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 1.4. 병력을 버리는 방법 - 국민방위군 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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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증)

국민보도연맹, 약칭 '보련'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을 담았다가 전향한 이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로 6.25 전쟁 직전엔 33만명에 달하는 연맹원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나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 일러스트레이터 김용환 등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이 전향자만 있던 게 아니라 공산주의니 좌익이니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 없는 일반인들이 상당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공무원의 실적주의 때문에 전향자 뿐만 아니라 단순 동조자, 그냥 일반인, 사회에 불만을 가져 좌익으로 몰린 사람, 그냥 반정부 노선을 탄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시골로 내려갈수록 이런 사람이 대다수였다. 가족 가운데 공산당 당원이 있거나 월북자가 있으면 반강제로 가입당했고, 경남 남해에선 우익 청년단체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이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로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는데, 부역을 안해도 가입하면 쌀이나 비료를 준다고 하여 가입한 사람, 우파 단체가 반협박으로 가입시킨 사람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과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정부는 이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 공표했으나 실제로는 이들을 '요시찰대상'으로 취급하며 도민증 대신 맹원증을 발급해 사실상 비국민으로 취급했다.


-전쟁 발발

그러던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대부분의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6월 28일 서울 철수까지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했는데, 서울의 보도연맹원들은 개전 초기에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구호 활동을 하고, 검찰의 지휘 하여 비상구호반이 조직되어 피란민 안내와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등의 일을 했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한때 공산당 출신이었으니, 개전 직후 북한의 점령지에서는 반역 행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공산당 간부 출신이었던 정백은 앞장서서 인민재판과 군경 패잔병 색출에 나섰는데, 사실 북한 입장에서도 보도연맹은 전향자, 즉 배신자이니 눈앳가시였고, 정백은 북한군에게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몰려 인민재판을 받아 처형당했다. 이 재배신한 보도연맹원들은 북한군에게 사사건건 의심을 받고, 어떠한 책임부서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그냥 보도연맹원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정부는 "100명 가운데 단 1명이라도 이상한 짓을 했다면 그 100명을 죽여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이 논조였다. 그렇게, 대한민국 현대사에 길이 남은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대학살

부산으로 피난간 이승만 대통령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상부에서 명령이 하달되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 대비해 사람들을 구속하는 행위)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에 구금했다. 일부는 교도소로 가고, 일부는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이씨 종친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그렇게 운이 없었던 이들은 차례대로 트럭에 실어 인근 야산이나 선상에서 총살당했다.

6월 하순부터 전국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이후 점점 남부로 내려왔다. 특히 충청, 호남, 서부 경남은 북한과 남한 양측의 보복 학살이 있었고, 점령되지 않은 낙동강 방어선 안쪽과 이미 4.3 사건의 아픔이 있던 제주는 규모가 매우 거대했다.


-형무소 학살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된 일반 재소자는 석방되었고, 형무소 직원은 피난했다. 그러나 그 외에, 정치범이나 좌익 계열 재소자는 그러지 못했다.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6일까지 국군과 경찰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사범, 재소자, 미결수, 보도연맹원 1000여명을 인근 야산에서 학살했다. 7월 1일까지 단기사범이 석방되고, 7월 2일부터 주먹구구식으로 재소자를 분류해 보도연맹원, 좌익사범, 장기형 기결수, 미결수, 심지어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까지 낭월동에 끌고 갔다.

처음에는 사람을 나무 등에 매달거나 묶어 총살했으나 나중에는 청년방위대가 길게 구덩이를 파고 일렬로 구덩이 쪽에 눕게 한 뒤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

이유는 보도연맹원이나 범죄자가 북한군과 내통할 유려가 있어서. 사건의 유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려야 했다. 한동안 이들이 학살당한 골령골의 땅에선 핏물이 배어나오고 냇물은 붉게 변했으며 물에서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7월 21일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하며 우익 인사나 군경, 수도사 등을 채포해 일부를 살해하고 일부는 구금하고 있다가 9월 말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며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다른 지역도 상황은 비슷했고, 전쟁 기간동안 학살당한 재소자들은 수천명에 달했다.


-전국 각지의 학살

의외로 몇몇 지역은 면장이나 경찰 중 의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막기도 했으나, 상당수는 그 대가로 자신이 죽어야 했다. 특히 호남 지역은 더욱 심해서, 대략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경상도에서는 유명한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외에도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는 여럿을 굴비처럼 엮어 배에 태운 뒤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의 일부가 일본 연안에서 발견되어 일본에 합장되기도 했었다.

아자모 먼 바다에 부패한 시체

타살인가? 어선이 건져


야마구치현 고시가하마의 선장 스에다케 토라마츠 씨 소유인 마에마루(7명 승선)가 9일 오후 4시께 츠츠무라 아자모와 고토의 중간에 위치한 아자모 서쪽 근해 35마일 부근에서 주낙 조업 중 해상에 표류중인 시체를 발견하여 어선에 올려, 10일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이즈하라마치 경찰서에 신고했다. 검시에 의하면 죽은지 1개월이 경과하여 흉부와 복부에 걸쳐 부패하고, 인상은 판별하기 어렵지만, 신장 5척 5촌이고, 연령 추정은 30~40대 남자로 흉부를 굵은 새끼줄로 묶여 있었으며 양손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타살이 아닌가 하고 이즈하라 경찰서는 보고 있다.

