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1.2. 누가 죽음을 사주했나 - 백범 김구 암살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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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6.25전쟁 스토리를 이때 진행하게 될 줄 몰랐다. 


-1950년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월드컵 개막전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강릉 해안가에 북한군 유격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과 교전하다 전사한 전대욱 경사가 앞으로 3년간 이어질 전쟁의 첫 전사자였다. 곧이어 새벽 4시, 북한군의 T-34 탱크를 필두로 13만명에 달하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공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남북 병력 배치도)

이북괴뢰불법남침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25일 조효부터 삼팔선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이 대거불법남침하여 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25일 정오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25일 조효 5시부터 8시 사이에 삼팔전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은 대거하여 불법남침하고 있다. 즉옹진 전면으로부터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지 전면의 괴뢰집단은 거의 동일한 시각에 행동을 개시하여 남침하여왔고 동해안에는 괴뢰집단이 선정을 이용하여 상륙을 기도하여왔으므로 전 지역에 걸쳐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격퇴, 목하전설각지역의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요격하여 긴급적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6월 28일을 끝으로 10월 23일까지 발간되지 않았으며, 그동안 방응모 사장을 비롯한 다수의 임원이 납북, 혹은 실종되었다.)

당시 한국군은 미군의 체제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은 개전 당시 대부분 자기 집에 돌아가 있었으며, 군 수뇌부는 이 시간에 육본 장교클럽에 모여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놀고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미 전쟁 직전까지 계속된 무력충돌로 군의 피로도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고, 군은 병사들에 대규모 휴가를 보내는 실책을 저질렀다.

참고로 개전일인 6월 25일은 농번기이지 장마철이라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하지 않은 시기였는데, 김일성은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 개전을 강요했다. 참고로 역사에 이와 비슷한 시점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 독소전쟁...

아무튼 일요일 새벽 기습적인 남침으로 국군은 다급히 비상소집령을 내렸고, 그동안 북한군은 막힘 없이 38선을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 당시 당직 장교였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연락장교 김종필 중위는 다급히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당직사령에게 전군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지만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권한이 없다며 거절,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연락하였으나 그날 2시까지 놀다 들어간 채병덕은 통상적인 국지전일거라며 잠에 들고 말았다.


결국 전군 비상이 걸린 것은 전면 남침으로부터 3시간가량 지난 오전 7시, 그럼에도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며 전화코드 뽑아놓고 쳐 자고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10시 30분이 넘어서야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다가 보고를 받았다.

미군 또한 트루먼 대통령은 휴가, 장관과 참모총장 까지 모든 지휘라인이 일요일이라 부재중이었다.


미국은 한국에는 산이 많고 그나마 있는 평지는 논바닥이니 전차의 기동이 힘들어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북한 전차는 대전차지뢰, M9 바주카와 57MM 대전차포 정도면 충분히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애초에 줄만한게 저거 뿐었기에 한국의 대전차무기는 저정도 였다. 물론 이 화기로도 국군은 북한의 T-34-85를 무력화 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무기로는 북한군의 전차를 막을 수 없었다. 포병대의 M3 105mm 경곡사포도, 유일한 기갑전력인 M8 그레이하운드도 북한의 T-34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차가 없는 전선은 숫자에서 열세였다. 황해도 옹진반도에 주둔했던 육본 제17연대는 3배에 달하는 인민군을 상대로 항전하다 결국 철수했으며,  국군의 무리수로 투입된 육사의 1,2기 사관생도들은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후퇴, 심지어 국군의 오보로 인해 1사단(백선엽이 사단장인 거기)은 병력의 60%를 잃는 전멸급 피해를 입고 간신히 후퇴했다.


개전 시점 문산과 파주시의 1사단, 춘천과 홍천의 6사단이 남진을 저지 중이었으며 강릉-주문진에선 8사단이 분투 중이었다. 문제는 북한의 주력이 있는 포천-동두천-의정부 부분. 알다시피 이곳이 몇 안되는 개활지이자 서울까지 탁 트여있는 침공에 아주 적당한 지역이었다. 여기를 지키고 있던 7사단 2개 연대는 북한의 3개 사단(3,4,15사단)과 전차 여단 예하 전차연대 둘을 맞서 싸워야 했다.

뒤이어 올라온 지원병력도 포천과 의정부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고, 6월 27일 시점에선 정말 서울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이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 국회는 6월 27일 새벽 4시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를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진작에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튀어 있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이승만은 6월 25일과 26일 맥아더와 연락해 조치를 취하고 육본을 방문했다. 26일 저녁엔 몇몇 인사가 피난을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듣지 않았고, 27실 새벽엔 주미대사 장면에게 연락해 미 대통령을 만나라 지시했었다. 직후 신성모와 이기붕을 비롯한 각료들이 경무대에 찾아와 다시 피난을 요청했으나 듣지 않다가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소식(당연히 구라였다. 이 시점에 북한군은 서울 진입은 커녕 포천-동두천에 있었다.)을 듣고서야 서울역으로 떠났고, 약 1시간 뒤 신익희와 조봉암이 경무대에 찾아왔다. 이 피난은 입법부, 사법부, 부통령까지도 모를 정도로 몰래 진행되었다. 신익희와 조봉암은 직후 부랴부랴 피난을 떠났다.


