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2.2. 심판을 받겠읍니다 - 혁명재판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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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자리잡은 것에 대한 호응을 얻기 위해 구악일소라는 명목으로 혁명재판을 열아 깡패와 정치범을 심판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을 업고 대한청소년개척단을 발족하는데, 이때 사업자로 선정된 이가 서울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역하던 민정식이었다.

또한 정부는 미국에서 공여받은 잉여 농산물을 처리할 방법도 생각해야 했는데, 그리하여 정부는 육군 대령 1명을 대리인으로 보내 민정식에게 무언가를 제안했다. 그렇게 민정식 주도로 거리의 부랑아, 윤락녀를 모아 서산군(현 서산시, 태안군)의 뻘밭을 개간하겠다며 개척단을 모집한다. 그렇게 모인 수백 명의 일원 중 '양아치 총각'들과 '창녀 아가씨'들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집단 결혼식을 올리고, 이러한 활약상이 대한뉴스에서 선전되기도 했다.


-실체

처음부터 양아치와 창녀만 끌고갔다면 필자가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있을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형제복지원 같이 통금을 어겼다고 멀쩡한 청년을 납치하거나, 길 잃은 아이를 유괴하는 등 속칭 '후리가리'라 하여 공권력이 실적 좀 채우겠다고 아무나 붙잡아 갔다. 사례를 보면 조명을 설치하는 조명공이 통금에 걸려서 끌려갔다던가, 유복하게 살던 10살 소년이 열차를 탔다가 낯선 남자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먹이고 서산으로 납치하고, 여성의 경우에는 개척단의 모포 공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꼬드겨 서산에 보내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강제로 입소된 15세 이하 유소년은 1962년 기준 187명으로, 전체의 25%에 달했다.

위에서 설명한 결혼도 그냥 '쇼'에 불과했다. 운동장에다 남성 노역자들을 세운 뒤 여자들이 가서 아무나 찍으라 하고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이다. 싫다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아예 강제로 짝을 지어버렸다. 더 골때리는 것은 이러한 요식행위로 강제로 결혼하게 된 사람의 절반은 이미 배우자가 있는 채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요식행위의 결말은 당연히 45쌍이 완전파경, 40%는 불안상태라고 언론에 무미건조하게 발표되었다.


-노예같은 생활

60년대 초에는 건설용 장비가 부족해 건설 공사는 거의 인력으로 이루어졌다. 끌려온 개척단 단원들은 인근 야산에서 채굴한 석재를 일일이 바닷가로 날라 바다를 메워야 했다. 알다시피 간척 공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고, 또 여럿이 죽어나가는 난공사인데 당시의 열약한 조건에서 개척단원들은 매일같이 중노동에 혹사당하고, 아이들은 허드렛일까지 더해졌다.

그렇다고 밥은 제대로 줬느냐? 당연히 아니다. 밥은 5홉(900mL)짜리 그릇에 보리밥을 대충 퍼줬고, 반찬은 소금국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소에게 줄 콩 사료를 빼돌리는 걸 개척단원들이 먹어 키워야 할 소가 굶고, 굶주린 이들이 그러하듯 살아 돌아다니는 것들은 생으로라도 잡아 먹으려 들었다.

캠프는 얼기설기 세운 천막이었고, 그 안에 여러명이 늘어져서 잤는데, 비가 오기라도 하면 그 천막 사이로 빗물이 다 튀었다.

개척단원들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경비들이 벗겨 놓고 때렸으며, 이것이 일상이었다. 밉보인 이들은 협박과 함께 폭행이 가해졌고,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구호반이라 불렀는데 개척단구역 외곽 철조망을 앞에 두고 소총을 들고 20~50m간격으로 서 있으며 순찰을 했다. 

어떤 이들은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상당수는 총에 맞아 죽거나 공포심 조장을 위해 다른 노역자들 앞에서 죽을 때까지 맞았다. 스스로 불구가 되어 탈출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발각되면 역시 죽었다.

