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 6.10. 우리가 남이가 - 초원복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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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55년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과 그 후배들로 구성된 육군 비밀 사조직으로, 처음에는 친목회로 출발해 박정희 정권의 배후에서 성장했다. 박정희 역시 하나회 출신을 위주로 진급을 시켜주었고, 전두환이 중장에 진급했을 땐 최고급 세단까지 하사했다. 당시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은 전원 하나회였고, 2차 진급자 4명 중에는 2명이 하나회였다.

이들은 최고 권력 집회로 군림하며 요직을 자기들끼리 돌려먹으면서 군대를 넘어 정계에서 영향력을 끼쳤고, 끝내 10.26 사건으로 구심점을 잃은 구군부(5.16 세력)가 혼란에 빠지자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며, 신군부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1988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하나회는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갈라지게 된다. 5공화국 내내 2인자로서 설움을 견디며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기다린 노태우는 즉시 전두환의 신뢰를 좆까고 전두환계를 가차없이 숙청했다. 알다시피 전두환은 퇴임 후에 노태우에게 권력을 넘기고 헌법을 고쳐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어 상왕처럼 실세로 군림하는 것을 꿈꿨고, 때문에 미리 군부 핵심 요직에 자신의 직계 충신들을 박아두었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를 임기가 끝났음에도 1년 더 유임시켰으며, 합참의장에 최세창, 3군 사령관 고명승, 보안사령관 최평욱, 수도방위사령관 김진영 등 자신의 직계들을 요직에 꽂아둔 것이다. 게다가 특전사령관 자리도 전두환계 민병돈이니 이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노태우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물론 노태우도 바보가 아니라 전두환의 의도를 알았지만, 일단은 분을 삭히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상황은 달라졌다.

일단 노태우는 대통령을 간선제 형식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비록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김종필의 출마까지 더해진 결과로 인한 당선이었고 전두환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아무튼 체육관 대통령이 아닌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이 있었다. 게다가 노태우에겐 전두환계를 숙청할 명분도 있었다. 이미 전두환 정권의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1988년 6월, 노태우는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구실로 참모총장 박희도를 경질한다. 그 이후 1년 동안 합참의장 최세창, 특전사령관 민병돈, 기무사령관 최평욱, 수도방위사령관 김진영, 참모차장 권병식, 5군단장 정만길 등이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예편되었고, 그 자리에 노태우계 하나회 장교들이 들어갔다. 

그 외에도 국민 여론을 이유로 전두환을 백담사에 귀양보내고 장세동과 이학봉 등 전두환의 개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노태우의 임기가 점점 끝나가게 되자 자신도 숙청당할까 두려웠는지 노태우는 3당 합당을 통해 위협적인 김영삼과 김종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이 좌천시킨 김진영을 복권시키고 서완수를 기무사령관에 앉히는 등 전두환계에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을 거꾸로 집어 삼키며 대통령에 올랐을 땐, 군 내부 핵심요직인 3군사령관,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은 모두 하나회였으며 참모총장도, 차기 참모총장인 18기 대장들도 모두 하나회였다. 노태우는 군부가 자신의 편이니 쿠데타의 위험 때문에 김영삼이 자신을 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세간도 김영삼이 하나회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김영삼이 고작 이것 때문에 불편한 동거를 지속하느니 차라리 쿠데타를 각오하고 다 쓸어버릴 사람이라는 걸 이들은 몰랐다.


-하나회 대숙청


김영삼은 임기 내내 김영삼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측근들하고만 정책을 의논해 비밀을 유지하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터뜨리는 것이다. 물론 당시 하나회가 군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쿠데타 가능성을 생각해서도 이게 더 낫긴 했다.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하나회에 대해 고민했고, 특히나 국방부장관으로 점찍어 둔 권영해 국방부차관(육사 15기로, 현역 시절 하나회의 견제와 외면을 받다 올림픽지원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당해 소장으로 예편했다.)으로부터 하나회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다. 그리하여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철저하게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다. 당시 그의 비선 조직에는 절친한 사이인 김윤도 변호사와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 예비역 중령을 비롯한 예편 장교였는데, 거사 이틀 전인 1992년 3월 6일 우선적인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 등을 최종 점검했다.


김영삼이 숙청을 논하는 동안 김영삼의 최측근인 대통령비서실장 박관용은 하나회의 수장 격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는 부산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문에 박관용이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에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을 언급합니다"라고 하자 김영삼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라고만 했고, 여기에 하나회와 연결되어 일종의 청와대 빨대로 사용된 현역 장성 김희상 국방비서관과도 아무 상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 둘은 김영삼이 하나회를 치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 상태를 두려워한다'고 오판하며 상황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했고, 당연히 하나회 소속인 김진영 참모총장도 긴장을 놓고 있었다. 오히려 김진영은 김영삼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었고, 종교마저 개신교로 동일했던 만큼 당연히 자신이 선배인 이필섭을 대신할 합참의장이 될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실제로 같은 고등학교에 동향 출신인 김기춘은 그 덕에 잘나가기도 했고.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국군기무사령관 서완수에게 "앞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라고 말했고, 동년 3월 3일에는 육사 졸업식 때 '장성들의 얼굴을 모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소집된 육해공 3군 중장 이상이 참석한 3월 보고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내 이들을 안심시켰다. 


3월 5일에는 육사 49기 졸업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며 애둘러 군을 갈아 엎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마침내 취임 11일째인 3월 8일,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 중 단 한 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 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가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국방부장관 권영해에게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지시했고, 그날 권영해와 독대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물었고, 권영해는 "군대에서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아, 그래요. 그라모 됐구마는." 하더니 대뜸 폭탄 선언을 한다.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

권영해 장관은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김영삼과 권영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가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보직해임했다. 육군본부와 기무사령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회의를 하고 있던 김진영과 서완수는 전화로 해임 통보를 받아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비하나회 출신 김동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육사 22기)을 각각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했다. 앞선 두 사람이 해임된지 정확히 4시간 5분 만이었다.


