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 1.9. 115%의 기적 - 3.15 부정선거 - 유렉카 채널 (arca.live)

----------

-배경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지도 어연 7년,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 원인을 보자면

먼저 언론이 있었다. 지금도 언론인은 나름 공부 한 사람 취급이지만, 50년대 당시의 언론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사실상 정부의 어용 언론인 '서울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반정부적이었고,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강해 각 언론사의 주필들은 다양한 노설, 사설, 칼럼 등으로 민주적 가치를 알렸다. 때문에 정부는 50년대 중반부터 언론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는데, 편집 실수를 한 동아일보의 발행인과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하고, 대구 매일신문에 테러를 가하고, 1959년에는 아예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버렸다.

또한 두번째는 이승만 정부가 자초한 것으로, 이승만 정권 12년간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가 교육으로 나갔으며, 국민학교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소득수준이 내려갈 수록 학구열은 더더욱 높아졌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배운 사람에 대해 고평가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해방 직후부토 1960년 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률은 78%에서 무려 4.1%까지 떨어졌다. 거기에다 대학생 수도 광복 시점에 7819명인 것이 1960년에는 무려 97819명으로 폭증하였다. 이는 동시기 영국의 대학입학률보다 높은 수치였다. 또한 정부는 초등~중등 교육과정에서 반공을 위해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을 반복적이고 일관적으로 교육시켰으니 어찌보면 자신의 목을 자기가 조른 격이 되었다.

또한 총인구 중 도시인구 비율도 전쟁 이전 17.2%였던 것이 1960년 28%로 오르는 등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교육받은 국민들이 자연스레 도시로 집중되며 나름 깨어있는 시민들의 비중이 늘어났다. 거기에다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 당 2.96부, 그런데 서울만 혼자 100명당 25.5부에 달했다.(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의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다) 또한 대학도 전국 85개 대학 중 서울에만 29개가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그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었다. 당시 실업률은 무려 50%에 달했으며, 1960년에 들어서며 미국의 경제 원조도 줄어들고 있었다. 

종합하자면 어린 시절에 어떻게든 학교에 가니까 민주주의를 지겹도록 가르치고, 적지않은 인구가 가방끈이 길며, 검열과 탄압 아래에서도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어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는데, 이들도 매일매일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신문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없이 읽으며, 주위엔 신문 구독자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 시위를 도모하기에도 쉬운데 이 인제들이 일도 못하고 놀고 있으니 "나라 꼴이 수상하다!"는 여론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3.15 이전

3.15 부정선거 이전에 이미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민주당 장부통령 후보 장면의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수 없도록 '영화 관람'이나 '추가시험'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 학생들을 강제 등교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대구지역 8개 학교 1200여명이 시위에 나섰다. 당연히 당국에선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켰으나, 이 시위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을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이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 한구가 떠오른다.


-혁명 전야

(김주열 열사)

김주열은 전북 남원의 천석꾼 부잣집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집안 가세가 기울자 형의 친구의 조언에 따라 은행원이 되기 위해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른 뒤 3월 14일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마산에 올라온다. 시위 때문에 합격자 발표가 3월 16일로 연기되고,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던 시절이라 이모할머니 집에 머물던 중 3월 15일, 형과 함께 시위에 합류하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그의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찾아 헤멨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돌아갔는데, 바로 그날 11시, 마산 중앙부두(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 김기돈의 갈고리에 시신이 걸려 올라온다. 바로 3월 15일 실종된 김주열이었다.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사진)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시청앞 발포 후 경찰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 오후 10시 경 자산동 구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의 처리 여부를 묻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령에 어느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 앞바다에 유기한 것이다.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 당국은 시신을 도립마산병원(현 경남마산의료원)으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시신 발견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이에 흥분한 시민 3000여명이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와 그의 사망을 확인했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시신을 본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산상고와 마산고 학생들을 시작으로 시위가 이루어졌다.

곧이어 마산여고와 성지여고 학생들이 교장의 인솔하에 시위에 합류하고, 이 장면이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시위 열기에 불을 붙였다.

(2차 마산의거의 학생 시위대)

곧이어 김주열과 비슷한 연배의 자식을 둔 중년 여성들과 해인대학교(현 경남대학교) 학생 5~6000여명, 노인들까지 시위에 합류하며 무려 3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마산시청과 마산경찰서를 습격하고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를 파괴하였으며 자유당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의 공장도 파손되었다.

9시 30분 경 경찰이 발포하여 또 한 명이 사망했으나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격화시킬 뿐이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지금도 정권 바뀔때마다 왔다갔다 하지만 당시도 그랬다.)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산경찰서장 관서 등등을 파괴하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3일까지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는 당연하게도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며 사건의 본질을 흐뜨러뜨렸다. 15일 정부는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해 적색분자들의 준동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라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안믿었다. 이미 특종으로 전국 신문에 나돌았기 때문.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원래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4월 21일이었다. 그런데 고려대학교가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4월 16일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다, 경찰의 움직임에 4월 18일로 연기했다.

4월 18일 10시 50분, 고려대 학생 3천여명이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새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앞까지 행진하였고, 이 와중에 경찰의 진압이 있었지만 저녁이 되어 집회를 해산하고 경찰의 인도를 받아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하려 했다. 그런데 경찰차가 갑자기 을지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청계4가에서 대한반공청년단과 임화수의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에게 학생들과 기자들이 습격을 당했다.

