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0.4. 공산당, 몰락 - 9월 총파업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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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전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 대회가 열려 약 25000여명의 주민이 모였다. 행사는 평화롭게 끝나고, 주민들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미군정청과 경찰서를 지나 200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오후 2시 45분경, 사건이 터진다. 기마경관 임영관 경위가 시위 진화를 위해 군중들을 헤치던 중 길 모퉁이를 돌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는데 이걸 모르고 지나가 버린 것.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에게 몰려들자 임영관 경위는 황급히 도망치고, 군중들은 도망치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 시위대가 경찰서 앞을 지나고 있었다. 경찰들이 이 광경을 보고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 게다가 하필 당시 제주도에는 앞서 설명했던 대구 10.1 시건을 겪은 육지 경찰들까지 와 있었기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총을 발포해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이 발포 사건이 군중들의 경찰서 습격에 대응하는 정당방위라 주장하였고 그날 저녁부터는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다. 또다시 수백 명의 경찰이 육지에서 파견되고, 3월 1일 시위 관련자들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남로당 개입

이렇게 민심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 속칭 남로당이 기회를 잡았다. 당시 제주도는 과거부터 유배지로 쓰던 터라 섬임에도 어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해 우리가 아는 해녀 문화가 생겼고, 제주 내의 실업율은 높았음에도 육지에서는 제주 출신에 차별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다가 유배지로 쓰던 만큼 해방 후 시점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지역이라 당대 일본 지식인들에게 유행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도 제주 출신 노동자들이 가장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로당은 아주 가볍게 사람들을 이끌게 되었다. 심지어 제주 내의 우파 세력조차 경찰에게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며 3월 10일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 관공서,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심지어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무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파업에 동참해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했다. 이는 13일까지 제주 전역에 퍼졌고, 제주 출신 경찰들까지 파업에 동참하여 최종적으로 무려 166개 기관, 41,211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여기서 사건이 끝났다면 미군정이 아니다. 미군정은 철저하게 이 요구를 무시한 뒤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는 메카시즘 스러운 발언을 남긴 뒤 파업에 동참한 경찰 66명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본토에서 온 서북청년단 소속 사람으로 충원시켰다. 또한 당시 경무부장(경찰청장) 조병옥을 비롯해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보내고, 조병옥의 지휘 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 참여자들을 체포했다.


3월 말 들어서 총파업은 가라앉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는 파업 참여자들을 검거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며 3월 1일부터 다음해 4월 3일까지 2500여명이 감옥에 갇혔다. 심지어 1947년 부임한 도지사 유해진은 미군정 입장에서도 극우파인 사람으로 어찌나 탄압에 매진했는지 미군정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제주에서 우익 단체와 경찰의 테러 행위는 끝없이 증가했고, 봉급이 없었던 서북청년단은 아예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이들은 후일 5.10 총선거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같은 우파 진영을 집단 사살하기도 할 정도로 독선적이었다.

1948년 1월 CIC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좌익 인사라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제주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대대로 이어져 온 가난의 해결이었다.


아무튼 이런 극단적인 탄압이 심화되며 제주도민과 경찰의 충돌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1948년 촬영된 사진, 이들은 직후 전원 처형당했다.)

해가 지나 1948년이 되며 경찰의 고문치사사건이 속출했다.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방문했던 탓에 관련 경찰은 징역형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약화되었지만 당시는 제주어가 남녀노소 쓰이던 때, 육지의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때문에 이 일본어 소통이 제주도민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후일 대량학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시계는 1948년 4월 3일로 흘러갔다.


-남로당 습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 각지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오르고, 곧이어 남로당 소속의 무장대 350여명이 제주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 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당시 남로당 무장대의 무기는 과거 일본군이 놓고 간 99식 소총과 권총, 군도, 대검, 몽둥이 뿐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를 공격하고, 제주도민을 향해 끝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대한민국 1대 총선을 1달 앞둔 상황에 벌어진 일에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하고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 응원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이 증파되었고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은 금지되었다.


-실패한 평화협상

무장대와 군경의 충돌이 벌어지자 제주에 주둔한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는다. 그리고, 당시 9연대장 김익렬(훗날 6.25 전쟁 당시 1사단 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다.)은 미군정에서 파견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9연대장 김익렬)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지고, 김익렬은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한다. 결국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게 되었다.