해임된 김진영과 서완수는 각각 육사 17기와 19기로 하나회 핵심 리더였다. 김진영은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강경파로 불리며 1980년대 신군부의 막후 실세로 군림했고 11기 전두환 - 14기 이종구의 뒤를 이어 군부 내에서 '전두환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존재로서, 노태우도 자기 사람인 이문석을 제치고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김진영은 취임 직후인 92년 2월 중순(노태우 정권 말기) 지휘서신 1호로 "상하 계급으로 구성된 군 내부의 종적 사 조직을 단시일 내에 모두 해체하라"를 발표한 적 있다. 국민과 언론이야 군의 민주화와 정치중립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그가 하나회의 핵심 멤버인 걸 아는 군부 내에서는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ROTC를 견제하는 발언으로 판단했다. 

서완수 기무사령관 역시 전두환계로, 1991년 12월 최고의 요직인 특전사령관에서 또 다른 요직 기무사령관으로 옮겨간 터라 군 내에서는 '역시 하나회'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런데 서완수는 과거 노태우에게 김영삼 불가론을 내세웠고, 김영삼이 여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그의 친인척 비리 조사를 하는 바람에 김영삼에게 완전히 찍힌 상태였다. 또한 김영삼의 취임을 전후해 언론에 김영삼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과 청와대 수석에 대한 제보가 들어와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것이 서완수가 이끌던 기무사의 행위로 의심되었다. 게다가 서완수가 기무사령관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독대를 시도할 때 권영해 장관의 비리 파일을 들고 가서 정보 보고를 시도했다고 한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은 계룡대 집무실에서 권영해 장관에게 통보를 받고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말했으며, 물러난 후에는 "이제 내가 나왔으니 쿠데타 위험은 없다."라고 했다 한다. 후임자인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이발소에 있다가 장관에게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고 "6공 때 대장 달았다고 이제 물러나라는구나"라며 경질 통보로 생각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권영해는 그에게 "자 이제부터 육군은 당신이 맡아주는 거야"라며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음을 알렸다.

 서완수는 기무사에서 전국 40명의 기무부대장들을 모아 하는 월례회의를 평소보다 앞당겨 하고 있었는데, 먼저 동석한 참모장 김도윤 소장이 전화가 왔다는 부관의 말을 듣고 나갔다 왔고, 이어 서완수가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권영해에게 해임 통보를 받고 돌아왔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서완수는 자신의 해임 사실을 기무부대장들에게 알렸고, 신임 사령관 임명 통보를 받은 김도윤은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은 "힘이 센 자리는 계급도 높으면 안 됩니다."라며 그의 철학을 권영해에게 말했다고 한다. 기무사령관 자리는 대장 진급까지 노려볼 수 있던 중장 2차 보직에서 소장 보직으로 격하(환원)되었으며 대통령과 독대 중단은 물론 국방부 회의 때도 자리가 말석으로 바뀌었다. 헌데 7개월 뒤 김도운 기무사령관의 후임은 ROTC 3기 임재문 준장이었는데, 2년 동안 중장으로 고속 승진한 뒤 대통령과 독대하게 되었다. 결국 김영삼은 하나회를 숙청시킨 뒤 다시 자기 손으로 자리를 환원시켜버린 것이다.

경질된 서완수는 제1야전군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거기서도 해임되자 잠시 연구관을 하다 전역해 미국으로 이민, 이후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하루동안 7개의 별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이 일이 단순한 군 수뇌부 교체가 아니라 하나회 숙청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유명한 "놀랬제." 발언을 하여 뒷날 화제가 되었고, 이어 김영삼은 "저짝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기야."라고 했고,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동아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군부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하며 충격을 넘어 경악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나 당시 하나회는 김진영-서완수 같은 전두환계가 아니라 노태우계 하나회가 주류인 상태였으므로, 당시 하나회 주류인 노태우계 인사들은 당시 김진영-서완수의 해임을 "전두환계를 날리는 쇼를 하는구나" 정도로 판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ROTC 그룹을 정리하기 위한 일종의 명분쌓기 용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당장 자기네부터가 노태우 정부 시절 전두환계 하나회를 날려버렸던 전적이 있으니 김영삼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적절한 명분을 쥐려는 행보겠거니 하고 마음을 놔버린 것이었다. 물론 김영삼의 의도는 명분 쌓기 따위가 아니었다. 


4월 2일, 국방부 회의 때 중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모였다. 헌데, 육사 19기 특전사령관 김형선과 육사 20기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이 불참하더니 회의가 시작되고 1시간이 지나서야 권영해 국방부장관이 통수권 차원에서 그들을 경질하였다고 참석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전두환계였던 김진영이나 서완수와 달리 김형선과 안병호는 확실한 노태우계였고 9-9라인(노태우가 9사단장 및 9공수여단장으로 일하던 시절 부하들, 즉 노태우의 직계 군맥들을 말한다.)으로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특전사와 수방사는 수도 서울 인근에 주둔한 충정부대로 12.12사건의 주역들이었다. 김형선은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으나 과거 노태우가 9공수여단장일 때 작전 참모 및 대대장으로 근무했으며, 김진영이 물러난 뒤 대장 진급 떡밥이 돌 정도로 떠오른 노태우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수방사는 12.12 이후 그 자리에 노태우가 앉은 뒤로 계속 9-9 라인만 임명되던 요직으로, 안병호는 12.12 때 9사단의 노태우 사단장 휘하 작전참모였던 인연으로 그가 대통령이 된 후 5년간 군의 실세였다. 


김형선과 안병호를 끝으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수장들은 전부 제거되었다. 이는 권영해 장관조차 전날 식사 자리에서 통보받을 정도로 전격적이었으며 극도의 보안 속에서 오로지 김영삼과 그의 비선라인으로 하나회 숙청 작업을 하는 예비역 그룹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되어 왔다. 이는 하나회 수장들이 특수사령부와 수도권 지역 사단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어서 였다.


