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벅, 철벅.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으며, 느린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간다.

간간이 세워진 가로등이 주황색 불빛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혀준다.

추적추적내리는 가을비가 머리를 적시며 흘러내려 온몸을 뒤덮었다. 

우산은 있지만, 굳이 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를 가려줄 액체의 커튼이 지금은 절실했다.


"하하하하하.......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는 고양이를 지나가며, 수년간 품고 있었던 의문을 소리내어 말해본다. 허나 답해줄 이는 없다.


스스로가 특출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머리는 그럭저럭 돌아가 인서울대학을 졸업했고 나쁘지 않은 기업에 입사해 대리로 승진했던 것이 3년 전.

자랑할 정도는 아니어도, 적어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나 이렇게 살아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허나, 그것도 먼 옛날의 일이다.


"내가 너무 착했지. 너무 멍청했지. 너무 병신이었지! 어줍잖은 정의감에 그딴 년을 돕다니!"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의 밤길은 오늘과 똑같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적당한 취기를 느끼며 기분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던 남자의 청각은 어느 골목길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포착했다.


"이, 이거 놔요!"

"가만히 있어 이년아! 얌전히 있으면 금방 끝날테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를 들어보면 자초지종은 대강 예상이 갔다.

납치범과 옥신각신하는 중이거나, 강간사건일거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도와줘야 할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만 하고 도망칠까.

남자는 신음을 듣고는 잠시 멈춰서 고민에 잠겼었다. 몇초간 고심한 끝에,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판단을 내려버렸다.


"야! 거기 뭐하는 짓이야!"


정의감이 강한 성격에 술이 들어가 자제심이 흐트러지니, 말과 행동에도 거침이 없어졌다.

들고있던 우산과 겉옷을 벤치에 던져두고는, 남자는 골목길 안으로 달려갔다.


"젠장! 일이 다 꼬였어!"


목격자를 예상 못했는지 괴한은 짧은 욕설과 함께 들고있던 흉기를 내팽개치고는 도주했다.

쫒을가 생각했으나, 우선 피해자의 구조가 먼저라 생각한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자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휴대폰 가지고 계시죠?"

"ㄴ,네."

"경찰에 신고하시고 어서 병원에 가보세요. 무사하시다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기,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은인이신데."

"한명회라고 합니다. 좀 특이하죠?"


정말로 감사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년의 모습은 누가봐도 안도하는 피해자의 전형이었다.

남자는 좋은 일을 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외투와 우산을 챙겨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비에 젖어 외투가 조금 축축해졌지만,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면 문제없지 싶었다.

허나 진짜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다.


---딩동!

"누구시죠?"

"한명회 씨?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두명의 순경도 당혹스러웠지만, 더욱이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들이 말하는 내용.

어젯밤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가 성폭행과 정신적 충격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더니만, 범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더라는 것이다.

괴한의 포지션에 자신을 그대로 가져다 넣고는 완전히 조작된 시나리오를 진술했고, 그에 따라 지금 자신은 출근 대신에 경찰서로 출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 여자랑 만나게 해달라고요!"

"안됩니다. 신고자에 대한 신변을 철저히 보호되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분통터지는 원통함에 항의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철벽같은 거절.

그 뒤로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저 위기에 빠진 여자를 도왔을 뿐인 자신은 이미 언론에서 극악무도한 강간마가 되어 있었고, 하지도 않은 죄까지 덮어씌워졌다.


어떠한 증거도, 어떠한 반론도 의미가 없었다. 유일한 증거는 단 하나.

그 개년의 '일관성 있는 진술'뿐이었다.

아니, 일관성이 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진술 때마다 바뀌었으니까.

그럼에도 공식적인 증거로 채택되었고, 자신 측에서 반론으로 제시한 CCTV의 영상기록이나 알리바이는 판사가 보지도 않고 신뢰성 불충분으로 기각시켰다.


더욱이 가증스러웠던 것은, 그년이 재판장에서 보인 태도였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 악마가 저를 강간했습니다. 싫다고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쓰러트리고 아랫도리에 물건을 쑤셔넣고는, 마구잡이로 흔들어댔습니다. 흑흑흑."


자신에게 고마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자신을 개자식으로 호도하며 눈물섞인 연기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판사의 시선과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지 않을때는, 자신이 있는 쪽을 보면서 조롱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평소 욕을 잘 쓰지않는 남자였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보지달린 것들은 모두 찢어죽여 마땅한 쓰레기라고.


판사는 여자였다. 배심원을 포함한 대다수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명확하다며 자신에게 처벌을 내렸다.

징역 4년 6개월, 그리고 벌금 1000만원.


너무나 가혹한 형량이었고, 승복할 수 없었다.

그동안 모았던 적금을 털어가며 변호사들을 더 고용해 항소에 재심을 거듭했고, 급기야 3심까지 가서야 무혐의를 받아냈다.