당시 언론의 자유는 명목상 보장되었으니, 학생들이 정치 깡패들에게 구타당하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지금도 고려대학생 하면 나름 공부 좀 한 사람 취급받지만, 겨우 문맹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대다수이던 1960년의 대학생들은 지금으로썬 상상도 할 수 없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리고 깡패가 늘상 그렇듯 사회 최하류층이었는데 그런 쓰레기들이 대학생들을 두들겨 팬데다 기사 표제가 "학생 1명 피살?"로 나갔는데 이 ?가 눈에 잘 띄지 않아 "깡패들이 대학생을 때려 죽였다!"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피의 화요일

운명의 4월 19일, 고려대학생들이 깡패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대학생들은 21일 예정된 시위를 앞당겨 19일로 바꾸고, 서울대 문리대(현 서울대 정치외교학과)에서는 19일 오전 11시에 시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역정보를 경찰서에 흘린 뒤 그날 9시경 출발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여러 단과대생이 합세, 끝내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고교, 중학교 학생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해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회로 행진했다.

고등학생은 정부가 데모 참가하라고 오후 1시에 하교하게 해준 덕에 우르르 몰려나왔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시위대열에 동참해 오후 1시엔 서울에서만 10만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결집,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매우고 여러 방면에서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접근하였다. 경찰은 중앙청(광화문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해 강경 대응했다. 끝내 오후 1시 30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서울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 이 중 경찰 사망자도 3명이 있었다.

하지만 무력으로는 시민들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시위대는 어용언론 서울 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반공회관과 파출소를 파괴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의 쪽지

아마 한번쯤은 봤을 이 편지에서 보듯 학생들이 앞장서서 시위에 나섰다. 특히 대학이 적은 지방에선 고등학생들이 가장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사실 최초의 시위 참가자도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무너지는 자유당

상황이 점점 자유당에게 나쁘게 돌아가자 정부는 19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했다. 계엄령은 서울에서 벗어나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청주, 전주, 수원 일대에 선포되며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발포는 커녕 시위대와 협상을 하거나 온건 대응으로 진압했다. 이렇게 계엄군이 평화적으로 대응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부산군수기지사령부(현 육군군수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어서였고, 다른 이유는 군부 내에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강해서, 그리고 경찰과 사이가 나빠서였다.


4월 20일, 아직 이승만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월터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알렉산더 허터 미 국무부 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까지 보냈다. 결국 미국마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자 즉시 서구언론들도 부정적인 보도를 내었다.

4월 21일,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내고 23일엔 부통령 장면이 사임서를 냈으며, 같은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24일엔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시 불이 붙은 시위

소강되던 시위를 되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19일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 이들은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서고 결국 피를 흘린 것에서 자신들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모인다. 그렇기 때문에 당국의 의혹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기도 했다(당시에는 여러명이 모이기만 해도 경찰이 시위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많아봐야 5~60명을 예상했는데, 막상 모인 교수는 무려 258명. 자기들조차 놀란 인원이었다.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 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 시국선언문을 작성해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행진하는 대학교수들, 플래카드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써져 있다.)

시국선언문에는 직접적으로 이승만 하야가 요구되어 있었다.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 낭독 뒤 만세삼창과 애국가까지 제창한 기습시위였는데, 놀랍게도 그 어떠한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학 교수는 엘리트 계층이지만, 당시엔 상상할수도 없는 직업이었기 때문.


교수단의 데모 이후 시민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지속했다.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이더니 끝내 7시에는 3만여명이 모였고, 9시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 9시 45분에는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게 철거되었다.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현재는 이 자리에 김구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26일 오전 10시, 시위 군중이 10만명으로 불어날 무렵 국민학생들 까지 데모에 합류했다. 지난 19일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군이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곧이어 계엄군이 출동했으나, 당장이라도 총을 쏠 수 있는 군인들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시위대 속 어느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를 외쳤고, 계엄군은 완전히 시위대 편으로 돌아서며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 탱크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탱크에 올라간 시위대)

이렇게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수, 시민, 군대, 미국까지 이승만과 자유당에 등을 돌리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승리의 화요일

상황이 명백하게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26일 화요일 아침 국방부장관 김정렬이 강경하게 이승만에게 하야를 진언하고(아이러니하게도 김정렬은 20년 뒤 최규하에게도 하야를 진언한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도 결심을 재촉했으며, 외교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곧이어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시민대표, 학생대표 5명과 면담을 주선하고 경무대 후원에서 자리를 가졌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하자 이승만이 알아듣지 못했고, 곽영주가 옆에서 "stop down"이라 속삭였다. 이승만은 그제야 이해한 듯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묻자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답했다. 곧이어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하자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욕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고, 10시 40분엔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저기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표현은 문구상 표현에 불과하다.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르 환호하고, 시민들은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으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그러나 이는 독재자의 마지막 몸부림일 뿐,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독재자의 몰락

27일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 결의하고 다음날 오후 3시에 이승만의 사임서가 즉시 수리, 헌법 규정에 따라 외무부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내각을 수립하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는 발판이 되었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승만)

이승만 추종자와 자유당은 힘을 잃었고, 이기붕은 28일 장남 이강석의 총격으로 일가족이 모두 동반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떠나느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오기 전(6월)에 곧 돌아오겠다"고 너스레를 부렸지만, 1965년 7월 19일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니 사망한 이후에도 영원히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이후

독재자가 물러난 뒤 대한민국은 여러모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이 시위의 나날이던 제2공화국은 약 1년이 지나며 어느정도 정상화 되었지만 정치권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는 1961년 5월 16일 군부의 쿠데타로 말끔하게 박살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