후임 수도방위사령관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도일규 소장(육사 20기)이 지목되었다. 이 당시 연합사 부참모장 자리는 소장으로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는 자리였고, 그 위에 있는 연합사 사령관 역시 한직이자 마지막 자리였다. 물론 둘 다 보란듯이 각각 수도방위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으로 올랐지만. 아무튼 도일규 소장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가 발각되었을 때 하나회 색출을 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을 때 비서실장이었다. 때문에 그는 하나회의 견제를 받았었고,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특히나 그의 숙부가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인척이라 이후 3군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영전하며 문민정부 시기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특전사령관은 육본 동원참모부장 정창규 소장(육군 21기)이 진급과 동시에 내정되었다. 8사단장 시절 김동진 5군단장 아래서 일했는데, 이 관계가 참모총장과 특전사령관으로 재현되었다. 둘 모두 한직만 돌다가 2, 3차 진급때야 겨우 진급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둘 다 사령관 임명과 동시에 중장으로 진급하게 되며 비하나회, 비9-9라인이 요직을 맡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여담으로 어떻게든 줄을 대서 살아남으려고 하던 노태우의 최측근 김형선 특전사령관은 앞서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의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다음은 자신이라는 것을 직감, 자기 짐을 본가로 보낸 뒤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라며 사령부 헬기장에서 운전연습을 하고 있었고,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상교동계에 줄을 대고 있었다. 당연히 둘 다 사이좋게 짤렸다.


그나마 김형선은 9-9인맥이긴 해도 하나회는 아니었기에 2주 뒤 김진선 육참차장이 진급하며 동시에 2군 사령관으로 진급하자 그 자리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는 2차 진급자여서 동기들은 모두 대장진급을 했기에 그게 마지막이었고, 육군참모차장은 휘하 병력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안병호는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죄천되어 2달 뒤 12.12군사반란 참여자들을 숙청할 때 전역했다.


이렇게 2차 숙청에서 육참총장(대장), 기무사령관(중장), 특전사령관(중장), 수방사령관(중장)이 날아가며 별 13개가 떨어졌다. 이는 이 자리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핵심 보직이었고, 실제로 12.12 군사반란도 기무사령관 전두환이 육참총장 정승화를 체포하며 발생했던 일이었으니까.


다음으로 야전의 실병력 지휘관들을 교체할 차례였다.(3차 숙청)4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중장 3명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며 2군사령관에 김진선 육군참모차장, 3군사령관에 윤용남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합참차장에 편장원 육군교육사령관을 새롭게 내정한다. 이들 세 자리는 노태우가 임명한지 1년 되었기 때문에 정기 인사라고 할 수 있으며, 조남풍 1군 사령관만은 임명된 지 6개월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유임되었지만 3달 후에 경질되었다. 그 외 공석이 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는 합동참모차장인 김재창 대장이 임명되었다. 다만 김재창도 1년 뒤 하나회 회원이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져 경질당한다.


다만 김연각은 하나회도, 9-9라인도 아니었지만 정통 TK여서 그런지, 동기인 김동진 신임 참모총장과 함께 17기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1위 그룹은 김진영 전임 참모총장. 똑같이 비하나회였지만 김영삼 정권에서 자신은 출세하고, 김연각은 배제된 것에 대해 김동진은 "그는 TK였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김영삼은 PK 출산들을 중용했다.) 참고로 하나회는 17기부터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분리되었다.


구창회 3군 사령관은 조남풍 1군 사령관과 함께 18기 9-9인맥 핵심이었다. 12.12당시 노태우의 9사단 참모장을 한 공으로 이후 수방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을 둘 다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비하나회가 하나회에게 이를 가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자기들끼리 요직을 다 해먹기 때문이었는데, 구창회는 여기에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라 김진영 다음은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고 차기 참모총장 후보로 꼽혔지만, 진급 대신 전역을 명받았다.


그런데 이들의 후임자 중에서 이질분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바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으로, 충북 출신의 육사 19기로 이 사람은 9-9인맥인데 승진했다. 김진선은 노태우가 21연대장, 9공수여단장, 수경사령관일 때 계속 참모로 일한 확실한 노태우 사람이었지만 하나회 가입을 거부당한 과거가 있다. 이에 개인적인 분노를 갖고 있었고, 그가 수방사령관이 되자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장 안병호에게 하나회 명단을 받은 후 이를 바탕으로 하나회 배제를 했다. 일단 수방사 참모직에서 하나회를 전부 배제시켰고 진급도 막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계 하나회를 친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이쯤 하면 됐다는 윗선의 신호에도 계속 밀어붙이다 노태우의 눈 밖에 나 2개월 근신 처분을 당했었다.
이런 전적이 새 정부의 공적으로 인정받아 9·9 핵심 인맥임에도 김영삼 아래에서 승진한 것이다. 사실여부야 어떻든 김진선은 하나회를 때려잡는데 앞장서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 있으며 장태완 사령관을 방해한 역사적인 과오가 있었기 때문에, 2군 사령관 임명 후 2달 만에 12.12 관련자 숙청 때 경질되어 군복을 벗었다.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은 경남-부산고 출신의 육사 19기인데, 평소 하나회에 치여 산 덕분에 새 정부에서 승진했다. 일설에 의하면 사단장 승진할 차례였을 때 인사담당자가 "당신도 누가 먼저 나가야 하는지 알잖아. 이번에 쉬고 다음 차례에 나가라"고 했다 한다. 본인은 알겠다고 말했지만 생각할수록 분해 밤새 통음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윤용남의 하나회에 사무친 감정은 보통이 아니어서, 대장 달자마자 공식 석상에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 시점에도 군 요직을 독점하며 군을 파행으로 몰고 갔던 하나회 출신들이 건재하고 있다. 이들을 당장 군에서 내보내야 한다."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에 측근들이 하나회는 아직 살아 있어 표적이 될 수 있다며 자제 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회 척결 강경론자 이미지 + PK 출신이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합참의장으로 영전한 김동진 대장의 후임이 되어 94년 12월 아예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편장원 신임 합참차장은 육사 18기에 충남-휘문고 출신 순수 야전군인이다. 비하나회 출신으로 동기 내 가장 늦게 사단장을 달았고 중장 진급은 3차, 대장 진급은 4차에 했다. 하지만 고향이 김영삼과 불편한 관계를 맺던 김종필과 같은 충청권인 것이 걸려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 보직만 수행하고 1995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한다.

