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3.8. 잡곡 섞어 먹어라 - 혼분식 장려 운동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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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0년대 당시 북한군은 한국군보다 종합적인 군사력을 더 뛰어났다. 하지만, 남한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전방에만 18개 사단과 45만 명의 병력, 그리고 충분한 보급차량을 배치해 미군들조차 이들이 충분히 북한군을 상대로 서울을 사수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군이 남침에 동원 가능한 실질 전력은 6~9개의 기갑-기계화 전력 뿐이었고 전차의 수량이 앞선다 해도 최전방 지역과 밀집한 국군의 대규모 병력을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1968년 1월 21일에 있던 김신조 일당의 대통령 암살 작전도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해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김일성이 "남한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며, 이 주권 쟁취 방법은 무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발언했다.

또한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마무리되며 동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고 있어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지속적인 군사 원조가 확보되길 원한데다 이 즈음 가면 남북간의 경제 격차가 확연하게 벌어지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사회주의 게릴라 출신 지도자가 그렇듯 김일성도 게릴라 투쟁만이 옳은 방식의 투쟁으로 여기고 통일 제1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1.21사태 이후 북한이 지속적으로 무장공비를 내려보냈으나 계속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사건의 진행

1968년 11월 2일 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 124군 소속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거점을 구축하여 제 2의 전선을 만들기 위해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3일간 네 차례에 걸쳐 특수정을 이용해 각 30명씩 상륙한다.

(울진군에 남은 침투 지점. 현재 제50보병사단 담당 구역으로 제2작사의 최전방이나 마찬가지이다.)

3일간 상륙한 120명의 유격대는 8개 조로 나뉘어 어둠을 틈타 삼척군 고포 해안에 상륙, 주요 지역으로 침투했다. 당시 이곳에 해안초소 근무 인원은 총 6명이었는데, 이 인간들 중 4명은 말년병장의 전역을 축하한다며 술집에 있었고, 두명 중 더 고참인 놈은 후임한테 짬처리하고 내무실에서 자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명은 그들을 발견하고 쫄아서 달아나 분대장에 보고했으나, 겁에 질린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박격포 몇 발을 바다에 발사한 뒤 격퇴했다고 허위보도를 한다.

무장공비들은 군복이나 평상복 등으로 위장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남로당 가입서를 작성하며,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가 하면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로동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문제는, 이들은 분명 게릴라 양성을 위해 침투했는데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기지를 발휘, 연락이 제한된 상황에 릴레이 방식으로 연락을 취해 군 당국에 신고하게 되고, 11월 4일 14시 30분, 상황을 보고받은 대간첩대책본부는 정선, 영월, 삼척 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작전에 돌입했다.

군은 강력한 화력을 이용해 전면적인 소탕 작전을 펼쳐, 11월 16일까지 무장공비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며, 주요 장비들을 노획했다.

12월 28일까지 2개월간 공비 113명이 사살, 7명이 생포되며 사건은 끝을 맺었다. 이동안 군경 38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3명이 사망한 상태였다.


-결과

1968년은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에 이 사건까지 연이어 일어나며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공 태세는 한층 공고해졌다. 이때부터 반공은 곧 국시가 되었으며 소위 빨갱이에 대한 증오(레드 컴플렉스)가 사회적으로도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 해를 시작으로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앞질렀고 정부는 제3세계 외교전을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교전 지역은 양양, 평창, 영주, 인제, 울진, 영양, 봉화등 수십km에 달했고. 당시 11월 10일에 서울이 영하로 떨어질 정도의 이상저온으로 무장공비들이 고생하는 행운도 있었다.

사건 초기 경계를 소홀이 한 인원들은 처벌을 받았는데, 경계 자체를 포기한 문무림, 김복수 일병은 사형, 소대장 둘은 각각 10년과 15년, 중대장 둘은 각각 7년과 10년, 대대장 둘은 각각 2년과 3년을 선고 받았으며 허위 보고를 한 하사는 3년, 같이 술을 마신 병사들은 2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뒤에는 항소심에서 형량이 크게 줄어 사건에 직접적 책임이 없는 병사들은 무죄, 일병 둘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승복 어린이

(47초~59초 부근에 시신이 나오니 주의할 것)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로 알려진 이승복. 1959년 12월 9일 생으로 강원도 평창군 출생, 당시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햔재 폐교) 2학년이었다. 1968년 12월 9일 밤 11시 무장간첩 중 5명이 이승복과 가족이 살던 초가집에 침투해 어머니 주대하의 이마에 총을 들이대며 밥을 지어달라고 협박하자 주씨는 쌀이 없다고 했고, 공비들은 강냉이(옥수수)나 쌂아 달라고 하여 공비 2명의 감시 하에 옥수수를 삶아 주고, 3남매는 공비 3명에게 둘러싸여 감금당했다.

