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 비스마르크와 세계대전
비스마르크는 협상과 동맹을 통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한 바 있다. 특히 그는 독일의 연방의회 체제에서 절묘한 외교술을 통해 상대국의 입지와 명분을 약화시켰다. 비스마르크가 벌인 대부분의 전쟁은, 막무가내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치밀하고 전략적인 계산을 염두에 두고 벌인 정치적 행위였으며, 비스마르크 체제 하 프로이센은 어떠한 전쟁에서도 고립된 입장에 서지 않았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연방의회 참가국이었던 홀슈타인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러시아,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았다. 이를 통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연방에서 축출하고, 북독일 연방의 맹주로서 거듭날 수 있었다. 이후 보불전쟁에서 비스마르크는 엠스 전보 사건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선제침공을 유도했고, 이를 통해 국제 여론을 프로이센에 우호적으로 돌려놓아,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전반적으로 그의 외교정책은 언론과 회담, 협약 등을 통해 적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안정적인 상태에서 상대국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식의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절묘한 세력균형 정책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 그가 1차,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외교적 행보를 짚어본다면, 다소 회의적인 평가는 불가피할 것이다. 유럽 중부에 있는 독일의 여건상, 전쟁이 발발하면 양면전쟁의 양상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안정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동쪽의 러시아나, 서쪽의 프랑스 중 하나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주요 외교 과제로 삼았다. 허나 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는 민족주의에 근거하여 제국의 무제한적인 팽창을 기치로 내걸고, 대외진출에 주력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영국은 러시아, 프랑스와 손을 잡고 삼국협상을 이루었으며, 독일은 삼국에 포위당해 고립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비스마르크가 평생에 걸쳐 이룬 독일 중심의 세력균형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 와중 발칸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으로서 ‘유럽의 화약고’란 이명을 얻었다. 분쟁의 중심축은 복잡한 민족구성에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은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며 발칸 소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대적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주장했다. 열강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자국의 패도를 정당화했고, 유럽 민중들은 이에 포섭되어, 민족주의로 무장한 침략적 제국주의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이윽고 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의 양상은 비스마르크 때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비스마르크가 우려했던 양면전쟁이 진행되었으며, 독일은 수많은 적국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신속한 진격을 원했던 독일군은 참호전의 수렁에 빠졌으며, 킬 군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독일제국은 전복된다. 비스마르크의 신중하고 다자적인 세력균형 외교의 궤를 벗어난 대가였다. 패배의 기반은 이러했다. 빌헬름 2세는 해군 강화를 통해 해상패권국이었던 영국의 위상을 위협했고,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저지하여 반감을 샀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때의 수모에 칼을 갈고 있었다. 이를 비스마르크가 목도했다면, 이합집산의 전통적인 유럽세력균형체제를 깬 빌헬름 2세의 정책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이 유럽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깨고 경쟁에 뛰어드는 순간, 그의 조국이 주변의 열강들과 반목하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제국은 주변국의 협조와 동맹 속에서 건설된 신생국이었고, 중심추인 주변국의 지지와 원호가 없어지는 순간 기울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대의 민족주의가 팽창주의로의 전환된 것 또한 그에겐 개탄할 만한 일이었다. 이는 독일제국의 침략야욕에 불을 붙여 타 국가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독일이 전체주의의 광풍에 휘말리도록 했다. 국민들은 좌절감에 찌들었고, 대공황으로 경제는 피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전체주의가 대두하여 파시스트가 로마로 진군하고, 독일에서는 폭력시위와 정치투쟁으로 무장한 나치당이 세를 얻었다. 이윽고 총선에서 이긴 나치당은 바이마르 체제의 해체를 주장했다. 또한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인종주의를 주창했다. 급기야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전쟁 초기의 양상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치독일은 사실상 프랑스를 점령했고, 괴뢰 정부를 세웠다. 영국군은 됭케르크에서 가까스로 퇴각했고,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허나, 이는 결국 양면전쟁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소전선은 사실상 고착화 되었고, 북아프리카 전역 역시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사실상 나치독일의 패전은 확실시됐다. 패전의 이유는 1차 세계대전과 유사하다. 나치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패권주의로 주변국을 대부분 적으로 돌렸고,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으며, 러시아를 적대했다. 양차 대전은 사실상 독일의 외교적 고립 상태에 행해졌다. 노골적 팽창주의가 독일의 고립을 이끌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전체주의 등의 사상이 이용됐다. 허나 비스마르크가 내건 기치는 전통적 세력균형과 동맹-협상 등 다자적 외교였으며, 오히려 타국의 고립을 유도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로 미뤄보아 양차 대전 시기 독일의 행보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는 대립하는 입장에 있으며, 비스마르크가 이를 목도했다면 그는 회의적인 의견을 내비쳤을 것이다. 고로 비스마르크가 당시의 독일에 무언가 조언을 했다면, 이리 말했으리라.“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라. 적극적인 팽창정책보다 세력균형을 유지하여 지속적인 이득을 취하라.”
