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1.1. 주먹구구 반란 - 여순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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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7일자 조선일보)

김구 씨 피습 절명

26일 오후 7시 경교장에서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

(26일 오후 2시 반 헌병 사령부 발표)

금일 오후 1시 20분 경 경교장에서 괴한이 침입하여 김구 씨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김구 씨는 흉부 관통상을 받아 오후 2시경 절명하였다. 범인은 범행 후 도주치 않고 체포를 대기하고 있어 곧 체포항 방금 헌병사령부에 수감 문초 중이다.


-배경

일단 암살 전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척을 지고 있었다. 앞서 1948년 이승만은 '혁명의용군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 이자 해방 후 경찰을 맡은, 이승만의 최고 반대파 최능진을 비롯해 서새충, 김진섭 등이 혁명의용군을 만들어 48년 10월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맞춰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는 내용인데, 문제는 이 반란을 위해 모았다는 병력은 고작 2,300명이고, 군 내부에서 부대를 포섭하기로 했다는 안종욱과 박규일은 각각 이병과 일병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더불어 김구까지 엮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시키려 했으나 실패, 오히려 이승만의 이미지만 깎이고 말았다(최능진은 고령을 이유로 풀려난 뒤 1951년 2월 서울 수복 후 내란혐의로 총살당했다.)

아무튼 김구는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별 타격은 없었고, 남북협상이 실패했음에도 계속해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데다 암살 직전에는 반민특위를 강력지지하는 등 행보로 많은 이들이 그가 제2대 총선에 출마할것이라 생각했다.


-경교장의 총성

1949년 6월 26일,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 김구의 사저, 경교장에 그날 오후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 안두희가 찾아온다. 군복 차림에 권총을 찬 안두희는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했다. 직후 헌병 대위 강홍모가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하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한 뒤 먼저 백범을 문안했다. 강홍모가 나간 뒤, 비서진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안두희를 백범이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다.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있었지만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던 백범은 비서에게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듣자 들어오라고 말한다. 잠시 후 안두희가 들어오고, 안두희는 백범에게 먹물을 갈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백범이 안두희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 안두희는 권총을 들어 백범에게 총을 발포했다.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다급히 서재로 달려갔으나, 이미 백범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다급히 백범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백범은 사망한 뒤였다.


-사건 이후


(연행되는 안두희)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려다 경비들에게 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안두희는 백범이 남북 협상을 통해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결국 참다 못해 백범을 죽였다고 말했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헝병 부사령관 전봉덕이 이 사건을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도 한국독립당 내부의 집안싸움(안두희도 한국독립당원이었다.)이라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도 살인교사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김구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뤄졌다. 정부는 장례식을 국장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장례위원회측에서 이승만 정권에게 니들이 죽여놓고 무슨 국장이냐며 반발해 민족장으로 치르려 했으나 김규식이 절충, 국민장이 되었다. 26일 오후 12시 30분 경 사망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빈소에 다녀갔으며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장례기간 10일동안 약 2백만 정도가 조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 이승만은 그의 저서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이야기보다 자신의 업적인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 지시, 교육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물론 알다시피 이런 행보 때문에 김구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늘었지만.

이후 5.16 군사정변을 통해 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야 그는 복권,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이는 박정희가 이승만과 척을 진 사이이기도 하지만 김구의 차남 김신이 군사정변의 주요 협력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안두희의 이후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3개월 만에 15년으로 감형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잠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은 뒤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 9월 15일엔 중위로 진급했다. 다음해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은 그는 12월 15일 대위로 진급하고 1953년 2월 15일 완전 복권된 후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서류상 전역이지만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며 동향친구 이기건 장군의 배려로 강원도 양구에서 콩나물과 두부를 육군에 납품하며 겁나 잘 살다가(자식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학교 교장이 직접 마중을 나갈 정도로 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난다.

1965년 김구 추종자 곽태영에게 목을 찔려 사경을 해맸으나 욕을 신나게 처먹어서 인지 가까스로 살아나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10년간 은거,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화장 권중희에게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구타당하며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뒤 그에게 1991년과 1993년 또 폭행당했다. 

1992년 2월 28일 김구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기도 했으나, 여기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범행이었다 주장했다.

같은 해 4월 13일 동아일보를 통해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 증언했으며 4월 15일에는 장택상 등 4인의 지시였다고 진술했으나 이는 논란이 많다. 미국이라 증언한 부분에선 아예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의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었다.

1994년 1월 4일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끝까지 암살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며 이미 건강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비참한 최후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아파트 5층 자택에서 버스 기사 박기서의 방망이,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박기서는 각계각층의 탄원으로 최소 5년형인 살인죄를 감경받아 3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3월 13일 특별사면되어 풀려났다.(현재는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

백범은 전국민의 슬픔 속에 장례를 치루고 효창공원에서 영면을 취했으나, 안두희는 조문객은 커녕 상주로 온 사람도 없어 다른 장례를 챙기던 장례지도사가 대신 촛불을 켜줄 정도로 쓸쓸했고,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누가 백범의 암살을 사주했나?

암살의 배후에는 이승만이나 미국 전략사무국(OSS), 군부, 혹은 김창룡이라는 설이 있다. 어떤 이는 신성모가 배후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장택상이 배후라고도 했었다. 허나 안두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에 누가 배후인지는 영원히 비밀로 남게 되었다.

다만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원임을 밝힌 미 육군 정보국 문서를 공개하며 그가 미국 정보요원이었다는 사실만 밝혀지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