이 4.8 인사로 인해 2군사령관 김연각(17기) 대장과 3군 사령관 구창회(18기) 대장이 군인사법에 의해 즉각 전역 처리되며 별 8개가 떨어졌다. 이제까지 떨어진 별이 총합 21개.


일주일 후인 4월 15일에는 군단장·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몰아냈다. 이른바 'YS장군'은 군단장 4명(표순배, 김정신, 배문한, 이재관 표순배 중장이 하나회 인사였다.), 사단장 8명이었다. 또한 하나회들을 요직에 배치시키던 국방부 인사국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역시 교체되었다.(육사 21기 전영진 소장, 최승우 소장)


이중 핵심은 육본 인사참모부장 최승우의 좌천이다. 인사참모부장은 18기 구창회 3군 사령관 → 19기 김진선 2군 사령관 →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 → 21기 최승우 순서로 하나회끼리 물려받아 온 핵심 요직인데 똑같은 요직이었음에도 작전참모부장은 양보해도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참모부장은 남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 것이 자신들끼리 관례이다. 역대 인사참모부장들은 모두 수도권 사단장 → 육본 인사참모부장 → 수방/특전/기무 사령관 → 중장 또는 대장으로 전역하였고, 이후 장관 또는 정부투자 기관장으로 나갔지만 이 4명은 시대가 바뀌어 모두 나가리. 최승우는 이후 한직을 돌다 1995년 6월 전역해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2006년 예산군수에 당선된다.


별개로 새로 임명된 사람들 중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하나회나 9-9라인 중에서 쓸만한 사람은 남겨두자는 인식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육군참모차장에서 대장 진급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이 9-9라인이었고, 특전사령관에서 경질되고 새 육군참모차장으로 이동한 김형선 특전사령관(9-9 라인) 역시 9-9라인이었다. 또한 19기 하나회 이택형 중장이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으로 나갔고, 21기 하나회인 표순배는 3사관학교장을 하다가 진급하여 군단장이 되었는데 권영해 장관 내외와 절친이어서 뒷말이 많았다. 다만 표순배 중장은 후방 군단장인 제9군단장으로 이동했는데 9군단은 향토, 동원사단들로 구성된 탓에 실제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가 적었다. 때문에 1994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조치되었다.

하지만 이번 인사를 끝으로 하나회가 완전히 뿌리 뽑히기 전까지 하나회원이 실병력 지휘관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워낙 하나회 소속이 많았던지라, 한번에 다 잘라버리면 후속 인사할 사람이 없어서 일부를 진급가능성이 없는 보직으로 보내버렸다.

준장급 중에서는 육사 26기인 이상학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4기인 권중원 국방장관 군사보좌관이 조용히 보직을 내려놓았다. 비서실장의 경우 무조건 하나회끼리 주고받는 자리이며, 권중원은 전두환 밑에서 영남군맥 엘리트로 승진했던 인물이다.

4.15 인사(4차 숙청)의 특징은 그동안 승승장구해오던 1차 진급자들의 영전에 제동을 걸며, 2,3차 진급자들과 비육사(ROTC, 갑종)들을 중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1차 진급자들은 상당수가 하나회 출신 또는 9-9 라인이었다.

이렇게 기습적인 4번의 교체(3.8 인사 육참총장-기무사령관, 4.2 인사 특전-수방사령관, 4.8 인사 군사령관, 4.15 인사 군단장-사단장급)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전격 교체된 것과 같은 날인 4월 2일. 당시 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을 맡고 있던 대령이던 백승도가 육사 20기(중장급)~36기(중령급)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현 이태원동 남산 대림아파트)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졌다. 문서의 제목은 <육사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A4용지보다 더 작은 16절지 크기에 앞서 김영삼 초 국방부 주차장에 뿌려진 명단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언론에서 나온 각종 하나회 명단은 이른바 '백승도 명단'에서 일부 이름과 기수 오류 같은 오타를 수정한 버전이다.


이날 아침 기무사를 통해 보고 받은 장관과 총장은 항상 있는 음해성 투서 정도로 생각하고 청와대에 전달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지만 관사에 입주하고 있던 비하나회 장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1973년 윤필용 사건 이후 26기 정도에서 명맥이 끊겨 기억으로만 남은 전설의 하나회가 중령급에 30대 중반에 불과한 36기까지 시퍼렇게 살아있던 것을 문서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나 합참에서 근무하고 있던 비하나회 장교들은 이 유인물을 들고 동료들에게 갔다. 복사기가 바쁘게 돌아갔으며, 팩시밀리를 통해 지방으로 문서가 넘어간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이에 범수단에 조사를 시키려 했으나 단장인 육사 24기 채문기 준장이 하나회 소속이었고, 결국 23기 육사 이문도 준장이 있는 법무감실로 넘겼다. 그리고 11일이 지난 4월 13일 드디어 언론에 이 명단이 떴다. 이제 모든 장교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동기 중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하나같이 그 명단에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진급이 정체되어 있던 장교와 장군들은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고 "하나회를 군에서 즉각 추방하라!"는 여론이 순식간에 형성 되었다. 이제 장관과 총장도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의 하나회 척결 강성 발언도 이 시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나왔다. 4월 24일 육군범죄수사단장 채문기 준장(육사 24기)과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장이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둘 다 백승도의 하나회 명단에 포함되어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명목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책연구관으로 내쫓기고 전역했다.