냉전과 치킨게임

냉전시대 미·소는 상호확증파괴 전략, 즉 상대방이 핵공격을 해 오면 아군도 핵을 이용해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처럼 핵무기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므로, 핵전쟁에 있어서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핵무기는 권력자원 중의 하나인데, 이때의 권력은 타인, 혹은 타집단이 추구하는 것이나 소유하는 것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타집단의 행동양식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이른다. 특히 핵무기에서 비롯되는 권력은 물리적인 것에서 비롯되지만, 심리적인 압박을 주는 것이 목적이고 핵 자체의 파괴력은 수단일 뿐이라는 특징이 있다. 미·소, 혹은 핵을 소유한 그 어떠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라도 핵을 가진 상대국의 의도를 측정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허나 사람의 예측에는 한계가 있고, 각국의 수반은 서로의 의도를 모조리 꿰뚫어 볼 수는 없다. 여기서 핵 문제의 어려움이 비롯된다.


이를테면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세우자 미국이 반발하여 쿠바를 봉쇄했고, 양측은 대립각을 세우고 서로를 위협했다. 분쟁은 점점 악화됐고, 핵전쟁이 눈 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이때 각측 통수권자의 고민은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치킨게임이다.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서 차가 달려오고 있고, 서로 양보 없이 맞부딪히는 순간 핵전쟁이 발발한다. 상호 공멸의 위험을 전제하고 벌이는 위험한 게임이 바로 치킨게임이다. 이때 각국의 지도자들은 계속 달린다면 모두 죽게 될 수 있다는 최악의 결과와, 옆으로 회피하면 겁쟁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차악의 결과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만약 상대가 먼저 비껴가 핵전쟁을 피하게 된다면 이것은 최선의 결과이며, 큰 정치적 이점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핵을 두고 다양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을 두고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어떻게하면 자국이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고심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차선의 경우를 택했다. 소련은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켰고, 미국도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했다. 양자 모두 회피를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협상을 통한 균형으로 생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점을 얻어냈다. 이처럼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핵 갈등 상황 속에서 정치지도자의 어려움이란 어떤 것이 올바른 대응인지 판단하는 것이리라. 만약 그들이 내린 판단이 오판일 경우, 그들은 상호공멸이나 국가적 망신 중 하나의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냉전이 오직 극단대립의 장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쿠바사태 이후, 공멸의 위기를 느낀 양국이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이다. 닉슨 정부가 들어서자, 이러한 기조는 더 심화됐으며, 화해와 긴장완화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양측은 서로의 차이를 규제하고 궁극적으로 경쟁으로부터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으며, 평화체제로 나아가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어떻게 됐을까? 이를 알기위해 ‘죄수의 딜레마’라는 이론을 예로 들어보겠다. 공범자 2명이 동시에 잡혀 각각 다른 방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 죄수들이 함께 협력하여 범죄사실을 숨기면 둘 다 형량이 낮아지고, 상대의 범죄를 폭로하면 폭로한 죄수의 형량이 낮아진다. 허나 이때, 둘다 상대방의 범죄를 폭로하면 둘 다 무거운 형량을 받게 된다. 즉, 공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가 데탕트 시기 미·소 양국의 지도자에게도 찾아왔다. 서로 협력할지, 아니면 경쟁을 택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서로 협력하면 양측이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경쟁을 택할 경우 자국이 일방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양측 지도자의 뇌리를 스친 의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당장은 협력을 택했고, 실제로 동서독 국제연합 동시가입, 유럽안보협력회의 35개국 정상회담 등으로 데탕트는 점점 고조됐다. 양측은 서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듯 했다. 허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군사개입으로 인해 데탕트 분위기는 끝끝내 깨어지고 다시금 양국관계는 대립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죄수의 딜레마에선 상대방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자백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두 죄수 모두 묵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즉, 협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로를 믿지 못하면, 두 죄수는 상대가 자백을 해서 혼자만 벌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워지고, 결국 서로를 배신하여 두 사람 모두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두 죄수는 결국 서로 협조했을 때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미·소 양국은 서로를 믿지 못했고, 결국 파괴적인 경쟁체제로 재돌입하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는 자국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온다. 