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1.0.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제1공화국 수립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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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해방 이후 1공화국 수립을 전후해서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익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 조직 '콤 서클', 그리고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 조직 '병사 소비에트', 북로당에서 경남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었다. 그중 인민혁명군은 무려 1593명에 달하는 지하세력으로 군을 넘어 민중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인민혁명군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47년 초 붕괴되었다. 인민혁명군이 붕괴되자 북로당 조직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강진을 대표책임자로 하여 2차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려 했다. 이들은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 관계 조직을 내선으로 하고, 남로당에 포섭되지 않은 사회주의자와 그 밖에 청년단체 계통 조직선을 외선으로 했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 4연대 정보과 선인하사관 지창수는 병사 소비에트였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층 공작원이었다. 김지회는 콤 서클에 침투할 땐 좌익장교들이 그를 남로당으로 알고, 병사 소비에트는 그를 우익 장교로 알 정도로 보안은 철저했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하굑 시정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하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 전남 광주의 제4연대에 전속되었다.

참고로 이 4연대는 미군정시절 경찰과 충돌한 '영암사건'의 그 부대이지만 김지회와 지창수는 크게 휘말리지 않고 각각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했다. 그러던 와중 각자 상부조직을 통해 여수에 새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고, 4연대는 불온사상으로 평소 골치를 앓다가 이 불온한 병사(김지회와 지창수를 포함해)들을 14연대로 보냈다.

48년 5월,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차지하고,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주로 전남 동부(곡성, 구례, 순천, 광양, 보성, 여수, 고흥)에서 모집을 했지만, 지원자가 부족하여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 그 때문에 각 지방의 좌익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으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고, 남로당 측에서도 그렇게 14연대에 입대시키도록 독려했다. 당시는 반공이 국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별 제제를 가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발단

사건의 발단은 제주 4.3사건, 여수에 주둔한 14연대는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 10월 초부터는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 공급받고 있었으며 당시 국군으로썬 신식 무기인 M1 개런드나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 및 통신장비 등이 우선적으로 공급되었으며 그러면서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을 반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보다 2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국군과 경찰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경찰은 일제시대부터 일을 하던 순사들이 고스란히 채용되어 대민마찰을 자주 일으켰고, 군대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은 하급장교나 하사관 수준이었기에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이 없던데다 순사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에 분노한 이들이 많이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당장 위의 남로당 김지회도 일본군 소위 출신이었다. 이런 상황에 경찰과 육군은 서로 총격전을 벌일 만큼 험악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10월 15일이 다가온다.


-군사반란

10월 15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전달되는데, 이 명령이 군 통신망이 아니라 우체국 전보로 오는 바람에 일반 사병에게까지 금방 소문이 퍼진다. 출동 날짜는 10월 19일, 매우 촉박했다.

중앙당 소속의 김지회 등 장교 당원은 남로당 방침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연락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해 일단 출동 명령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들은 상급기관인 전남도당에 문의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에 들어갔다. 결국 그들은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고, 선전 해설반을 편성해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위병사령부 장악조, 통신망 차단조, 장교 처단조, 무기고 점령 조 등으로 병력을 나누어 연대를 장악한 후 지창수가 비상나팔을 불어 전체 부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기로 했다.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무기와 장비 선적을 지휘하고, 기타 장교들은 출동 장교 환송회식 중이었으며 홍순석 중위와 2개 중대는 순천에 있어 여수 주둔지인 신월동(현 여수시 월호동)에는 총 27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밤 10시 10분, 연대 무기고와 상황실이 장악당하고 비상나팔이 울렸다.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하고, 장교들은 대부분 만취하여 잠들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먼저 지창수가 연단에 올라가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 반대한다"는 이야기로 일장 연설을 하고, 좌익 사병들이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라고 소리치며 바람을 잡았다. 그러던 와중 누가 "지금 경찰 놈들이 부대에 쳐들어오고 있다!"라고 외치자 당황하던 사병들까지 총을 들고 도망친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단결해버렸다.