사건을 일으킨 백승도 대령은 육사 31기 육군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이었고, 소령 시절 육군대학에서 국무총리 상을 받은 전도유망한 군인이었으며, 대령 1차 진급자에 31기 동기회장이었다. 그는 좋게 보면 사람이 좋아 대인 관계가 뛰어났고 나쁘게 보면 주로 부관 생활을하면서 어느 정도 정치색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모셨던 사단장이 서울로 올라온다면 밤새 주차장에 기다려서라도 반드시 만나 인사를 드렸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부관 생활을 하며 얻은 고급 정보와 동향을 전해주니 장군들의 예쁨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정치질을 했는데 불구하고 자기 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외 없이 특정 사조직임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는 큰 충격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백승도 대령은 하나회 죽이기에 나서게 된다.


앞서 설명한대로 4월 2일 백 대령이 동빙고 군인 아파트에 문서를 뿌렸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언론에 제보하러 갔다가 우연히 같은 카페를 방문한 도일규 신임 수방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도일규 사령관이 그를 알아보고 왜 여기에 사복을 입고 왔냐고 묻는 과정에서 백 대령은 괴유인물 살포는 자기가 하였으며 기자회견 하러 왔다고 이실직고 하였다. 이에 도일규 사령관은 '당장 총장님을 뵙고 사과 드리라!'고 하였고, 이에 김동진 총장 공관에 갔다가 '여긴 왜 왔냐며 범수단에 가서 자수하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승도 대령을 잘 아는 사람들은 원래 그가 호기심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면서도 돌출 행동을 하는 성격이어서 하나회 명단을 뿌렸다는 소식에 그럴법 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하나회측에서는 전혀 다르게 판단한다. 6공당시 9-9라인 핵심 장성(김진선 당시 육참차장으로 추정된다.)의 주도아래 파워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새 정권에 대비하고 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미리 계획한 명단 살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가지 단서로 어떻게 일개 대령이 갑자기 총장 공관에 가서 만날 수 있냐고 의문을 표하며 두 사람은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공식 수사 결과는 백승도 단독 범행이지만, 이후 사석에서 명단 살포는 자기 말고 다른 한 명과 함께 했다고 하거나, 자기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대신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말도 하였다.


명단을 살포한 백승도 대령은 자수 후 헌병대에 끌려가 호텔 사우나에서 조사를 받은 후 귀가 조치 되었으며, 내부 일을 편법적으로 고자질 했다는 원죄 때문에 근신 처분 받았지만 이후 동기 중 가장 먼저 연대장(25사단)으로 진출했다. 이후 육군대학 방어학처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산하 국방비서관실 행정관 근무를 거쳐 1999년에 준장 1차 진급에 성공했고 66동원사단장까지 올랐으나 계속해서 소장 진급에 실패하고 한직인 전투지휘훈련단장으로 보임되자 이에 반발하여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결국 전역 지원서를 제출하여 2005년 1월 동기생인 최광준 준장과 같이 준장 예편한다.

이제 범수단 수사의 초점은 누가 살포했냐가 아니라 문서의 진위 여부였다. 이상도 준장이 이끄는 범무감실은 장성들을 조사하고, 손태진이 이끄는 헌병단은 장교들을 담당했다. 장군들은 쉽게 자신이 하나회임을 인정했으나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장군 승진을 눈앞에 둔 27기와 대령 진급을 앞둔 32기는 필사적으로 부인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동기생들을 불러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거쳤다. 이에 등급을 나누었는데 A는 본인이 하나회원임을 인정한 경우, B는 본인은 부인 동기생들이 인정, C는 본인 부인 동기생은 일부만 인정, D는 확실히 아닌 경우였다.


확인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하나회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와 9-9라인이었다. 30기 이후에는 선배의 일방적인 선택에 자기도 모르게 회원이 된 경우도 많았으며 이 시점에선 '하나회'라는 조직명이 잘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무개 선배 장군과 수방사 앞에서 밥을 먹었는가?', '그런 모임이 1년에 몇 번이나 있었나.' 그리고 보직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했는데 이렇게 하나회원들과 어울리며 잘 나가는 것은 노태우의 총애를 받던 9-9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그렇다면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라며 잘못 자수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러다 기무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회원 여부를 판별해 주었다. 기무사에는 절대 치트키인 존안카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하나회 명부 자체는 없었지만 하나회로 의심 받은 개개인이 하나회원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주는 건 가능했다. 여기에는 하나회원이 비하나회원인척 하여 숙청을 피해가거나, 비하나회원이 오해를 받아 불이익 받으면 안 된다는 논리에 납득한 기무사 내부의 하나회원들의 도움이 컸다.


이 과정을 거쳐 93년 말에 가서는 하나회 명단 최종본(105명)이 완성되었다. 백승도 대령 버전은 90%는 맞았는데 특히 장성은 3명 빼고는 다 맞았다. 이 조사과정에서 뒤늦게 알려진 것은 12.12 이전인 26기까지는 자발적으로 가입 했으며 전두환 정권 말기인 87년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유사시 우리 말을 잘 들을 젊은 놈들을 군내에 박아둬야 한다."라며 30기~36기(80년 임관) 하나회를 한두 달 사이에 급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수 장교들은 선배장군이 불러서 회식에 가서 몇 마디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하나회 모임이고 자신이 가입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럼으로 이들이 이후 진급에서 계속 누락된 것은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하나회 회원 명부)

하나회 명단 확인 결과는 비하나회원들에게 충격을 넘어 헛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5~6공 당시 육참총장 6명중 5명, 보안사령관 10명 전원, 수방사령관 10명 중 8명, 청와대 경호실장 5명 전원, 육본 인사참모부장 15명 중 13명, 수방사 30 경비단장 6명 전원, 33 경비단장 7명 전원이 하나회원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때로 올라가도 당시 영관급 요직이었던 수방사 경비단장, 보안사 실·처·지구대장, 수방사 대대장·작전참모, 특전사 작전참모, 수도권에 있는 9사단, 30사단 연대장·작전참모가 대부분 하나회원이었다.