(무장대 총책 김달삼)

논의 끝에 둘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징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도 이 결과에 크게 만족했으니 정말 이렇게 끝났다면 제주 4.3 사건은 그저 무장대와 군경의 충돌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72시간이 끝나기 직전인 5월 1일,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 전략촌을 습격, 방화하는 대사건이 터진다.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5월 1일, 불타는 오라리)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 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이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했다고 자백하기도 했고.

사건의 전말은 우익청년단원이 마을에 난입해 좌익 활동 의심자의 집 10여채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자 경찰은 청년단원을 쫓아 떠난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총을 쏘다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도망친 것이었다.

게다가 5월 3일, 귀순자와 인솔하던 군인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았다. 그들 중 하나가 붙잡히자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 자백했다. 이 사건을 준후해 미군정의 태도가 강경책으로 바뀌고, 전투는 재발하며 김익렬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이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준장 송호성을 이끌고 제주도에 와 맨스필드, 유해진, 김익렬과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경찰측은 열심히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김익렬은 반란이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며 물증까지 내놓는다.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냐고 묻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며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고 모함을 했다. 이에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고, 다음날 김익렬은 해임되었다. 김익렬의 수기에 따르면 안재홍은 그를 말리며 통곡했고, 송호성은 사실상 조병옥을 다그쳤으며, 김익렬은 송호성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한탄했다 한다. 김익렬의 자리에는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 박진경이 올라왔다.


-무력충돌

(한라산으로 피신한 제주도 주민)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 소각되었다. 끝내 제주도의 최종 건거인 등록률은 전국 평균인 91.7%에 한참 못미치는 64.9%에 불과했고 선거위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군경의 보호를 바랬다.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무장대와 군경의 충돌로 29명이 사망했다.

5월 10일, 무장대는 주민들을 한라산이나 오름으로 보내 선거가 끝는 뒤 하산시키고,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가했다. 결국 제주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 1년 후에야 재선거를 치룰 수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 군경은 눈에 불을 켜고 진압을 가속화 했다. 5월 20일 경 부임한 제주지구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은 강경 진압을 천명했고, 김익렬의 뒤를 이어 부임한 박진경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며 제주 출신 병사들은 진압 작전에서 소외당했다. 

그러던 6월 18일, 박진경은 끝내 문상길, 손선호 등 9명에게 살해당했다.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라 죽였다고 밝혔다. 이후 그의 후임으로 최경록과 송요찬이 임명, 계속해서 경경진압이 이뤄졌다. 그러나 아직도 무장대의 정예들은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위해 김달삼이 월북,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

(토벌대에 체포된 이들. 이들은 전부 총살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등 사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고, 8월 24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어 미군 완전 철수때 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던 사이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제주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헛소문이 돌며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준비되었다.


10월 17일,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지막지한 결정이 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제주 산악지역에 사는 중간산마을 거주민들이었다. 이들에겐 이 결정이 거주 자체의 금지나 마찬가지였던것. 그러나 다음날부터 해안은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로 간주했다. 여순사건 이후에는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내려와 군경 행세를 하더니 끝내 1948년 11월17일, 제주도로 내려온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참고로 당시 제헌헌법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는데(1949년 11월 24일 제정된다.), 이에 대해 제언국회에서도 논란이 일어 법무장관 이인에게 야당측에서 위헌 아니냐고 묻자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군사령관이 하는 것"이라며 얼버무렸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이 여기에 항의하다 살해당했다. 그리고 1948년 11월 중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며 중간산지대의 마을과 주민들은 진압의 대상이 되었다.


군경토벌대는 중간산마을을 돌아다니며 적발되는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 학살한 뒤 마을에 불을 질렀다. 반항하는 자는 총살당했고, 총살자 가족은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무장대로 변장해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뒤 도움을 주면 바로 사살하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해 진짜 자수를 하면 바로 죽이는 '자수 사건',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가족을 죽이는 '대살',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 등 수많은 민간인이 사살당했고, 이렇게 죽은 이들은 모두 '사살된 폭도'로, 학살행휘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특히 월남한 지주나 이북 조폭, 극우 세력이 주류인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은 어찌나 악랄했는지 같은 극우 진영에서도 배척당할 정도였다.