이때 하사관을 비롯한 장교 3명이 연단으로 뛰어가 반란은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했으나, 이들이 남로당 중앙당원임을 모르는 사병들은 순식간에 이들을 사살하고, 뒤이어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사살, 군의관 등 일부를 제외한 20여명의 장교를 살해했다. 이들 중 15명이 남로당 중앙당원 이었다.

이후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운 좋게 사상이 불분명한 김지회는 장교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살아남았고, 10월 22일 덕유산과 지리산을 돌아다니며 야산대들을 점검하던 이현상이 순천에 도착, 총 지휘권을 지창수에게서 넘겨 받은 다음 "그런데 장교들은 다 어디갔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제야 거의 홀로 살아남은 김지회의 신원을 그가 보증하여 풀어주면서 김지회는 반란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과거 이 반란의 배후가 누구인가에 대해 여러 설이 주장되었지만, 현재는 북한의 개입설을 부정하고 이 지창수 상사의 단독 범행이 다수설이 되었다. 결국 치밀한 사전계획 없이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반란이었고, 이들은 급속히 진압되어 산 속으로 쫓겨나 유격전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반란의 진행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1948년 10월 24일자 여수인민보


14연대의 반란을 알아차린 여수경찰서와 경찰서장 고인수는 비상소집을 걸어 150명의 경찰관이 집합하고, 연락을 받은 40여명의 헌병대와 합동작전으로 1차 저지선을 형성했다. 광주 경찰서의 명령은 '경찰서 절대사수'였으나 압도적인 병력차로 저지선은 순식간에 격파, 반란군은 경찰서로 진입해 유치장의 피의자 50여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지급했다.

10월 20일 여수의 주요 공공건물과 요소마다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가 열렸다. 반란군은 또한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날 남로당 수장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 이현상이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따라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400명)이 순천으로 향하고, 2개 중대는 여수에 남았다. 이 멍청한 짓 덕분에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땐 반란군 주력은 없었다.

정부 당국은 21일이 되어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에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 보도가, 26일이 되어서야 국제신문이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 한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반대로 평양과 로동신문 등은 20일 아침에 이를 처음 보도했었다. 참고로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으로만 알았다.

반란군 주력부대는 이미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20일 오후 순천이 장악, 21일에는 구례, 광양으로 진출했다. 이 중 200명이 보성으로 무단 이탈하여 벌교읍 인근에서 무차별 살육을 벌이다 광주의 진압군에게 전멸당했다.(소설 태백산맥에서 묘사가 되는데, 소설과 달리 지역민의 환영은 없었다고 한다.)

20일 새벽 광주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 중대를 급파하지만, 4연대는 이미 진작에 김지회와 지창수가 발을 들인 곳이었고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부대 내의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소위 이명은, 장인호 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살해하고 반란군에 투항해버렸다.


-정부의 진압

(불타는 여수 시내)

원래 반란군의 계획은 북에서 밀고 내려오면 전국 각지 연대에 소속된 좌익 세력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 답게 구라를 깠고, 여수 지역 외의 반란은 시작도 못했다.

정부도 처음에는 진압군이 반란군이 되는 등 혼란을 겪었지만, 육군총사령관(현 육군참모총장)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 대전 제2연대, 전주 제3연대, 광주 제4연대(현 제20기갑여단),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 군산 제12연대, 마산 제15연대의 전 병력과 기타 차출병력, 육군비행대의 L-4 10대, 육군 가갑연대(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의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 대대 까지 사단 규모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기껏 해봐야 1600명 정도, 연대 수준 밖에 되지 않은데다 부대 간 협조체계 미비 등으로 아군끼리 총질을 하는 등 개판이었다.

21일 새벽, 순천군 서면에서 4연대가 반란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22일 오전 순천을 수복, 광양 방향으로 이동하던 김지회는 22일 오후 15연대와 대치중에 연대장 최남근을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해 입산한 뒤 탈출을 가장해 하산했다 이 사실이 발각, 총살당했다.

진압군의 목적은 이들의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실상 실패, 여수, 순천 회복에만 집중했다.

