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포는 아포토시스 작용이라고 알려진 과정을 통해 자살을 한다.
그 과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유전적인 설계에 따라 자기 스스로 그 개체를 파괴하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제 3의 세포가 결함이 생긴 세포를 인지하고, 그 세포에세 자기 파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작동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 파괴를 실행하지 않는 암세포가 된다.
세포의 자살은 생존을 위해 생겨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동물도 자살을 한다.
코끼리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코끼리의 일부 종은 늙어서 더이상 무리에게 긍정적인 이익을 줄 수 없을 때 스스로 무리에서 떨어진다.
자신의 묫자리를 찾아서 적당한 곳으로 간다.
그 코끼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맹수들의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영양소가 된다.
어느 부족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이 부족은, 일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부족에서 빠져나가 사라진다.
노인은 숲의 어딘가로 떠나, 수면을 취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사회에도 항상 발생하는 일이다.
사회적으로 능력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아이들은 무리로부터 소외된다.
그들은 죽음의 암시 속에서 망가지거나, 죽음을 택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항상 괴로움에 고통을 호소한다.
이들은 끝도 없는 절벽에 매달리거나, 스스로 그 손을 놓는다.
나이가 들어 늙은 노인들의 많은 이들이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사회는 더이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사회를 필요로 한다.
단절된 그들은 결국 홀로 질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진화의 과정과 연관이 깊다.
이 현상은 결국 이러한 행위가 종의 보존에 도움이 되기에/되었기에 발생한다.
사회로부터의 고립, 고립의 결과는 매우 본능적이고, 유전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종의 번영을 위해 생겨난다.
고립에 처해진 인간은 끝없이 자기살해의 유혹에 빠진다, 정말로, 정말로 잘 설계된 과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더이상 우리에게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솎아내기를 어릴 때부터 배워간다.
사회적으로 결함이 있는 개체를 무리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배제된 개체는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 무리는 개체에게 스스로 살해하도록 암시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사회적인 행동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아주 먼 예전부터, 인간의 작은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결함이 있는 개체를 도태시키는 집단이 더욱 번성하였으리라.
과거에는 이러한 행위가 종의 번성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인간 사회의 발전이 이어지며, 사회적인 능력이 결여된 이들도 충분히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변했다.
또한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비용이 과거보다 매우 증가했다.
이러한 이들의 본능적인 원인에 의한 자살은, 과거와는 다르게 사회적 비용 관점에서 악하다.
그렇기에 사회는 항상 이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비용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동시에, 본능적으로 그들의 죽음을 유도한다.
본능적으로, 영겁의 진화 속에서 학습된 명령의 실행에 따라서.
그것은 정말 불쾌하다.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이성적이다, 불쾌할 정도로.
나는 오랜 기간 자살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국가는 내게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삶은 행복보다 불행이 많은 것 같은데, 어찌 나를 살게 하는가, 사회는 진정으로 나를 위해 삶을 유지시키는가.
아니면 오로지 나에게 투입된 가치와 내가 생산할 가치에 관심이 있는가.
진정으로 나의 행복과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인륜이 중요하다면, 부디 나에게 편안한 끝을 다오.
하지만, 나의 죽음에 대한 충동이 그리도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원인이라면, 그렇다면 이는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이것은 나의 논리적인 판단인가, 호르몬의 장난인가.
사회가 나의 생산가치를 위해 살려두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별로 죽음에 대한 충동을 가지지는 않는다.
물론 항상 죽음의 이후를 동경한다, 삶의 지속은 고통스러우니까, 당연히 죽음의 이후를 원하게 된다.
아주 유혹적이다.
지금도, 정말, 진심으로, 유혹적인 선택지다.
다만 그것은 억울하니까, 정말로 억울하니까.
고작 유전자의 명령으로 죽기는 싫으니까.
내가 고작 유전자의 기계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