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4.4. 7번의 총성 - 박정희 저격미수 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시작

(텅 빈 동아일보 광고면)

1974년 겨울부터 당시 유력 일간지던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광고를 예약제로 받아 미리 동판을 만드는 식이었는데, 예약해놓은 광고주 대한생명보험(현 한화생명), 럭키(현 LG생활건강), 일동제약,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오리엔트 시계, 삼성전자, 금성사(현 LG전자), 태평양 화학(현 아모레퍼시픽) 등이 돌연 광고를 철회했고, 동아일보는 미리 제작해 둔 광고 동판도 부숴버려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주일 치 분량의 광고를 예약받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일주일 치 광고가 빠지면서 그 자리를 급히 채울 여건이 되지 않았다. 채우려면 또 동판을 다시 제작하고 광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정권의 사주에 의한 중앙정보부의 탄압. 당시 중정이 공권력을 발동해 정부의 비판적인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것을 2008년 확인했었는데, 중정은 1974년 동아일보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불러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다.

(광고를 모집하는 광고)

한동안은 광고면을 광고신청 촉구 형식의 백지로 보냈다. 그러자 동아일보 독자들이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 빈 광고면에 작은 개인광고를 넣기 시작했다. 보통 신문 한 면을 다섯 단으로 쪼개는데 전면광고가 없던 당시 제일 아래의 5단 광고가 가장 큰 광고였다. 텅빈 이 공간을 쪼개고 쪼개 간신히 한줄이 들어갈만한 크기로 독자들이 광고를 낸 것이다. 해가 지나 1975년에는 빈 지면들이 많은 시민들의 자비광고로 채워졌다. 정권의 의도와 달리 다시 광고면이 채워지자 상반기 말에 들어선 다시 광고 예약이 원궤도에 올랐다.

이것이 당시 가장 처음 올라간 자비광고로 독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훗날 이 광고를 보낸 독자의 정체가 김대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고려대학교 법학과 재학생 홍준표가 친구들과 함께 보낸 광고)


-이후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광고는 되찾았지만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 1975년 1월에는 자사의 라디오 방송국 동아방송(DBS)의 광고가 철회되는 사건이 발생해 일부 프로그램들이 공개 녹화를 못하고 아예 무광고로 진행하거나 완전 폐지를 하고 더 나아가 전체 방송시간마저 단축되어 버렸다. 결국 3월 동아일보 경영진은 일부 부서 폐지와 함께 기자들을 해고했다, 경비를 절감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일부 기자들은 동아일보 편집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해직되었으며 일부 기자들은 광고탄압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경영진이 정권 편을 든다고 항의하며 제 발로 나가기도 했다. 이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고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13년 뒤인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한편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도 같이 진행되었다. 1975년 해직 기자들이 동아일보를 상대로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을 냈으나 1979년 1월 대법원은 경영상 문제라며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2001년 국무총리실 직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동아투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2006년에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하자 2년간의 조사 끝에 2008년 보고서를 발표, 2009년 3월 동아일보 측이 불복하여 서울행정법원에 진실규명 결정 취소 소송을 내자 대법원 파기환송까지 거쳐 돌다가 2015년 동아일보의 승리로 끝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