순천시가지 수복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으로 하여 L-4 정찰기가 상공에 뜨고 3연대와 12연대가 공격의 주역을 담담했다. 10월 23일 오준 순천이 완전 수복되었고, 검거된 피의자 458명 중 101명이 무죄석방, 79명에 징역 20년, 79명에 징역 5년, 102명은 사형에 처했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5연대가 여수 수복작전을 실시하나 거센 저항으로 실패, 다음날 두번째 공격은 송호성 장군이 직접 지휘하였으나 이번엔 매복으로 송호성 장군이 부상을 당해 실패, 25일부터 12연대가 박격포 지원으로 주공을 맡아 결국 27일 여수를 탈환했다. 하지만 이미 반란군의 대다수는 지리산과 별교로 후퇴한 다음이었다.


-온건파의 실패

24일 여수 수복작전 중, 사령관 송호성 장군은 온건 진압을 주장했다.

당시 부산일보 10월 31자 신문에는

송호성 장군은 공격에 앞서 2차례나 삐라를 뿌르는 등 반군 측과 양민을 분리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는 반도측 보안대의 방해로 말미암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다.

라고 되어 있으며 1960년대 일본 역사학자 하야시 히데키는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 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고 되어 있다.

이명박 정부 시기의 조사보고서에도 송호성이 온건입장을 취했다고 나와 있지만, 온건파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대부분 지리산으로 입산, 여수에는 정작 북한군이 남진하는 줄 알았던 몇몇 좌익분자만 남게 되었다.

결국 진압군사령관은 김백일로 교체되었고, 25일 근처의 군부대까지 긁어모아 여수를 향해 진격했다. 물론 14연대의 주력은 없었지만. 미평리를 점령하고 26일 아침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했다. 그런데 해상에서 여수로 상륙하던 5연대 1대대의 박격포가 12연대를 강타해 중대장과 하사관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무튼 이후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를 탈환, 27일 오전 완전 수복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경찰의 가족이 학살당한 것을 보고 그대로 대규모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


-지리산 유격대

사건이 사실상 종료된 48년 11월, 지창수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와 6백 명의 변력이 집결했다. 조계산에도 2백 명이 있었지만, 본래 4천 명에 달하던 병력은 이제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병력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은 400명과 생포된 2800명이었는데, 이 중 410명이 사형 선고, 568명은 종신형으로 수감되었으며 기타 병사는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아 수감되었다가 전쟁이 터지며 총살당했다.

지리산에 입산한 반란군은 그대로 빨치산이 되어 자기 나름대로 투쟁을 벌였다.


-반란군의 최후

남로당 여수 지구 위원장 이용기는 반란 일주일 후 여수 근교 마래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마 14연대가 반란을 이르키면 각지의 다른 국방군도 호응하고 38선에서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약속만 믿고 있었지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자 속은 것을 알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4연대 반란군 600여명과 여순지역 폭도까지 합 1천명 정도가 백운산과 지리산에 입산했으나, 국군의 진압과 민심 이반 북한의 구라핑으로 세력이 급격히 약해진데다 이현상의 실책으로 49년 4월에는 고작 200명 정도만이 남아 지리산 일대에 분산 고립되었다.

잔당은 한국전쟁까지 빨치산으로 활동되었으나, 지창수는 지리산으로 가지 않고 지역 방어에 매달리다 48년 11월 이후 이현상에 의해 모든 지위가 박탈, 49년 2월 경남 하동에서 국군 토벌대에게 생포되었고 반란의 주모자라 정식 군법회의에 갔다. 이 지창수의 집안은 광주의 이름난 부호였고, 막대한 재력으로 무기징역을 받는다. 하지만 전쟁 이후 50년 8월 경 처형당했다.

49년 4월 9일, 김지회를 비롯한 30명이 산내면 반선리의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군경에 의해 홍순석을 비롯한 17명이 사살, 7명은 포로로 생포되었다.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4월 13일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이 채포, 600m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회손된 시체를 찾아냈지만 훼손이 심해 신원확인이 불가능하여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아무튼 김지회도 사망하였고, 조경순은 무기징역을 받은 뒤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이현상은 5년간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돌아다니다 남로당 출신 김일성 절대지지파로부터 출당 및 지위를 박탈, 홀로 지리산을 배회하다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투항한 빨치산으로 구성된 군경토벌대에게 사살당했다.

