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 1.3. 함락까지 3일 - 한강 인도교 폭파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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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시간은 1950년 말,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한동안 북한 치하에 있던 남한의 장정들이 다시금 공산군에 징병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였고, 결국 정부는 그해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40세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그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국민방위군설치법'을 발의했다. 문제는 이 법이 국회에 제출하며 예산 계획을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미칠듯한 날림이었고, 12월 21일 첫 부대 1만여명이 창덕궁에서 소집, 행군에 나섰다. 그로부터 겨우 2주 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죽음의 행군

(국민방위군. 이들의 상당수는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은 커녕 군복조차 주지 않고 집결 날자도 없이 오로지 '도착지 동래군 구포읍(현 부산광역시 북구)'라는 작전명만 육본으로부터 하달받았다.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본으로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문제는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의 알력다툼으로 내무부가 아예 지방에 양곡 지급 중단을 지시할 정도로 협조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들의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 리가 없었고 그들은 인민군 휘하 의용군 대접만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민방위군 소속이던 서태원(5대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이'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목격자나 경험자의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했다.


게다가 당시는 12월, 그것도 유례 없는 혹한이 불어닥치던 겨울이었다.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겠지.'라고 생각해 별 대비 없이 길을 나섰으나, 정부는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 배정해서 무엇하냐'며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차량은 없었다. 전부 도보 행군, 그것도 국도를 UN군이 통제하니 샛길과 산길을 타고 이동했으며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디고,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그렇다고 이 행렬에 군기나 감시가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떤 국민방위군 병사는 행렬 중 노점상에서 인절미를 사먹는 첫 쭈그려 앉아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도망쳐 탈영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관리감독은 없었다.


-예산 횡령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을 가정해 후방에 50여 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0000여 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 하지만, 교육대의 육군 기간요원들은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던 육군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군복도 지급하지 않은 채 알아서 하라고 던져두었으며, 교육대 장병들의 대부분은 이승만 산하 백색테러단체 서북쳥년회 소속 간부들이었다. 특히나 사령관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으면서도 군경력자가 아니라 대한청년단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인,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사위였다. 그러니까 그냥 낙하산.


평시라도 이런 군인 양성 및 예비대 조직 운영은 상이 현역 장교나 퇴역 예비역 장교들이 간부가 된다. 저때의 국군처럼 사실상 국군 출신 장교가 없다 하더라도 일본군, 만주군, 국부군 출신의 예비역은 물론 상이군인도 있었는데 그들을 두고 군인으로서 자질도 없는 것들을 앉혀 놓은 것이다.

교육대의 장병들은 병력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도달하면, 자기들에겐 수용 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며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렸다. 이런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 당국의 발표로 24억원, 국회 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60억에 달했다. 1950년 물가로 5,60억이다.

국민방위군의 재정을 담당하던 부사령관 육군 대령 윤익헌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으며, 100여 일동안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원. 당시 국가기관인 감찰위원회(현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 가량이었다. 


1951년 3월 국회진상조사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대략 부정액만 72억 8164만원, 50만명 기준으로 책정된 1951년 1~3월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 원의 1/3에 달했다. 문제는, 이 돈은 사령부가 해먹은 금액이고 예하 52개 교육대에서 얼마나 횡령했는지는 추산 불가능이었다.

국민방위군은 1인당 1일 양곡 4홉, 취사연료비 40원, 잡비 10원이 책정되어 50만 명 기준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원을 국회에 신청했다. 실제로는 68만명이 모집되 턱없이 부족하며, 한겨울인데 난방비, 의료비, 피복비는 아예 책정하지도 않았다. 또한 훈련비와 부대 운영비도 없었으며 국민방위군 장교 및 하사관의 봉급도 일절 없었다.

참고로 이 4홉은 대략 721g으로, 전쟁포로는 하루에 5홉 5작을 받았다. 참고로 지금 쓰는 밥그릇이 350g이다. 저들은 지금보다 식사량이 많던 시대에 몸 쓰는 장정들이니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해 장부 상으로 엿공장을 짓는다고 써 놓았다. 당당하게 나라에게 엿을 처먹은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했으며, 그러다 빈토사관란으로 죽은 장병들도 발생했다. 그 만들었다는 엿 공장은 생산능력에 비해 소비했다고 기록한 쌀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고 적었으면서 20대 밖에 사지 않았다. 명태 386만 짝을 샀다더니 고작 4000 짝만 구입했고, 담요 등 기타 물건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산