데탕트 시기 양국 지도자는 자국이 상대국을 홀로 배신하는 경우, 그것이 자국에 훨씬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전망, 또 상대국이 자국을 배신하는 경우, 자국 또한 상대국을 배신하는 것이 자국에 이득이 된다는 전망, 이 두 가지 부정적 경우를 염두에 두고 갈등했을 것이다. 상호 신뢰의 부재 속에서, 양측에 가장 좋은 결과보다 이기적인 수를 강구하는 이러한 태도는, 결국 양측 모두 손해를 보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치지도자들은 서로의 신뢰를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국 이익 중심적 사고로 상대국의 의도를 가늠하다가, 공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데탕트 시기의 각국 지도자들은 공동이익과 자국의 이익, 경쟁과 대립, 공포와 평화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고, 숱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국의 예상과 실제 상대국의 의도가 다른 경우, 지도자들은 뼈아픈 실패를 겪기도 했고, 이득을 봤다고 해도 상대국의 경계심을 대폭 증가시키곤 했다. 이처럼 당시 정치적 결정을 하는 것은 여러 가치, 짐작, 이해관계가 뒤섞여있는 복잡다단한 문제였으므로, 심사숙고하여 판단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데탕트는 1979년 깨어지고 만 것이다.
다만 신냉전은 그다지 오래가진 않았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한 후, 소련은 개혁·개방의 스탠스를 취하게 된 것이다. 양국은 이념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했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공동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세계는 탈냉전의 시대를 걷게됐다.

집단 자위권
집단적 자위권이란 타국이 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국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될 시 이에 대응하여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에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한 논쟁이 있다. 2014년 아베 신조 내각은‘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결정문에 의결했다. 그동안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부인해왔던 평화 헌법의 해석을 공식적으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이로서 일본은 타국에 파병할 권리를 얻게 됐고, 한·중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일대 소요가 일었다. 특히 이는 동북아의 세력균형에 크나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었으며,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전수방위의 원칙에 따라 군사적 활동에 제약을 받아왔던 자위대의 활동 재량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자위대의 임무수행 범위가 해외로 확대될 수 있고, 자국 방어 뿐만 아니라 우방국 군대의 방어·지원 임무 또한 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격적 작전 수행까지도 가능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본과 과거사 문제가 남아있고, 영토분쟁의 씨앗이 심어져 있어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다. 중국 또한 미국의 우방인 일본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허나 이에 찬동하는 국가도 있다. 미국은 일본의 작전권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서방국가들은 일본의 집단자위권에 대체로 찬성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북아 국가 간의 정치작용이 세력균형의 원리에 부합하는 양상이라는 것의 근거는 이렇다. 활동영역이 넓어진 자위대가 군비를 확충하면, 그 전력이 강화된다. 사실상 일본은 온갖 구실로 자위대의 전력을 꾸준히 강화해온 바 있으므로, 현재도 타국의 정규군 못지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한·중은 자위대가 국방군으로 치환되며 그 전력이 급속도로 증강되는 사태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중국은 한·일에 비에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외교를 주도할 수 없게 되고,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 포위망의 압박이 더욱 강력해져, 중국의 국익에 심각한 손상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의 아베는 대만에 있는 자국민들을 수호하기 위한 집단자위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곧 ‘하나의 중국’체제를 무시하고 대만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중국의 국가적 영향력에 손해를 입힌다. 고로 중국은 자국의 이익과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의 집단자위권에 극렬히 저항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자위대에 비해 해군력이 열세하므로, 일본이 군비를 확충하면 해군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고, 또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작전 범위가 넓어진 일본의 입김이 더욱 거세질 수 있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작용은 모두 한·중·일간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동북아 정세의 불안정성을 줄이려는 양상을 띄고 있으므로, 세력균형의 원리에 부합한다.