공비들이 옥수수를 먹은 뒤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고 "남조선이 좋으냐, 북조선이 좋으냐"고 질문하며 체제 선전을 하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간첩은 일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퇴비더미에 묻어버렸다. 생존자는 36곳이나 칼을 맞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형 이학관, 아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에 칼을 맞고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 그리고 할머니 강순길이었으며 아버지는 즉시 향토예비군 초소까지 달려가 신고했다. 이때 조선일보가 일가족 4명이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이승복 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고 특종보도를 한다.


잔비(공비잔당), 일가 4명을 참살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

(전략)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살 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중 1명이 승복 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려쳐 죽였다.


부친과 조모는 이 일로 조헌병을 앓았고, 형은 10년간 약물치료를 받으며 21살이 되어서야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석우 씨는 2014년 먼저 떠난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이승복 군은 반공의 상징이 되어 정재수 군(폭설이 내리던 날 만취한 아버지가 쓰러지자 쓰러진 아버지를 살리려 가진 옷을 벗어 덮어주고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효자의 상징)과 함께 거의 모든 국민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 도덕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1975년 10얼에는 대관령 정상에 '이승복 반공관'이 세워지고 1982년 그가 다닌 학교로 옮겨와 '이승복 기념관'이 되어 성역화 된다.

1982년 3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하고 이후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선 이승복 기념관 관람이 반드시 포함된다. 기념관엔 피해자 일가족의 시신 사진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추모곡도 있고, 이승복 동상도 제막되었으며 각 국민학교엔 동상이 세워졌다.


이런 식으로 당시 구리가 부족하여 콘크리트로 만들고 페인트를 칠한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콘크리트 품질이 좋지 않아 보다시피 상태가 매우 나쁘다.

또한 아예 동상이 방치되어 길리슈트를 입게 된 경우도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동상 혹은 콘크리트상이 철거되었으며, 아직 극히 일부 초등학교나 폐교된 국민학교에 남아 있다고 한다. 구리값 생각하면 진짜 구리로 만든 건 전부 철거해 녹여서 구리선에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겠지.


한때 이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구라다, 심지어 이승복은 가상인물이라는 음모론도 돌았었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 후반 보도지침 폭로 사건의 관련자였던 김주언의 기사와 앞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의 기사로 이 사건이 조선일보의 조작이라고 비판했는데 그러자 조선일보도 이 둘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고 6년간의 법적공방 끝에 명예훼손은 인정하나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고, 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은 불신할만한 합리적 의심의 근거가 있지만, 이웃 주민들이 생존한 형 이학관이 칼에 수십차례 난자당한 상태에서도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한 개연성을 부과하므로, 사건 자체는 분명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승복은 평소에도 어린아이 답게 매우 당돌하고 절대 지지 않는 성격이었으며 살던 곳은 깊은 두메산골인지라 공비는 커녕 국군도 본 적이 없었다. 이승복이 공비에게 공산당이 싫다는 늬양스의 말을 한 것은 공비가 위협하던 상황이 아니라 적이 아닌 척 들어와 숙제를 하던 이승복에게 "이 연필 미제냐?"이런 질문을 하다 "남한이 좋냐 북한이 좋냐?"는 질문을 했다가 이승복이 대답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이승복이 북한 공비에게 살해당한 것은 사실

이승복에 대한 의혹보도는 피고(김주언과 김종배)가 그 사건이 허위라고 믿을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용인되어 무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형의 증언이 상당한 개연성이 존재해 공산당이나 북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소송 사건을 기점으로 이승복 기념사업은 약화되어 이동안 전국 초등학교의 7,80%는 동상을 철거했고 이승복 기념관은 2004년 강원도교육청 소속에서 평창교육지원청 소관으로 옮겨져 통폐합이나 사회단체, 사단법인의 관리를 고려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지며 이승복 사건은 역사의 영역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