이제 명단은 드러났으니 이들을 어떻게 처분하는지만 남았다. 대장과 중장은 보직을 안주면 자동 전역이나, 소장 이하는 군 인사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에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진급 대상자는 한 차례 진급에 불이익'을 주며 진급 대상자가 아닌 경우는 '주요 보직에서 좌천'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회 측에서는 말이 1차례 불이익이지 한번 한직으로 가면 보직 관리가 안되어 더 이상 진급이 안된다며 사형 선고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12.12 주역 축출

5월 8일 국회에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은 황인성(육사 4기) 국무총리에게 '12.12는 쿠데타냐 아니냐?'라고 물으며 OX로 답 하라고 했고, 이에 황 총리는 '하나의 군사적 행동으로 위법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부대를 이탈해 서울까지 탱크를 몰고 온 것이 합법적인 행동이냐?'고 재차 질의하자, 황 총리는 다시 한 번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하였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이고 흐리멍텅한 대답이 아니라, '위법사항이 아니다' 라는 딱 부러진 답변을 한 것이다. 당장 국회에서 민주당의 반발과, 하나회 출신 여당의원(이춘구, 박준병, 강창희, 김복동, 정호용, 허화평, 박세직, 김상구, 허삼수, 정동호, 배명국, 신재기, 권익현, 안무혁 등)간에 고성이 이어졌다. 결국 다음 날 황 총리는 사과했지만, 그래도 반발이 이어지자 13일에는 "12.12 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었다."라는 청와대 공식 답변이 나왔다. 


12.12 당시 쿠데타의 주역은 보안사(전두환)와 병력을 출동시킨 특전사, 수방사, 9사단(노태우)이다. 이 중 앞서 3개 부대의 지휘관들은 군내에서 출세할 만큼 다 출세한 후 이미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반면 중앙청에 탱크를 몰고 쳐들어간 9사단 출신 등 일부는 아직 군문에 남아 있었는데, 당시 사단장 노태우 이하로 이필섭 29연대장(현 합참의장, 16기), 안병호 작전참모(현 2군 부사령관, 20기)가 바로 그들이다. 또한 수방사에서 2중 플레이를 했던 김진선 상황실장(현 2군 사령관, 19기)이 현직에 있으며, 무엇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을 사살한 당시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현 56 보병사단장, 23기)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당사자들이야 12.12 당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12.12 당시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반란 모의를 한 다른 장군들과 달리 이들 4명(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선 2군사령관, 안병호 2군 부사령관, 박종규 56사단장)은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듣고 일선에서 근무하다가 상관들의 지시를 받고 따르긴 했다. 특히 당시 29연대장으로 중앙청에 군대를 출동시킨 이필섭 합참의장은 "그때는 정말 사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며 자신은 아이히만처럼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다고 했지만, 이후 9사단장까지 역임하며 9-9 인맥의 성골로 온갖 꿀을 빨아 온 것이 사실이다. 안병호 당시 작전참모는 어떻게 한번 좌천 시킨 사람을 또 자르냐며 기자회견까지 하려고 했지만 측근들이 말렸다. 김진선은 개혁 성향의 인물로 전두환 시절에 이미 하나회를 공격한 공적으로 새정부에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12.12 당시 수방사 상황실장으로 허위보고를 하면서 장태완 장군을 헷갈리게 만들었는데, 김진선의 변명은 '아군끼리 피 흘리게 만들 수 없었다'는 것.


12.12 장성 전역 조치에 하나회 측에서는 같은 12.12 가담자라도 하나회만 자른다고 불만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 중앙청까지 군을 밀고 들어간 대대장 출신 장성 3명은 비하나회여서 그런지 아무 처벌이 없었다. 하지만 박종규 소장만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박종규 본인은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 체포 명령을 최세창 3여단장에게 받았을 때 '사령관을 체포 명령을 거부하고 여단장을 잡아야 한단 말인가?'라며 정황상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한쪽 팔에 총을 맞고 박종규에게 개처럼 질질 끌려갔던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는 충격에 눈이 멀었다는 비극적인 스토리는 박종규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필섭 함참의장등 12.12 가담 장성 4명의 예편이 발표된 5월 23일, 박세환 교육사령관이 대장으로 승진 후 김진선의 후임으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박 사령관은 고려대 ROTC 1기로 학군 출신 첫 대장이었다. 드디어 비하나회, 비육사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ROTC는 1965년에 시작하여 93년 당시 현역 장교의 절반, 초급 장교의 70%(육사의 7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무 복무 후 90%가 전역하지만 반대로 남은 10%의 단결력은 대단했다. 새로운 엘리트 파워집단으로 노태우 정권 말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의 취임 일성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이는 ROTC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세환 사령관 이후 ROTC 3기인 임재문 준장이 기무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문민 정권내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렇게 김영삼 대통령 취임 3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고 떨어진 별이 40개가 넘었는데, 이는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상급 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 군 내 숙청 작업이었다. 이때 새로 임명된 중장 이상의 인사가 너무 많은 탓에 대통령이 달아줄 계급장이 모자라서 현역인 국방부 국장급 인사들에게 계급장을 빌려서 달아줬다는 일화도 있다. 평소 인사가 6, 12월에 있으니 이를 예상치 못하고 별들을 준비 안 해놔서 생긴 후문. 그 정도로 급박하게 인사이동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를 1차 하나회 숙청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최초 의도는 여기까지였다. 하나회 완전 숙청이 아니라 김영삼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만 도려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하나회의 수장들만 날렸고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보도제목인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 등이 말해주듯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수뇌부만 숙청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권급 이하는 자기가 하나회 가입자인지도 모르고 상관 따라 갔다가 가입 당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나름 우직하게 군 생활을 하면서 하나회에게 당한 게 많았던 권영해 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권영해의 경우 소장 출신인 것을 두고 군부 쪽에서 여태까지 국방부장관은 예비역 대장이 하던 관례를 들먹이며 일개 소장 출신이 장관에 올라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비난 첩보를 듣던 상황이었고, 김동진은 육사 17기 수석졸업자로 엘리트 중 엘리트지만 비영남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대구 및 영남권 기반으로 구성된 사조직인 하나회에게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왔다. 일례로 육참총장 이전 김동진의 보직이었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21세기에는 근 20년간 가장 많은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한 요직 중의 요직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육군참모총장 경쟁에서 패한 퇴물 대장이 가는 자리였다. 그래서 권영해와 김동진 모두 하나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는데, 일례로 박관용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의 대숙청을 예시로 들며 유능한 초급장교 보호 차원에서 일정 선까지는 살려보자고 대통령의 동의를 얻은 후 박관용이 직접 H호텔 일식당에서 이들을 만나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권영해는 그런대로 납득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동진은 정색했는데,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라고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일이 터진다. 