허나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과 더불어 한국의 중요한 동맹이며, 적어도 중국보다는 비슷한 체제를 공유하고 있고, 문화적·인적 교류가 활발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일본의 군사작전 수행범위 확대와 전력 강화는 공통의 적인 북한과의 대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한·미·일 삼국동맹의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위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중국의 패도 견제에 유용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여 동맹을 강화한 다음, 중 VS 한·일의 이원 대립으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 실리적인 측면에서 더 나을 것이다. 한국은 THAAD문제 등으로 중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고, 중국의 압박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발동은 유사시 한국의 국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얀마 사태
한편,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가 대대적인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 산 수 치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얀마 헌법 상 미얀마군 통수권자는 미얀마군 총사령관이고,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간섭할 재량이 없어서 사실상 문민통제가 행해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쿠데타는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었다. 군부는 권력을 장악한 후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무력진압을 시도했고, 심지어는 총격까지 가했다. 이에 서방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군부의 쿠데타에 우려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미국은 비인도적으로 시위를 진압한 군부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허나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의 국가는 사실상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냈고, 특히 중국은 쿠데타를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의 성명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번의 미얀마 사태는 국가 간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면모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미얀마와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고, 사실상 미얀마는 인도양과 중국본토가 직결되는 육로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중국은 미얀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며, 자국의 이해득실에 크게 상관 없는 미얀마 내부의 사정은 별개이다.
허나 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민주주의 질서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는 미얀마 군부의 독재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군부의 민주주의 탄압에 제재를 걸어야 한다.
고로 양국은 입장은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사태는 사실상 조 바이든의 대중국 견제 외교정책의 첫 시험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사안이며, 중국과 미국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미얀마 사태를 두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든 유무형의 정치적 활동이 바로 국가 간 패권경쟁, 혹은 힘의 투쟁의 한 단면인 것이다.
이상주의적인 측면에서 보아, 미얀마 사태에 대해선 보다 적극적인 제재와 개입이 필요하다. 미얀마 군부의 시위 진압으로 인해 이미 시민 수백명이 학살당했고, 그 대상에는 어린이와 여성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번 사태는 더 이상 체제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며, 보편적인 인권의 심각한 침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자국중심의 이익우선주의에 경도되어 미얀마 사태에 대해 사실상 찬동에 가까운 묵인의 태도를 내비치고 있으며, 이는 인도적으로 비춰보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로 이번 사태는 미국 및 서방 세계 대부분의 지배적 의견에 따라 폭력사태를 신속히 멈춰야만 한다. 또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대로 방임할 경우, ‘세계의 경찰’임을 주장해왔던 미국이 독재나 인권유린을 해소할 동력이 더 이상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 미국의 영향력이 사실상 축소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선, 미얀마에 대한 적극적 제재가 필요시되는 상황이다. 고로 바이든 정부가 중국과 미얀마 군부의 패도에 반하여, 올바른 명분 하에 미얀마에 대한 정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있겠다.
중간고사 과제로 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