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카


"어? '인피니티'의 파일럿이냐고?

응……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피니티는 내 손발이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었어.

내가 인피니티고 인피니티가 나야."


타카하시 중공은 수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카와 그녀의 전용기 "인피니티"도 겹겹이 쌓인 장막의 최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음.


요정을 연상시키는 이 소녀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타카하시 중공 특제의 드론기체 "인피니티"를 위해 만든 전자인형, 코드네임 Doll-05였음.


"인피니티"는 타카하시 중공이 개발한 여러 기체 중에서도 최첨단이자 최강의 기체였음.

융합이온포, 슈퍼바주카 미사일, 대량의 부유포 등의 신형 무기를 장비했음.


무슨 기술을 사용한 건지, 이 기체가 전투할 때 나오는 부유포는 탑재된 것보다 훨씬 많았음.


단독으로 군대 하나를 없애버릴 수 있는 광역섬멸전 능력을 가진 이 강철의 괴물은

타카하시 중공의 거대한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


이렇게 강력한 기체는 평범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음.

인간의 뇌는 대량의 부유포를 조종할 때 발생하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지 못했고,

몇 초 안에 정신붕괴에 빠졌음.


하루카는 이러한 "괴물"을 조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전자인형이었음.

인간에 비해 전자화 된 뇌를 가진 전자인형은 인간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정보처리 능력을 가졌으며,

거기다 특수하게 만들어진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뚜렷한 의식으로 기체를 조종할 수 있었음.


완전히 "인피니티"를 위해 태어난 하루카는 이 기체의 파일럿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 기체에 달린 전용부품의 하나라는게 더 정확했음.


"바깥에는 바다라는 곳이 있는데, 끝이 없는 소금물이라고 책에 나와 있었어.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가보고 싶어."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하루카는 이렇게 대답했음.


위장을 거쳐서, 명확한 신분과 사회적 관계가 있는 Doll-01과는 달리,

하루카는 배양조를 나온 뒤에 줄곧 실험시설에 머물렀으므로, 지금까지 시설을 떠난 적이 없었음.


그녀에게는 연구자 외에도 애완 고양이가 함께하고 있었음.

고양이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하루카의 성격은 폐쇄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답지 않게, 전혀 어둡지 않았고,

오히려 고양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제멋대로였음.


테스트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매일 늦잠을 잤고, 잇달아 입양한 고양이떼와 놀면서,

크고 작은 눈동자를 가진 그들의 털을 어루만졌음.


갑갑한 연구시설에서, 장난끼가 많고 사랑스러운 하루카는 한 줄기의 청량한 바람 같았고,

연구원들의 사랑을 받았음.


하지만 먼 훗날의 존재 목적을 떠올리고,

때 묻지 않은 그녀의 미소를 보면 누구나 가슴 아파했음.


무기가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느냐는 연구자들의 의문에

하루카를 만들어낸 "아버지" 미즈하라 이치로(미즈하라 리사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음.


"파일럿은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이 무기여야 해.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순수한 무기는 언젠가 총구를 우리에게 돌릴 거야."


어쩌면 일종의 궤변일지도 몰랐음.

그래도 미즈하라 이치로는 하루카에게 자유 말고는 인간과 같은 삶을 주었음.


기본적으로 하루카가 요구하면 반드시 들어줬고, 귀여운 것을 좋아했으므로 방에는 인형이 가득 쌓였음.

물론 많은 고양이들도 있었음.


자유가 뭔지도 몰랐기 때문에, 하루카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했음.


"응……. 밖에 나가 보고 싶지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고.

아빠하고 인피니티, 고양이만 있으면 나는 불평할 게 없어."


하루카는 자신이 전자인형인 줄도 몰랐고, 운명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 여전히 행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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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는 인피니티의 콕피트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카의 방=인피니티의 콕피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