-군부의 반발

하나회 1차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1993년 7월 9일,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한달 기념으로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불만 섞인 발언을 했고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으로 불리는데, 당시 이양호 합참의장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 나갔으며, 합참1차장 편장원 대장은 직접 말렸고, 하나회 19기 선배인 김상준 작전본부장과 이택형 전략기획본부장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충석 소장은 만취해 업혀 갔다.


김영삼과 비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전해듣고는 이 사건을 하나회가 청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 통수권자에게 저항하려 한다고 판단, 새 합참의장인 이양호 대장은 분노했다. 결국 하나회의 군사 반란을 우려해 일부러 내버려뒀던 일부 장성과 영관급 회원까지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먼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은 16일에 보직 해임함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켰으며, 나머지 하나회 장성들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장성급을 정리한 이후에는 영관급을 숙청했다. 하나회 출신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진급과 직위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했고,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말 그대로 공중분해 되었다.

이충석은 전두환의 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로 하나회 계보를 보자면 12기 박희도 - 14기 이종구 - 17기 김진영의 뒤를 잊는 21기의 전통 전두환맨이다. 전두환이 1사단장일 때 예하 대대장이었고 이후 수경사 30경비단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역임했다. 그야말로 진퉁 1-1 라인.


게다가 며칠이 지나고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내쫓긴 최승우 소장(21기 하나회)이 김진영 전육군참모총장, 2군단장 김길부 중장(20기)과 모의해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는 문건이 기무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더 커졌으나 이는 무혐의로 결론났다. 그럼에도 최승우 소장은 육본 정책위원이라는 집에서 노는 자리로 쫒겨났다가 8개월 후 예편되었고, 김진영 전육참총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떠난다.


다음은 제1야전군사령부였다. 하나회 인사인 조남풍 1군 사령관(육사 18기)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군 장성들 상당수가 하나회 인사였는데 부사령관 서완수(육사 19기. 이미 기무사령관에서 잘린 상태라 전역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모장 유회국(육사 22기), 작전처장 윤영정(육사 24기), 2군단장 김길부(육사 20기), 3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등 하나회 회원들이 1군사령부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순차적으로 교체되었다. 후임은 이준(육사 19기) 국방부 군수본부장으로, 군단장을 지내지 않은 채 대장으로 진급한 이례적 케이스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인사에서 하나회원인 김정헌(육사 18기. 이쪽도 동기와 후배들이 이미 대장으로 진급해서 대장 진급이 불가능했기에 전역을 사실상 앞두고 있었다.) 육사 교장, 이택형(육사 19기) 합참 작전기획본부장, 안광렬(육사 20기) 국방부 시설국장, 최기홍(육사 22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덕선(육사 20기) 11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3군단장, 최승우(육사 21기) 교육사 참모장이 모두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발령받았고 이후 다른 한직으로 다시 내쫓긴 최승우 소장을 빼고 전부 전역했다. 6개월 뒤인 1994년 4월에는 김재창(육사 18기) 연합사 부사령관, 장석린(육사 18기) 국방대학원장, 박광영(육사 19기) 육군교육사령관, 최권영(육사 19기) 777사령관, 김길부(육사 20기) 2군단장, 표순배(육사 21기) 9군단장, 김현수(육사 23기) 22사단장, 길영철(육사 23기) 11사단장이 교체되었다. 모두 하나회원이었고, 이로써 중장급 이상에 하나회원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가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물색했는데, 이때 김영삼은 "5.16 또는 12.12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하고, 하나회 출신이거나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하나회가 득실거린 터라 김영삼이 내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군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등학교 라인인 국가보훈처장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김영삼은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라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후 이병태가 일산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유사시 아파트를 무너뜨려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장애물로 쓰겠다는 발언)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 결국 이병태는 4개월 만에 경질된다.
심지어 하나회 중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군참모총장 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에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에게 시켰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방영된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이 험악하게 나오게 되는데,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영입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외에도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일화들로 짐작하건대,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 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비영남권 출신 비하나회 군인들이었다.


숙청이 마무리돼 가던 1994년 10월 25일에 3사관학교장인 오형근 소장이 1군 부사령관(사실상 전역대기 명령)으로 발령받자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하였다."고 이임사를 했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후 본인은 부인하였는데, 이는 하나회의 마지막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김영삼의 초기 전격적인 숙청과 93년 10월 정기 인사, 연말 전격 인사, 94년 4월과 10월 정기 인사까지 계속해서 하나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하나회로 바뀐 군부에서는 하나회 출신 장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역시키길 원했지만, 이병태 장관을 거쳐 청와대에서는 중장, 대장까지만 쓸어 버리는 것으로 결론 냈다. 대장은 김재창 한미연합사령관을 마지막으로 모두 전역, 중장급은 김길부, 김종배, 표순배까지 모두 전역하였다. 이 기간 중 하나회 장성 진급자는 한명도 없으며 대령 진급자는 3명뿐이었다.

