세히 검토해 보고 마음에 들면 부디 서명을 부탁하지."


그에게서 고용계약서를 건네받은 야마다가 대충 서류를 쓱쓱 훑어보더니, 순식간에 서명을 마쳤다.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계약서이니만큼 아무래도 자세히 살펴보는 편이..."


"어제는 연락이 안 와서 잠도 설치셨다면서요? 그럼 계약서도 신중하게 작성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야마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대충 보는 것처럼 보여도, 중요한 부분은 제대로 살펴봤습니다. 전 직장에서 배운 스킬이죠. 핵심만 간단히. 그리고 워낙 이런 종류의 서류를 많이 봐서 말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아무튼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 자네는 오늘부로 호시미 프로덕션의 일원일세. 환영하네."


"물론 전통의 일본 기업답게 종합직으로 채용이 된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야마다가 서류를 톡톡 치며 말했다.


"업무 내용을 살펴보니 정말 저번에 말씀하신 그대로군요. 사장 보조 겸 프로듀싱 보조 겸 매니저 보조 겸... 그리고 재무관리 및 전략기획 담당? 부서라도 새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이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라... 마음 같아서는 적어도 각 분야마다 한 명 이상씩은 반드시 채용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래도 영세 프로덕션 특성 상 인건비 지출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죠."


"아픈 곳을 여러 번 찌르는구만. 자네 말대로일세. 마음 같아서야 제대로 된 조직을 구축하고 싶긴 하나... 자네도 알다시피 이 쪽 업계라고 해서 일손이 항상 넘쳐 흐르는 건 아닐세. 특히나 대기업도 아닌 개인 사업체라면 말이지. 더군다나 책임감 있게 끝까지 소속 아이돌들을 케어해줄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네. 반대로 아이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걸 노리고 입사하는 이상한 작자들도 많으니 인재 채용은 오히려 까다롭게 실시해야 맞는 말이지만... 자네는 예외로군."


"이른바 직감으로 채용했다는 겁니까?"


"이 업계에서는 직감도 꽤나 중요한 스킬이라네. 그리고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 직감이 꽤나 잘 맞아떨어지는 편이지."


"알듯 말듯 하군요. 좋습니다. 차차 회사가 성장해 나가면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분명 보람찬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게다가 자네는 지금 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인재 그 자체야. 재무 관리도 가능하고 전략기획안도 세울 수 있지. 더군다나 맥킨지 출신이면 그 쪽 분야는 업계 최고 수준 아닌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제가 담당할 업무가 전 영역을 커버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보아하니 사에구사 씨가 부재중일 경우를 대비해 만든 업무 내용 같습니다만."


"역시 자네로군. 날카로워."


사에구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나. 사실은 내가 내일 모레부터 사무실에 없을 예정이야."


"그건 또 무슨...?"


"사정이 있네. 반 프로덕션이라고 들어봤나?"


"이 쪽 업계에서는 대기업으로 손꼽히는 프로덕션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속 아이돌들의 실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더군요."


"그래. 사실은 그 반 프로덕션의 사장이 내 옛 친구란 말이지."


"이름이 아사쿠라 씨였나요? 지금은 구속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놀랍군. 어떻게 그런 소식까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런 대기업의 대표가 구속되었다는 소식 정도는 조금만 뉴스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면 누구든지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군. 그래, 자네 말대로 구속된 상황이야."


"그리고 피의자 입건 혐의는 자금 횡령이었고 말입니다."


"거기서 의문이네. 그 친구는 그런 행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네."


"그러니까 사에구사 씨의 견해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친구인 아사쿠라 씨의 누명을 벗기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무실을 비운다는 것은 그걸 위한 행동인 것이고요?"


"이젠 정말 무서울 정도인데. 자네는 무슨 전직 탐정이었나?"


"아니, 흐름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야마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피의자로 입건되어 구속이 될 정도면, 검사들이 적어도 증거는 제대로 확보했다는 의미일텐데요. 아시잖습니까. 일본의 사법 체계. 검사들은 유죄 입증에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기소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렇네만, 나는 아사쿠라가 그렇게까지 타락했다고 생각되지 않네. 횡령 사건은 분명 조작된 것임에 틀림 없어."


사에구사가 이어서 말했다.


"나도 아네. 무죄 입증이 힘들다는 것을.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어떻게 알겠나."


"반 프로덕션 정도의 대기업이라면 분명 재무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사내부서 뿐만이 아니라 사외 회계법인에게 감사도 받았을 겁니다. 보통 사내에서 내부고발이 이루어지긴 어려운 구조입니다. 그것도 대기업이라면 말이죠. 아마도 사외 회계법인 감사에서 걸렸을 텐데... 물론 사내 회계팀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통속이 아니라 그저 몰라서 당했다, 정도가 되겠지만."


"자네가 생각하기에 진범이 따로 있다면 어느 위치의 사람 같나?"


"글쎄요. 가장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장부 조작이 가능한 직급의 사람이겠군요. 비서, 경리... 후보는 여럿 있습니다만. 중소기업도 아니고 대기업의 경리가 그런 간 큰 짓을 벌인다는 건 상상이 잘 되지 않는군요. 일반적으로 경리 팀과 회계 팀은 서로 분리되어 상호 감사가 되어있는 구조가 대다수입니다. 모두가 다 한통속일 가능성은 솔직히 현저하게 낮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뭔가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한 명 떠오르는군."


사에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만약, 만약의 경우에는 말일세, 자네에게 직접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네. 부탁해도 되겠나?"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거 아는가? 오늘 막 입사한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틀 뒤부터 자리를 비우게 될 걸세. 아사쿠라 녀석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 그 후속처리를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데. 입사 후 첫 업무인데, 부탁해도 되겠나?"


"좋습니다. 업무 내용을 알려주십시오."


"반 프로덕션에서 아이돌 그룹을 두 팀 넘겨받게 되었다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다만, 아사쿠라 녀석이 겉모습은 냉정해 보여도 정이 많아서 말이야. 반 프로덕션의 핵심 아이돌 그룹을 우리 프로덕션에 위탁함으로써 그녀들의 꿈이 망가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은 모양이야. 한 팀은 설득이 되었는데, 문제는 나머지 한 팀이지. 리즈누아르(Liznoir)라고 들어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