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3.0. 군인 대통령 - 제3공화국 수립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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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4년,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시점에 그나마 나은 도시의 공식실업율은 30%를 돌파했다. 원조받은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던 시절에 정부는 한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결합하면 해외시장에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미 3년 전 소련, 북한, 중국이 전쟁 재발 시 군대의 자동 개입이 담긴 '동맹 조약'을 체결해 한일 양국이 안보적으로 협력하라는 미국의 물밑 압박이 있었고, 또한 수교 과정에서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인맥도 작용했다.

정부는 도쿄에서 한일 외무 장관 등을 통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일본측과 합의하고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이에 동참했다.


-반발

문제는 1964년은 광복된지 고작 20년도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반일 감정이 격한 시절에 이러한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강경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게다가 그 당시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어떻게 사과와 보상을 할 것인지 한국 언론에 명확하게 공개도 안했다.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를 가로막는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밀사까지 파견해 비밀교섭을 벌이며 일본 정계 실력자들과 교섭하며 양국간 협의를 이루겠다고만 밝혔다. 반대 여론을 경청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없이 일본이 보인 이러한 태도는 항쟁만 격화시켰다.

야당 측도 반발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은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모든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결성한 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만행은 역사에 커다란 치욕을 남길 오명의 사건이 될 것이며 역사는 박 정권의 친일 매국에 준하는 이 같은 행위를 호국영령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고 장택상은 아예 현대판 한일병합이라며 반대했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반 시민과 대학생, 종교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까지 이에 동참하여 대일 외교굴욕 철회 운동을 하며 해방 20년 만에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한일 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며 그날만 전국에서 약 8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일장기를 불태우고 박정희와 한일 정상화에 동참한 김종필 인형의 화형 의식, 성토 의식등을 열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정부는 이를 빠르게 진압하고 3월 30일 11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그와 면담한 뒤 요구사항을 전달하며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 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로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다.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박정희 집권 당시 내세운 명분)의 장례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이 장례식의 조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를 지은 시인 김지하다.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은 이 조사를 일다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통렬한 글이었다.

(김지하가 쓴 조사)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속에 너와 일본의 이대잡종, 이른바 사꾸라를 심어 놓았다. (후략)

전국의 대학에서도 일장기와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국교 정상화에 동참한 이들의 화형식, 혹은 장례식을 거행했다. 시위는 단식농성을 넘어 거리 시위로 확산되고, 대학생과 시민, 재야 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반일 및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벌였다.


-계엄령과 진압

반대 시위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자 6월 3일 오후 8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 외에 4개 사단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여 진압 조치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 금지, 대학 휴고,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 및 체포와 구금이 가능하며 통금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양해 요구에 미국이 협력하자, 시위를 주도한 운동권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체포되었고, 주도자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게 된다.

이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강경 대처와 함께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 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법무장관 민복기가 "그건 초월적인 위법행위고, 그랬다간 시위만 더 확산된다"고 반대하여 박정희도 그것은 반대했다.

이 시위의 주동자격 인물은 당시 고려대 총학회장 직무대행 이명박(17대 대통령), 중앙대 학생 이재오(5선 의원, 국민의힘 상임고문)와 서청원(8선 의원),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5선 의원), 학생 한광옥(대통령 비서실장, 4선 의원), 경기고 학생 손학규(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4선 의원) 등 훗날 정계의 거물이 되는 이들이었다.

아무튼 박정희는 항쟁이 격화되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필요성을 호소하며 일종의 극일을 하자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이는 원론적으론 타당했지만 당시 분노한 민중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시위는 다분히 반일 시위에 가까워, 임진왜란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 심수관 씨는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계란 맞을 각오로 소신발언을 하자 잠깐의 침묵 후 누군가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고, 모두가 그 노래를 부르며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어 1년 후인 1965년 12월 한일 양국은 국교 정상화에 합의, 한일수교가 성립되었다.


-이후

1970년 6월 18일, 박정희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등 70여명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이 사건이 있자 국회는 의정활동 본연의 업무와 관련하여 최초로 피소되기에 이르렀다.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와 무효를 구하는 행정소송으로 헌정 사상 단 두번만 일어난 일이었다.(두 번째는 2016년 선거구 상실 사태)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문화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강화되어 한국 내에서 일본 문화 등에 대한 배척, 일상생활에서의 일본 잔재 청산 노력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70년대엔 재일교포 출신 문세광의 저격 미수 사건, 그리고 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으로 반일 감정은 더욱 강해졌다.

참고로 반일 종족주의에선 한국의 반일민족주의가 1980년에 막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를 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