(<천명>, 강요배, 1991. 불타는 북촌리)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부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에게 사망하자 마을 원로를 포함한 주민 10명이 직접 대대 본부로 찾아간다. 그러나 흥분한 군인들이 그 중 군인 가족 1명을 제외한 9명을 살해한 뒤 북촌리로가서 마을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워 책임자를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하다 몇몇 여자들이 사망하고,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를 마을 주변 옴팡밭(움푹 들어가 있는 밭이란 뜻의 제주어)에서 총살한 뒤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마을 주민 300~460명 정도가 사망했고, 이는 4.3사건 당시 일어난 학살 중 최대 규모였다. 1960년까지 북촌리는 남녀 비율이 1:3에 이를 정도로 여초 현상이 일어났다.


그 외에 군경은 오름의 동굴로 피난간 이들까지 집요하게 추적해 사살하기도 했다.

(초토화 작전 당시 피학살지)

1949년 2월까지 계속된 초토화작전으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약 14000~15000명이 사망했고, 최소한 80%는 토벌대에게 살해당했다. 섬의 주택 약1/3이 파괴되었고 30만 주민 중 1/4가 해안으로 소개당했다. 

학살이 어찌나 참혹했는지 모슬포경찰서장 문형순은 학살을 막기 위해 몇몇을 숨겨주었고, 무려 서북청년회 단원도 몇몇을 도와주기도 했다.


물론 군경만 학살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낮에는 서북청년단과 군경이 빨갱이를 색출하겠다며 학살을 벌이고, 밤에는 그들이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하며 빨치산들이 내려와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양민을 사살했다. 빨치산들이 학살한 주민의 수는 총 희생자의 10~20%, 대략 3000~6000명으로 추정된다.


-사건 종료

(사살당한 이덕구)

1949년 3월, 유재흥(훗날 3대 연합본부참모총장과 19대 국방부 장관에 오른다)과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이 강경한 진압은 수그러든다. 유재홍은 무력 진압 방식을 무력과 선무공작 병행으로 바꾸어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을 마련하고 산의 피난민들에게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 약속했다.

4월부터 하산자들이 나타나며 5월까지 수천여명이 하산, 여자와 어린아이, 노약자를 제외하고선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유재홍은 재선거가 있던 5월까지 부임한 뒤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 폐지되었으며 서북청년회 일색이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도 같이 철수한다.

이 일련의 정책들은 무장대를 끝장내었고, 6월 7일 무장대의 이덕구가 토벌대에게 사살, 그의 시신은 위 사진처럼 나무 십자가에 묶여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하루동안 전시된 뒤 태워졌다.

무장대는 급격히 약회되어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의 검거로 소멸되었다.


-결과

(민간인 피해자 조사 결과)


총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제주도민의 최대 1/8, 30000~800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 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 자체조사를 했을때 '신고만'으로 들어온게 15000명, 사라진 마을 130여개등 제주도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유골 발굴 작업)

현재도 유해 발굴 작업은 꼐속되고 있으며, 실재 현재도 제주도의 촌락별로 비슷한 날 제사가 치뤄지고 있다.


-사건 이후

사건으로 제주를 떠나 부산이나 일본으로 떠난 제주도민도 상당수 있었다. 부산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영도에 정착했으며, 현재도 제주은행 부산지점은 연도구에 위치해 있다.

안타깝게도 이때 어처구니없이 체포된 이들은 상당수가 6.25 전쟁 당시 살해당하거나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때 젊은 층 가운데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청소년들이 국군에 자원입대했고, 특히 해병대에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 제주의 청년들은 6.25 전쟁동안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게다가 제주도민 자체도 한동안 색깔론의 피해자가 되어 손가락질 당했고, 제주어는 이탓에 현재는 소멸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

정부측에서도 이 사건을 오랫동안 부정해 왔고, 이를 인정하고 사과한것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사


참고로 보수 정당 국가 원수나 당선인으로써는 2022년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최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