참고로 이현상은 51년 말 군경의 공세로 남부군이 작살나자 100명 남은 병력을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재편, 김지회 부대는 그의 직속으로 끝까지 그를 지키가 이현상이 숙청될 때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여 995부대가 되었다. 995 부대는 53년 말 김태규가 투항하며 소멸되었고 이로써 14연대 반란군과 남부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여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고 다음해 부터는 군부의 숙청이 분격회 되었다. 당시 현역 군인의 5%가 갈려나갔고 이 중에는 진짜 좌익사상을 가진 이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쫓겨나거나 죽거나, 고문으로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게 있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지력도, 남로당의 지시도 아니었고 오히려 군대 내의 조직이 박살이 나서 남로당의 타격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은 훗날 전쟁 이후 남로당계와 박헌영의 숙청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남한 내부에서도 이 군대 내의 숙청으로 반공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만주군 출신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도 가져왓으며 이승만의 군 장악도 같이 달성되었다.


-민간인 학살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여수군민. 오른쪽에 분류된 이들 중 89명이 총살당했다.)

극우 조직 대한청년단의 단원에 따르면 "죄 있는 사람은 살았고, 죄 없는 사람은 무조건 총살시켜 죽였다."고 할 정도로 좌우 가리지 않고 민간인의 학살은 심각했다.

일단 반란군은 경찰관과 우익진영 인사를 검거해 그 가족들을 죽였다. 대략 150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군에서도 약 200명 가량이 살해당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여수는 좌우 대립이 약해 상대적으로 학살이 덜했으나, 좌우익이 극심하게 대립하던 순천은 대규모 학살극을 피하지 못했다.


반란 당시 정부에 반감이 있던 좌익 계열 시민과 학생들이 협조한 사실이 왜곡된 정보로 퍼져나가며 기괴하게 변형이 되었고, 특히 살아남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원이 복수에 눈이 뒤집혀 일단 잡아가 죽이고 보기 시작했다.


진압군들이 전남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인 척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모였으니 너희는 좌익 빨갱이다!"라고 하며 집단 학살했다. 이때 명령에 따르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이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로 좌익이 되어 사살당했다.

운동장 한켠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고, 20~40세의 모든 남성은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앉아 경찰관 가족과 우익청년단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허나 이들은 좌익과 부역자 외에 평소 원한이 있던 이들도 손가락으로 지목하였고,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었거나, 머리가 짧거나, 딱 보면 빨갱이의 기운이 느껴져서 지목되었다.

5연대 1대대장 김종원은 일본 헌병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일본도로 아무나 참수하다 지치면 총으로 아무나 총살했다

각 지방 면장들은 군경 앞에서 의무적으로 일정 양의 좌익 세력을 지목해야만 했다. 왜 죽일 사람 지목하는데 할당량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위에서 언급된 김종원은 이렇게 지목된 이들을 일본도로 하나하나 목을 쳤다. 미군 보고서에 '짐승같은 인간'이라 특기할 정도로 잔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 간에 도장을 빌려줄 정도로 친분이 쌇인 것이 화가 되어 몰살당했다. 남로당 가입실적을 내려는 당원이 마을 이장 이름으로 도장을 빌려 주민의 이름을 당원 가입신청서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죽은 민간인은 대략 7000명 정도로, 이 중 좌익 시력은 1300명~2000명으로 추정된다.


-기타

이 사건 이후 4는 육군 독립부대명에 절대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된 뒤 현 제20기갑여단으로 이어졌다.

당시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던 목사 손양원의 아들들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는데,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것이 유명하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계기이자 육군 간호장교단이 최초로 활약한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박정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는데, 그는 사건 이후 대규모 숙청에 적극 협조하여 살아남았다.


이 사건 당시 희생당한 민간인들은 2020년 1월 20일 오후 2시 19분 무죄가 확정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