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1.7. 기적의 계산법 - 사사오입 개헌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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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6년 11월 10일 서울시립극장에서 개최된 진보당 창당대회)

조봉암은 앞선 3대 대선에서 20%가 넘는 표를 얻으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1956년 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름으로 알 수 있다시피 성향은 다르지만 현 민주당계 정권의 뿌리다.)과 야권 단일화에 대한 협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자 혁신계 내의 계파 갈등 끝에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당 '진보당'을 만들었다. 비록 여러 반목과 분열이 있었지만, 진보당과 진보당의 수장 조봉암은 착실히 다음 총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1958년, 대한민국 사법 역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가 펼쳐진다.


-사법살인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총선을 4개월 정도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진보당 간사장 윤길중, 조직부장 김기철 등 전간부를 검거, 송치했다. 또한 이무렵 간첩 양이섭이 검거되며 당국은 조봉암이 양이섭과 접선하며 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 행위를 했다고 발표한데다 당국에선 재판도 안열린 2월 25일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진보당의 등록을 일방적으로 취소시켰다.

1. 평화통일론

2. 북한이 밀파한 간첩, 밀사, 파괴공작대들과 접선

3. 당원을 의회에 진출시켜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기도

(구속된 조봉암)

7월 2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조봉암은 불법 무기 소지죄를 적용하고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하며 조봉암과 주요 당원은 징역 5년, 나머지는 징역 1년 이하의 경미한 처벌을 내리고 진보당은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편결을 내렸다. 그러자 이정재를 비롯한 자유당 어용 깡패들이 법원청사에 난입해 행패를 부렸다. 결국 항소심과 상고심이 이루어졌고, 1심 판사 유병진은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상고심의 관여 법관은 재판장 김세원, 주심 김갑수, 배심 백한성, 허진, 변옥주 대법관이었는데, 이중 김세원을 제외한 넷은 친일반민족행위자였고 이중 백한성은 그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참고로 조봉암이 간수를 매수해 양명산에게 쪽지를 보내다 걸렸다고 하는데(통방사건), 이를 유력한 증거로 내놓았지만 이는 조작으로 밝혀졌다.

1심과 매우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된 재판 끝에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선고공판에선 재판장 김세원이 지방출장을 이유로 나오지 않고 주심 김갑수가 판결문을 낭독했다.

판결문에 따라 조봉암은 사형, 기타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이후 변호인단의 재심청구는 기각, 변호인단과 조봉암의 딸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봉암은 그날 형장으로 걸어가다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코스모스의 향기를 한참동안 맡은 뒤 담담하게 사형장으로 들어갔고, 의례적인 절차로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자

"이 박사(이승만)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이후 입회 목사에게 누가복음 23장 22절('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을 읽어달라 부탁하고, 마지막으로 "막걸리 한사발과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남겼다. 간수들은 담배만 허락하였고, 조봉암은 담배 한 개비를 천천히 피운 뒤 11시 3분 명을 달리했다.


-반응

지금도 사법살인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도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당시에도 보수 논조였던 동아일보는 조봉암 재판 과정에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아서 그렇게 되었을 뿐 그가 간첩은 아니라는 기사를 냈었고, 미국도 1958년 1월 23일자 주한미국 대사관 보고문서에 '이용 가능한 기본적인 정보들로부터 판단하건대 대사관 측은 조봉암에 대한 불리한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 기껏해야 설득력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으며 구속건과 보도된 증언은 진보당을 흠집내기 위한 정권의 시도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군의 중립성을 강조했던 군인 이종찬 역시 조봉암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민간인이 군사 재판에 회부된 불법적인 재판이니 사형은 안 된다고 국민방위군 사건(조봉암과 이종찬의 인연도 이 사건을 해결하며 시작되었다.)으로 권력의 중추에 오른 이기붕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게다가 역설적으로 이때 그의 무죄를 외친 사람은 극우 정객 장택상과 윤치영으로, 윤치영은 길을 잘못 들어서 좌파로 몰린 것 같다고 평했고, 장택상은 법무장관 홍진기(훗날 중앙일보 창업주가 되는 그사람 맞다)를 찾아다니며 조봉암에 대한 석방 구명 운동을 벌이고 국회에 그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옥 중의 조봉암을 대신해 무료 변론도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노력은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끝끝내 막을 수 없었고, 국민들의 불신은 이 사건에 이어 몇 개월 뒤에 벌어질 사건으로 폭주하게 된다.


-이후

2010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2011년 1월 이 사건이 제1공화국의 조작임을 시인하며 그의 무죄를 선고, 조봉암은 사후 52년 만에 공식 복권되었다. 죽산 조봉암, 52년만에 간첩 혐의 무죄 | 연합뉴스 (yna.co.kr) 대법원은 조봉암이 양명산으로부터 돈을 받고 정보를 건네주었다는 것 자체가 증명되지 않았으며, 설령 그것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를 간첩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진보 계열 정당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정치계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2020년 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구소련 외교문서를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1968년 9월 12~13일 북한을 방문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부의장 드미트리 폴랸스키가 김일성과 나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진보당 설립에 대해 북한 쪽에 편지를 보내 '해당 임무를 달라'고 요청. 김일성은 '정치국에서 토론한 결과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조봉암)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소련 측에 주장했다. 또한 김일성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에 대해서도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의 조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했으며 북한에서 조봉암의 대선자금을 지원했다고 하였다.

다만 이 소련 기밀 문서 전수조사를 비롯해 사실성 여부 및 그에 대한 검증은 아직 연구가 필요한다, 위 김일성의 발언과 달리 조봉암의 대선 출마(1956년 5월)와 진보당 창당(1956년 11월)간의 간격이 존재하며, 조봉암과 이승만의 득표수가 김일성의 발언과 다른 점, 조봉암이 총살됐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교수형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 문건은 김일성의 일방적 주장을 담은 것으로 이를 뒷받침하거나 교차검증이 가능한 물증 또는 다른 연구가 밝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일성의 '미국은 우리가 조봉암에게 선거운동을 위해 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주장도 신빙성이 매우 낮은데, 미국 국무부의 기밀해제 문건은 미국이 조봉암이 처형되기 직전까지 이승만 정부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구명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은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두고 '정치적 살인'이라는 강경한 표현을 사용하는 등 김일성의 위와 같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이 문건을 발견한 째르치스키 박사도 '소련 측에 자신의 한반도 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뻥튀기'가 김일성의 발언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이 소련 문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