그 외에도 캠프 바깥에서 서산까지 찾아온 개척단의 친지, 가족들도 있었으나 구호단이 이들을 가로막으며 "여기엔 당신들 찾는 사람이 없다."고 우겨서 강제로 돌려보냈고, 무려 군 장교조차도 예외 없을 정도로 이들은 초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당시 주민들이 '면산'이라 부르던 곳 일대에 대충 묻혔다. 말 그대로 '대충'이기 때문에 비가 와 암매장 된 시체가 노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백골화가 진행된 사람부터 산송장 상태로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훗날 면산을 공원묘지로 단장할 때 발굴되어 무연총(무연고자 묘지)이라는 이름으로 서산희망공원묘지에 6개로 나눠 매장되어 있다.


-민정식의 횡포

민정식은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기 전에 을지로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공장을 경영하며 대한청소년 기술보도회라 하여 정비공장에 청소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는데, 그러다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엄청난 돈이 들어오자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써먹었다.

그는 동네방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동서다!"라고 거들먹거렸고, 정부로부터 미국산 잉여 농산물을 지원받을 명분으로 청소년개척단을 잘 써먹었다. 그렇게 지원받은 양곡을 열차로 수송하다 경유지 홍성역에서 양곡을 내린 다음 주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양곡을 횡령해 민간업자들에게 팔았다. 이렇게 그가 자기 배를 불리는 동안 그걸 먹어야 할 사람들은 소금국 먹고 굶었는데.

또 경찰들을 불러놓고 돈가방을 제시하면 지역 경찰들은 그 돈을 받기에 바쁠 정도로 서산시 지역 공무사회는 말 그대로 민정식의 개 수준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군수부터 경찰서장까지 졸졸 따라나서기에 바쁘고, 경찰서는 벌벌 떨며 민정식을 무슨 대통령의 사자처럼 취급했다.


-선주민들

개척단이 있던 곳과 가까운 서산군 모월리 1,2지구 주민들은 이 개척단 캠프가 워낙 폐쇄적이고 지역 공권력도 터치하지 않는 초법적인 공간이다 보니 한센병 환자가 산다는 둥 온갖 괴담이 돌았다. 운 좋게 개척단원들이 행군하는 것을 본 선주민이 있었는데, 이들이 받은 인상은 그저 현대판 노예일 뿐이었다.


-개척 후

그렇게 개척단을 갈아서 간척한 250만 제곱미터의 땅은 오늘날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지구가 되어 오갈 곳 없는 개척단원들이 터를 잡고 모월 3구의 원주민이 되었다. 정부는 개척한 사람들에게 개척만 하면 그 땅은 그들에게 돌아갈 거라고 가분배증까지 보여줬으나, 돌연 국유지라며 민정식 및 지자체는 오히려 그들에게 "경작권 만을 인정했을 뿐이며 소유권을 인정하진 않았으니 개간한 땅을 쓰고 싶으면 우리에게 땅을 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처음부터 민정식과 지자체는 이 땅이 국유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개척민들에게 구라를 깐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개척단 생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걸었으나, 상고심까지 패소했다. 끝내 생존자들은 다시 이의제기를 했고, 2012년 재정부 측에서 원가보다 조금 싼 가격으로 장기분항 '저리 매각'식으로 땅을 주민들에게 처리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땅은 누가 1조를 줘도 안 팔 것이라며 우리들의 피와 눈물이 섞인 땅이니 누군가 이 땅을 가지고 장난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정도론 그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살아남은 몇몇은 개척단에 대한 수기를 써서 세상에 알리려 했다. 가령 유재문 씨는 군복무 중 어느 방송작가를 만나 해당 실태를 토로하려 했으나 방송작가가 "당신이 지금 그걸 이야기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군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며 침묵을 종용했고, 어느 단원은 비공식적으로 수기를 써서 KBS에 제출했으나 담당자가 '한 3~40년 후에 내지, 지금은 이걸 못 낸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반대로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끈 민정식은 천수를 누리다가 2017년 사망했다.

개척단 생존자들은 2013년 부터 1년에 300만원 꼴로 땅값을 내라하고 있고, 불법으로 땅을 점유했기 때문이라 하며 반발해도 무시당했다고 한다. 그 분들의 당시 나이는 70대, 그들은 "20년을 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20년을 더 살겠냐"며 아쉬워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