허나 그때까지 걸린 시간은 장장 1년반.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는 이미 쓰레기가 된지 오래고, 직장에서는 짤렸다. 썸을 타던 여자는 이미 사라졌고, 가족과 친구들조차도 이제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무고죄로 여자를 고소했지만, 여자에게만 관대한 이 지옥같은 나라는 반성하고 있다는 같잖은 이유로 벌금 50만원으로 끝냈다. 그것도 여자 자신이 내지 않고 그년의 부모가 냈다.


통장에 남은 3000만원 남짓의 금액으로 남자는 앞으로 평생을 먹고 살아야 했다.

막노동으로 어떻게 돈을 벌수는 있었지만, 평생 해본적 없던 고된 노동은 순식간에 몸을 망가트렸다. 

버는 돈보다 치료비가 더 많이 나갈 판이라 남자는 몇개월 해보다 공사판을 나왔다.


아끼고 아꼈지만, 결국 일주일 전에 돈이 거의 바닥났다.

월세 들었던 반지하방에서 쫒겨나버렸고, 얼마안되던 살림살이도 죄다 처분해 마련한 푼돈을 쥐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저녁을 해결하고 아침은 굶는다. 지하철역 구석에 주저앉아선 지나가는 행인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푼을 모아서 생활비로 써야한다.

한때는 대리까지 하던 사람이 몇년만에 이 꼴이 나다니, 몇번을 곱씹어봐도 놀라울 정도의 몰락이다.


그러다 시야에 철물점이 하나 들어오자, 남자는 회상을 멈추고는 문을 열었다.


"어서옵쇼."


꾀죄죄한 행색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자신을 손님으로서 맞이했다.


"와이어 있습니까?"

"와이어?"


돈은 제대로 지불할 수 있냐는 눈빛. 그에 남자는 낡은 지갑에서 만원짜리 두장을 꺼내보였다.

아무리 자신이 거지라도 와이어 따위도 못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돈은 더 필요가 없으니 전부 써도 되겠지.


"종류가 다양한데, 뭘 원하시나?"

"튼튼하고 끊어지지 않되 얇은 놈으로 부탁합니다. 피아노줄 같은것도 좋아요."

"여기 있수다."


5미터 가량의 피아노줄을 사는데 5000원을 사용했다. 이제 수중에 남은 것은 1만 5000원.

이어서 남자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여기서도 불쾌한 시선은 그대로다. 특히나 이곳의 알바는 여자였다.

갑자기 이 여자를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확 들었지만, 남자는 굳이 힘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와인 한병. 그리고 저기 말보로 레드랑 라이터 하나."


만원도 안하는 싸구려 와인 한병과 담배를 받아든 사내는 편의점 밖 테이블에 앉았다.

코르크 마개를 따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었다.


"크어어.....그래, 이게 마지막 만찬이다."


몸이 많이 상해서 그런가, 알코올이 잘 받는 느낌이다.

반병밖에 안 마셨는데도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게 느껴진다.

술은 그만 마시고 담배를 추가로 몇개피 태운 남자는, 굳은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와인병은 어느새 부서져, 끄트머리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있었다.


비틀거리지만, 중심은 잡힌 걸음걸이로 걷기를 20분, 남자는 어느 아파트 앞에 섰다.


"새봄 아파트, 311동 1801호....."


경비원은 없어보인다. 문은 유리 자동문. 강화유리는 아니었다.


---와장창!

---삐이이! 삐이이!


몸을 던지듯이 달려드니까 쉽게 깨졌다.

경보음이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 회사에서 오려면 아직 4~5분은 필요하다. 그 사이에 자신의 목적은 충분히 이룰 수 있다.


유리문에 뚫린 구멍으로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30초 정도 후에 문이 열렸다.

벽면에 붙은 18이라 쓰인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사이에, 남자는 소지품을 점검했다.

5미터 짜리 티타늄제 피아노줄, 그리고 깨진 와인병. 이거면 충분하겠지.


---18층입니다.


엘레베이터가 멈춰서자 남자는 열린 문 밖으로 나왔다.

두터운 현관문 너머로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년도 깨어있을 것이다.


---딩동.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아, 잠시만요. 생각보다 빨리왔네."


무언가 시킨게 있었는지 여자는 의심없이 문을 열었다.

삐리릭, 하는 전자음과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고, 강철제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며 수년간 단 한번도 잊은적 없는 그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택배는 어서 여기로---"

"오랜만이다, 이 찢어죽일 자식아!"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달려들었다.

기나긴 원한은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난다.

둘중 그 누구도, 오늘밤을 넘길때까지 살아있지 않으리라.




*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 드는건 귀찮아서 마무리를 대충 썼기 때문이다. 두시간 걸려서 연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