일단 정부의 초기 걱정 대로 점령 예상 지역에 남은 청장년들을 이동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국군의 병력 자원 확보는 대실패했다. 이 제2국민역 68만명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대부분 귀향 조치를 받았으며, 당시 소집된 사람들의 상당수는 입대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게다가 이들까지 모조리 무장시킬 장비는 더더욱 없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이 없어도 더 생생한 청년들을 징병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결국 1951년 1월 15일 국회에서 최초로 문제가 제기된 뒤, 2월 17일 36세 이상 장정들을 귀향시켰으며 3월 15일 서울 재탈환 후 3월 25일 26세 이상 장정들을 귀향시켰다. 이후 사건이 심각해지자 3월 30일 전 교육대가 해산, 4월 30일 국민방위군 폐지법안을 통과시킨 후 5월 12일 국민방위군 폐지법을 정식 공포함으로 법적으로 완전 해체되었다. 이렇게 끌려간 이들 중 고작 7909명 만 군번이 있어 뭐라도 참잔자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군번이 부여되지 않아 복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상자 수

이승만 정부 공식 기록은 1000~2000명 사망이라고 했으나, 당시 소문으로는 5만~10만명, 중앙일보의 <민족의 증언>에서는 50만명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했으며 부산일보의 <임시수도 천일>에선 사망자가 5만여 명이라 서술했다.

이승만의 열렬한 찬양자 유영익 교수조차 9만명이 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말했으며, 당시 국회의원 서민호는 "수천 명이 굶어 죽어갔고, 귀환 장병들도 20%는 생명유지가 불가능하며, 80%는 노동이 불가능"이라고 발표했다.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계측할 수가 없는데, 사망자 상당수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으며 약 100일 동안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 27만 여명이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자 정리 위원회는 5만~8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했지만 다수의 매장지가 개발되며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전부 무연고자 처리되었으니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책임자의 처벌

1951년 1월, 현병사령관 최경록이 대구로 가는 길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하고, 처음엔 군기가 개판이 되었다 생각해 친히 그들을 혼내주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안내를 받아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목격했다. 헌병사령관으로서도 이제야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을 처음 들어본 최경록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사령관 김윤근은 그해 1월 20일 기자회견에서 구라를 까며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고, 신성모도 '간첩의 책동에 동요하지 마라', 죽 국민방위군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북한이 퍼뜨린 유언비어라는 소리.

이 두 사람은 이승만이 총애하는 사람들로 특히 신성모는 이승만의 말이 끝나면 눈물을 흘리는 기적의 후빨로 '낙루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국회가 신성모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꾸어 탈 수 없다"고 거부하며 신성모를 감쌌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국민방위군으로 탈영한 이들이 원채 많아 국민의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관련자들은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1951년 5월 6일 1심 재판에서 선고된 형량은 16명 중 실형 4명, 파면 10명, 무죄 2명으로 김윤근은 무죄, 윤익헌은 징역 3년 6개월, 나머지는 고작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참고로 당시 재판장은 이선근으로 김윤근과 윤익헌의 지인이었다.

(이시영의 정권 비판 현장)

이 판결을 본 국민들은 격렬하게 재판을 규탄하고 정부 불신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1951년 5월 이승만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등의 책임으로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경질, 이기붕을 임명했다. 5월 14일에는 부통령 이시영이 앞선 사태에 대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고 자리에서 사퇴했으며 6월엔 육군참모총장을 교체했다.

결국 5월 17일 김윤근이 구속수감되고, 총 11명이 고등군사법원에 송치, 7월 5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국민들의 정부 불신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를 허가했다. 참고로 7월 15일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때의 어느 답변이 걸작인다, 김태청이 정일권에게 "김윤근은 일등병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정일권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검열관으로 참석한 김석원 소장은 하도 어이가 없어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 계급장 떼버려!"라고 소리쳤다.


아무튼 이 고등군사재판은 논란이 상당히 많았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법리적 문재가 제기되자 이종찬 총장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 국방경비법이 아닌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으로 적용법을 바꾸도록 지시해 재심을 명하여 7월 19일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환, 보급과장 박기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8월 12일, 이들은 대구 근교 야산에서 공개처형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는 그 힘을 잃었고,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참고로 이들이 횡령한 어마어마한 자금이 단순한 개인적인 용도가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나왔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신속하게 처형당해 누구에게 얼마나 흘러들어갔는지 추적할 수는 없었다.


-기타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시인 신동엽과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도 이때 차출되었는데, 신동엽은 민물 게를 생으로 먹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어 1969년 일찍 요절하게 되었고, 정진석 추기경은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뒤 서울대 공대를 그만두고 신학의 길을 걸았다.

또한 당시 육군 통역 장교던 리영희 소령은 이 참상을 목전에서 보고 군사고문단 미 육군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으며, 이 사건의 목격은 후일 리영희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2년 경북 영천에 세워진 국민방위군 희생자 추모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