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전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 굳이 이 얘기로 서두를 연 까닭은 이제 생각이 좀 달라져서 그렇다. 이 글로 내 생각의 변화에 대해 말해볼 요량이다.

먼저 밝히건대 지금도 여전히 발전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의 변화라 함은, 역겨움에서 측은함으로 바뀐 정도라고 말해두겠다. 둘 다 오만한 감정이나 온도차는 크다.

으레 발전이 필요한 인간은 약자의 위치에 서 있다. 물론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니 무언가를 꾸준히 하면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극은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서 발생한다. 유감스러운 사실 하나, 이미 잘하는 사람은 이 이상 잘할 필요가 없는데도 꾸준히 발전한다. 그런데 발전 없는 인간(이하 약자)은 제자리 걸음이니 이 둘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약자는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비극의 발단엔 습관, 사고, 행동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약자에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단 얘기다. 발전 없는 인간은 옆에서 보면 화가 난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렇다. 이해만 못 하면 다행이다. 같이 일하면 멀쩡한 사람이 피해도 본다. 발주를 잘못 넣는다거나, 클라이언트 재방문율이 높아 일건지가 늘어난다거나. 그렇게 약자는 주변 사람에게 정당한 분노를 산다. 나는 이 정당한 분노가 가끔 무섭다.

난 약자에게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다. 일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인드가 글러먹은 건 용납이 안 됐다. 약자는 늘 변명 일색이었다.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실수를 재난으로 포장했다. 듣는 사람은 돌아버릴 노릇이다. 반성해도 누그러질까 말까한 마당에 변명이나 하고 있으니. 그때마다 나는 인격모독을 제외한 언어로 조목조목 변명따위를 논파했다. 그러고도 약자는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폐급을 대해본 사람은 다 안다. 얘가 반성을 하는지 마는지는 표정으로 나온다.

직장인 친구들이 모이면 서로 자기 일터의 약자를 욕하는 때가 있다. 하나같이 듣기만 해도 열 오르는 얘기들이다. 그때 언어에 배어나는 혐오의 감정들이란, 괜찮은 술안주다. 그런데 그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늘 응징을 당한다. 군대 폐급썰의 끝은 대부분 징악이 아닌가. 나에게 피해를 준 이에게 망신과 무안을 준다니 얼마나 건전한 응보인가.

그날도 약자 이야기로 화두를 열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동료는 그날따라 달관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혹은 이제 나와 상관 없는 얘기를 듣기라도 한듯 자못 초연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초연했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직했다.

그날 이후로 나의 분노가 부끄러워졌다. 그저 어쩔 수 없노라고. 그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화를 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약자의 삶은 상상이 어렵다. 이해할 수 없으니 멀리하고 싶은 현실이다. 여전히 발전 없는 인간은 싫다. 부끄럽지만 화도 날 거다. 그래도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새끼가 아무리 사람답지 않다 한들 사람일진데 현실은 직시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입지와, 자신의 과오와, 자신의 행동 모든 것. 그렇다면 화를 내도 소용없다. 그래서 난 분노보다 더 거만한 연민을 하기로 했다.

여전히 그는 약자이고 나 아닌 누군가에게 분노를 산다. 내가 그를 달리 대한다 한들 그의 삶은 여전히 발판이 무너지는 나날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약자와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 반 이상 줄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 일방적인 훈계를 대화라 부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약자와 내가 말을 섞는 일은 확실하게 줄었다. 그것이 약자에게 득인지 실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회사 내 폐급에 대한 글을
회사 컴퓨터로 원신 까는 동안 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