같은날 저녁 7시 30분, KBS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이 대통령이 보낸 차를 타고 충남지사 관사에 가 지침을 받았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4.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5.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된다.

유병은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에 연락하고 90분 뒤인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켜 11시까지 이승만의 "특별담화 방송"이 3번 방송되었다. 이 방송 육성음은 전쟁 중 손실되었다.

참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는 실제로 이승만이 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의정부 탈환, 서울 사수, 안심하라는 방송이 연달아 있다가 대통령의 '열심히 싸워라, 미군이 올 것이다'라는 방송은 충분히 착각이 드는 말이었다.

1950년 06월 27일 이승만의 실제 방송문 (축약)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방송을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끝내 6월 28일 0시, 북한군은 미아리(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서 교전을 하기 시작했고, 전투 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방송 전부터 피난을 시작하였으며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에 한강 이남 즈음에서 방어선 구축을 결정, 후퇴를 시작한다.

그렇게, 역사의 시간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가 되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일단 이미 27일 오후부터 육군공병학교 작업조가 미리 한강 위의 철교 3개와 인도교 1개를 폭파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방송이 있었고, 방송 5시간 후인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파, 2,3,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붕괴된 한강 인도교, 사진은 폭파 한참 후로 추정된다.)

원래는 민간인 수백명의 피해가 있었던 것이 정론이었으나, 현재는 군경 77명 외의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애초에 폭파 중지명령을 하달하려던 장창국 대령조차 가로막힐 정도로 통제되던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한강 이북에 전투력을 보존한 국군 부대는 물론 미군사고문단까지 수없이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의 대형 화기를 한강에 폐기한 뒤 소화기만 챙겨 간신히 도하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시민들 중 피난갈 사람은 나무로 만든 대문을 뜯어 한강을 건너려 많이 시도했는데, 한강은 전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의 강폭을 자랑하고, 장마철인지라 상당수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다리가 부분 폭파되고 고작 3시간 뒤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강 방어선은 북한 보병부대가 서울로 진입하고, 한강 철교를 복구하는 7월 3일까지 지속되었다.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 고립된 시민들은 그들의 노역에 동원되었고, 이들은 군경의 가족, 혹은 정부와 연줄이 있는 이를 제외하고는 서울 수복 후 '부역자' 혐의로 처벌당했다.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총 555,915명이 검거당해 867명이 사형당했고, 남은 이들은 비판 여론이 일어 다음해 3월 대부분 석방되었다. 물론 이 서울 시민들은 '협조를 거부하면 인민재판을 당해 죽었을 상황'이니 방도가 없었다.


이 사건으로 민심히 흉흉해지자 군은 낙동강 방어선 반격 당시 지뢰 매설지 표시 미비로 체포된 최창식 대령을 책임자로 지목해 군법회의에 회부, 사형에 처했다. 허나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결백을 주장하였으며, 정황상 일개 공병감이 독단으로 다리를 폭파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니 사실상 희생양이었다(최창식 대령은 당시 한강 이북에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있었다.). 최창식 대령은 196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13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되었다.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건으로 느낀게 있었는지, 중공군 참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12월 8일 '부녀자의 소개는 자유로움'을 공표했고, 12월 24일에는 서울시민에 대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1.4 후퇴)


-누가 폭파를 명령했는가

일단 기본적으로 참모총장 채병덕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다는게 정설이지만, 국방장관 신성모나 국방차관 장경근이라는 설도 강하다.  미 군사고문단의 기록에서는 반대로 육군본부 김백일 대령이 장경근 국방차관의 명령으로 폭파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설이 맞다면 김백일 대령이 잘못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국방차관이 월권행위를 저지른 것이 된다.

한강교 폭파명령 자체는 참모총장 채병덕이 내려놓은 상황이지만 미 군사고문단과 지휘부의 합의로 폭파명령은 우선 준비상태였다고 볼 수 있지만 명령의 주체자가 국방부였다는 이야기가 계속 정황이 나오고 있다.

결국 유력한 인물은 신성모와 장경근 둘 중 하나라는 것. 동시에 둘 중 하나가 독단으로 저질렀든, 두 사람의 상호묵인하에 명령을 내렸든 말이다.


아무튼 전쟁 초기 내내 삽질을 거듭한 채병덕과 신성모는 전쟁 중 또한번 대형 사고를 치고 마는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