그래도 22기 이하 36기까지 하나회원 약 100여 명이 군부에 남아 있었다. 명령에 의한 강제전역은 중장과 대장만 가능하고, 소장 이하는 계급 정년까지 임기를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한직에 처박아두는 것이 한계였다. 이 시점에 22기 2명(육본 정책위원 유회국 소장, 최기홍 소장), 23기 4명(김영철 국방대학원 부원장, 박영일 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손수태 3사관학교장, 정정택 합참군수 차장)이 있고 24기는 전원 준장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 25~26기는 준장으로 한직인 동원사단장. 27~31기는 대령에서 승진이 안 되고 있으며, 32~36기는 중령이었다.


반면 오랜 세월 모진 핍박에 시달려 오던 비하나회 장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사단장, 군단장까지는 자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대령~중령급에는 정치장교인 선배 기수들과 달리 육사시절 엘리트였던 군인들이 많이 포섭되어 있었는데, 승진철만 되면 '하나회는 안된다'라는 온갖 압력에 의해 계속 배제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승진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은 더이상 누릴 수 없었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대령들은 요직에서 잘려 행정부사단장으로 좌천, 중령들은 전부 부연대장 같은 한직으로 내쳐진 것이다. 심지어 전방지역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로 근무하던 중령을 후방 지역으로 보내 향토, 동원사단이나 경비연대 대대장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26기까지는 어찌저찌 진급을 했지만 27, 28기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이 끝났으며, 29, 30, 31기는 각각 1, 2, 3명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32, 33기는 그나마 대령까지는 갔지만 34기부터는 2명 빼면 중령 예편, 35기는 4명 빼고 중령 예편했고 36기는 10명 중 5명이 대령으로 진급했다. 한 마디로 26기 이후로는 오히려 진급에 페널티를 크게 받아 오히려 올라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후

김영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전두환 정부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1997년 대선까지도 흘러나왔다. 그만큼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할 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영삼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민주정의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내세울 만한 사람을 못 찾고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 소속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또 다른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011년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와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등을 꼽았다. 한국논단 및 노태우 등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회의 구성원들은 주로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회에 가입했다가 하나회 영관급 숙청 때 대거 전역하면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단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렸다는 것.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군사적 능력이 출중한 초엘리트들의 사조직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이들은 최전방이나 월남전 같은 실전에서 복무한 경험은 적고 국방부, 육본, 특전사, 수방사, 기무사를 돌면서 편하고 서울에서 근무하는 보직을 독차지했으며, 기껏 나가봤자 경기도에 파병 나가서도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그저 정치군인이었고, 군사적 능력보다 아부떠는 능력만 있는 놈들이 중용되었다.


오히려 하나회 가입을 거부한 올바른 생각과 능력을 가진 장교나,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비하나회 군인들은 이 하나회 때문에 대부분 영관, 심하면 대위에서 끝나버리는 판국이었다. 하나회의 해체 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때 당시 장성 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하고, 이걸 하나회의 두목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승인하는 게 관행이었다. 요직과 진급을 철저하게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의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게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비하나회 군단장이 자기 휘하에 있는 하나회 연대장의 눈치를 보는 수준이었다. 조천성 사단장이 자기 휘하인 전두환 연대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다가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10년 넘는 기간동안 어디서 뭐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겨우 나타난 사례만 보더라도, 하나회의 계급 무시는 엄청났다. 


오히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국군의 대응에 대한 문제도 하나회 숙청이 아니라 '지나친 보병 위주의 군사작전'이었다. 죄다 소총수밖에 없으니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들에게 화력으로 계속 밀리기 일쑤였고, 그나마 제대로 활약한 부대가 특전사였음을 생각해보면, 되려 하나회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보병 만세'가 원인이었다. 그래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육군 보병 편제에 유탄발사기 사수가 추가된 것이다. 또한 이때 활약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하나회원이라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게 아니다. 장선용은 애초에 부사관으로, 오로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이 경상도인 장교들만 받아들였던 하나회와는 거리가 멀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에 반대하던 명장 채명신 장군을 내쫓고 정치군인을 기용하며 한국군은 월남에서 얻은 게릴라전 대처 능력을 잃었고, 이것이 터져버린 게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었다.

참고로 알다시피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는 휴전선의 9사단의 절반 이상의 병력이 밀집된 29, 30연대를 빼돌렸다. 노태우가 말한 전투력 약화, 3류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두 노태우가 소속되어 있던 하나회가 저지른 적이니까.


아무튼 하나회는 수십개의 별이 떨어지며 사실상 와해되었고 후일 정권들도 군대가 사조직을 만들어 정권을 탈취할 것을 염려해 군대 사조직은 철저하게 색출되어 30여년간 이어지던 군부의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하나회를 계기로 군대내 사조직을 향한 국민적인 경각심은 고취되었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군부독재의 어두운 면을 집중조명하고 젊은 세대들은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데다가 검열,통제를 싫어하는 자유가 몸에 익혀서 이러한 동력으로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 사조직들도 후일 적발되어 하나회와 함께 철퇴를 맞아 사이좋게 군복을 벗고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특히 이 모임들 회원 리스트엔 하나회의 34~36기 최후반기 기수들이 겸임하는 이름들도 더러 발견되어 하나회의 후신이 도래할지도 모를 판국이었지만, 발각 당시 기준으로선 20~30대에 불과한 신인 장교였기에 규모도 크진 못했고 행동 반경은 넓지 않아 대부분은 근신 징계에 그쳤다고 한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도 아직 자잘하게 군 내 사조직들이 적발되고, 하나회의 잔당들이 정치권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으며, 성우회나 재향군인회 등 예비역 장성모임에선 아직 하나회 출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끝-

아, 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