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구속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일개 국회 서기관일 뿐입니다.

들어는 보셨겠지요. 저는 예전에 빈민가의 꽃팔이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브리튼의 평민은 아주 드문 상황에서는 입양이란 형태로 귀족이 될 수 있음.

입스위치 여백작 이사벨라가 바로 이런 특례였음.


이사벨라는 어렸을 때, 동런던 빈민가에서 꽃팔이를 하던 소녀였음.

어떤 이유에서인지 급진파 귀족 진영에 속하는 입스위치 백작가가 그녀를 입양했고,

전 백작이 죽은 후에는 입스위치가의 작위와 영토를 물려받았음.


일반적으론 이런 평민 출신들은 대다수 귀족의 강한 적대감을 받게 되는데,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에겐 평민이 귀족으로 변하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하물며 입양을 통해 계승하는 방식이었음.


하지만 이사벨라는 아주 특별한 예외였음.

그녀의 인맥은 귀족권에서 상당히 유명했고, 서로를 싫어하는 신흥귀족이나 대귀족과

동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 거만한 급진파 귀족들조차 그녀를 예우했음.


이런 대우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인세에 재림한 달의 여신으로 칭송받는 이사벨라의 미모 때문이었음.

그녀의 미모는 웰링턴 공작이 사랑하는 딸 "황금공주"에 필적했음.


두번째는 재치가 넘치고 겸손한 것이었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주도면밀한 교묘한 수완으로 갈등이 첨예한 국회의 귀족계파들 사이를 노니는

역대 최연소 국회 서기관이기도 했음.


절대다수의 귀족들이 보기에, 그녀는 언변이 뛰어나고 유능한 미인이었고,

남의 환심을 사는 데 아주 능해서 누구나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음.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녀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음.

넋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운 미소 뒤에는 차가운 이성과 강철 같은 결심이 있었음.


브리튼 제국 전체에서 오직 드라이아이스 괴테 재상만이 이사벨라의 진실을 알고 있었음.

그는 시니컬하게 말했음.


"그 어리석은 자들은 그녀가 탁자에 장식된 꽃병인 줄만 알고,

꽃병의 화려한 꽃들이 독침으로 가득한 것은 모르지.

그들은 이미 독침에 찔려서 독이 골수에 침투했는데도 의기양양해하며 전혀 모르고 있어."


드라이아이스 재상은 제국 국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암암리에 조종당하고 있고,

그 손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국회 서기관 이사벨라에게서 온 것을 발견했음.


국회 서기관은 주로 국회의 의사일정을 조율하고 배정하는 업무와

국회 기록의 보존 등 문서작업을 담당했음.


딱히 빛나는 직책도 아니었으므로, 이사벨라는 이 직책을 얻을 수 있었고,

그녀의 절세의 미모로 인해, 많은 귀족들은 그녀를 국회에 놓아둔 눈요기용 꽃병으로 삼았음.


하지만 이사벨라는 파벌 다툼이 극심한 국회에서는,

국회 의사일정의 배정에 참여하는 국회 서기관이 비할 데 없는 가치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눈치챘음.


이사벨라는 그녀의 총명한 재능과 지혜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회의 의사일정을 좌지우지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회의 투표 결과를 조작함으로써 국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그림자의 여왕"이 되었음.


이사벨라가 이렇게 큰 힘을 가진 이유에는 그녀의 총명함 외에도

그녀의 비밀스러운 출생이 관계가 있었음.

이 모든 비밀이 드라이아이스에게 알려진 것은 이사벨라가 한때 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임.


오래 전에 드라이아이스 재상은 나라를 위한 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뜻을 이룰 길이 없어 근심하던 청년이었고,

국회를 지배하는 그림자 여왕 역시 천진무구한 꽃팔이 소녀였음.


청년과 소녀는 같은 집에서 살았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의남매였음.

동런던의 빈민가에 살면서, 양친과 이웃의 보살핌으로 청빈하지만 평온한 생활을 했음.


그러던 어느 날, 꽃팔이 소녀 이사벨라가 갑자기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에게 끌려갔음.


원래 그녀는 전 브리튼 군주의 사생아였음.

이 비밀을 알게 된 입스위치 백작가는 그녀를 양부모와 청년 괴테에게서 데려갔고,

장래의 왕위 쟁탈전에서 비밀병기로 쓰려고 했음.


이사벨라를 키워준 대가로, 

괴테는 입스위치 백작가의 추천으로 황궁에 들어가서 말단 왕립 비서관이 되었음.


몇 년 뒤, 괴테는 현 여왕 빅토리아가 정권을 탈취한 쿠데타에 가담해서 큰 공을 세웠고,

단기간에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드라이아이스 재상이 되었음.


입스위치 백작가의 당주와 모든 직계 일족은 몇 년 안에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떠났고,

이사벨라는 입스위치 여백작이 되어서, 국회에 들어가 국회 서기관이 되었음.


괴테는 이사벨라가 전 군주의 사생아 신분을 이용해서

여왕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대거 농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


그 귀족들은 모두 자신이 전 군주의 사생아라는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사벨라의 허수아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음.


이사벨라는 괴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브리튼이라는 나라 뿐이고,

브리튼을 위해서는 민중이나 귀족, 심지어 여왕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음.

여왕에 대한 그의 충성은 거짓에 불과했음.


이사벨라와 괴테는 서로의 작은 비밀을 잘 지켜나갔지만,

그들은 맹우가 아니었고, 이사벨라의 입장은 괴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음.


"여왕 폐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왕권이 중요하셔.

웰링턴 공작은 정직하고 청렴하지만 결국은 귀족이야.

괴테…… 그의 눈에는 국가 밖에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누가 연약하고 무력한 평민을 위해 생각할 수 있지?"


이사벨라는 언제나 자신이 동런던의 거리에서 왔던 것을 잊지 못했음.

그녀는 호의호식하며 생활했지만,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빈민가에서의 따스한 삶과 안녕이었음.


그녀의 유일한 목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권력투쟁이

통제력을 잃고 백성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음.


그녀는 의회를 은밀하게 지배하는 권리를 이용해서,

브리튼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음.


그럼 점에서 이사벨라의 목적은 빅토리아 여왕, 드라이아이스 재상과 일치했음.

하지만 이는 권력의 균형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대전제 아래에서 성립된 것이며,

균형이 무너지면 각자 지키기로 결심한 것을 위해 싸울 것임.


이사벨라의 마음 속에서 괴테는 언제나 특별한 존재였음.

하지만 그녀도 괴테가 사랑하는 것은 나라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음.

자신은 동런던 빈민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음.


두 사람은 모두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원했지만,

설령 서로 더할 나위 없는 적수가 되더라도 다른 길을 선택한 것임.



==========



참고로 '드라이아이스'는 이름이 아니라 괴테 재상의 별명임.

딱 별명에 맞는 성격이라서 귀족층에도 평민층에도 호감을 못 받고 있음.

본인 행보를 보면 그런 거 상관 안 할 위인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