1950년 9월 12일자 대마신문

참고로 거창 일대에서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보도연맹과 관련이 없는, 그냥 국군의 집단 학살이다.


제주도에서는 무려 820명이 예비검속되었고, 이중 한림지서에 검속된 63명은 집단총살,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조차 못하다 6년이 지나서야 몰래 수습해 그 중 46구를 한림읍 공동장지에 안장했으며, 149명은 대정읍 상모리에 수감되었다가 학살당했다. 이들 역시 6년이 지나서야 수습하여 식별 가능한 17구를 제외한 132구의 시신을 공동 매장했으니, 이것이 '백조일손지묘'('조상은 백 서른둘이 돼 자손은 하나니,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백 할아버지를 다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1961년 6월 군사정권의 협박으로 이 묘비는 철거되고 23기의 묘는 강제로 이장당했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한때 여기 있던 안경공장 건물에 괴담이 퍼지며 공포체험 장소로 유명해진 곳인데, 사실 전쟁중 대구와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들을 끌고가 손발을 밧줄로 엮고 수직 갱도에 집어 던져버렸다. 거기에다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불을 지르고, 고폭탄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이 이 갱도를 기어 올라 탈출하였지만, 결국 최소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제리 집단 총살사건

1950년 12월 15일, 수복한 서울에서 군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재소자들을 집단 사살하고, 미리 파둔 구덩이에 모조리 집어 넣어 버렸다. 그런데 당시 현장 인근엔 영국 육군 29여단이 주둔중이었고, 격노한 영국군은 이 사실을 영국 언론에 알림과 동시에 여단 사령관이 직접 자신의 주둔지에서 사건이 재발된다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추가 학살을 위해 한국 경비병들이 재소자를 이끌고 나타나자 영국군들은 경비병을 강제로 무장 해제시켜 구덩이를 다시 메우게 하고, 재소자들을 돌려보냈다. 또한 사흘 후에는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병사들까지 배치했다.

이후 경찰이 민간인 살해를 시도하자 영국군 장교가 이유가 무엇이든 살상행위를 중단하라고 하자 경찰측이 영국군 장교에게 총을 겨누었고, 영국군도 화답해 착검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경찰이 먼저 물러나며 민간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을 접한 외신들은 한국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국제적십자에서는 이승만에게 직접 항의서한을 전잘했으며 영국 정부는 대놓고 이승만대통령을 비판했다.


-학살의 끝

이 끔찍한 학살을 끝낸 것은 미군도, 정부도 아닌 중공군이었다.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이전까지 한국과 UN이 상대한 북한군과 달리 국공내전을 겪은 엘리트 병사들이었고 그 수도 매우 많았다. 국군의 소모율이 급증하자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결국 UN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와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의 지도 아래 국군의 대규모 개편과 확충이 이루어져 좌익 빨갱이건 우익 애국청년이건 사이좋게 최전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로써 1951년 부터는 학살이 사라졌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장면 내각의 4대 국회는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경남과 경북 등 학살 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이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고,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도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듬해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이렇게 군인에 의해 학살된 일이 불법에 의한 것이지만 이것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기적같은 논리로 처벌시켰다.

남은 유족들 역시 군사정권하에서 연좌제가 적용되 오랬동안 고통받아 왔고, 정권은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했다.

이 사건이 다시 대두된 것은 2005년 참여정부 당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면서 부터였다. 3년간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게 처형당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24일, 사건으로부터 반세기가 더 지나서야 대통령이 사과하였다.


존경하는 울산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사건 유가족 여러분,

58년 전,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6·25 전쟁의 와중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 받으며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수십 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이 기회를 빌려, 지난날 국가 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과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과거사 정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진실을 밝혀 억울한 분들의 맺힌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해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훼손된 국가권력의 도덕성과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아직도 의혹이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 진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밝혀진 일들에 대해서는 명예회복, 사과와 화해, 추도사업, 재발방지 대책과 같은 후속조치들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 정리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2020년 2월 14일 유족들의 당시 처분에 대한 재심 청구로 "재판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호응하는 등 이적 행위를 했다는 정거가 없어,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결과

1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살해당한 사람은 정부 추산 4934명이지만, 연구 결과 전국적으로 10만에서 30만명 이상, 최대 120만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가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로 정의할 것인가 학살로 정의할 것인가에 의견이 오간다. 제노사이드란 집단 학살, 즉 천부적 혹은 사회적 요소를 들어 특정 인류 집단을 고의적 및 제도적으로 말살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시도를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나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있다.

참고로 이 사건은 국제법으로도 "민간인 주민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서 그 공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범해진 위해"로서의 인도에 반하는 죄에 해당하며, 국제형사제판소의 설립협정인 로마 규정 27조 2항에 의하면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대통령이라도 공적 지위에 의한 면제를 주장할 수 없다.


이 학살은 나중에 가면 이것을 묵인하던 미군조차 학을 때서 학살만 전담하는 한국군 부대들이 있다며 미8군에 상신을 올렸고, 영국 정부는 아예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대량학살을 계획하고 있다며 미 정부에 정식 항의까지 했었다. 현지 영국군은 1950년 12월에 있었던 홍제리 사건으로 격분해 심지어 1951년 1월에는 영국 노동당이 나서 이승만 대통령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려 했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