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십련, 뒤져라!

하고 줘패거나 욕을 박으면


보는 이에게

'아, 이 사람은 캬루를 싫어하는구나'

정도의 감상만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는 안된다.





좋은 캬혐은

'카루를 싫어한다.'

라는 정보보다는



보고만 있어도 슬퍼지고

너무 불쌍해서 안아주고싶은 느낌이 들도록.

캬루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고통받을지에 대해 보는 사람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정적 공감'을 느끼게 하는 게 더 슬프다.


캬루가 처한 상황에 측은함을 느끼도록.



캬루가 미워! 가 아닌,

불쌍한 캬루...가 더 바람직하다는 것.






가벼운 설명을 곁들이면 더 좋다.






이 캬혐짤은 직접적인 캬혐이 드러나있지 않다.

캬루가 하늘에서 웃고 있는게 전부.


하지만 설명문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이 캬루는 살고 싶다는 생물의 원초적 본능조차 거스를 정도의 고통스러운 삶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불쌍한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어떤 슬픔이 캬루에게 있었을까?'

하는 고뇌와 의문을 던짐으로써 그녀가 처했던 상황을 상상하고 살을 덧붙여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캬혐을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

그게 좋은 캬혐이다.









그리고 그걸 글로 적으면 캬혐문학이 된다.














캬루의 인생은 너무 어둡고 비참해서 사람과의 인연이랄 게 없었다.

그나마 시궁창에서 죽어가던 걸 구해준 패동황제 정도겠지만, 그녀조차도 캬루를 일회용 배터리 정도로 취급할 뿐이었다.

캬루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끝없는 외로움 끝에 겨우 이어진 인연 한 줄기를 놓지 못했고, 그런 삶이나마 만족하며 이어나간다.


패동의 명령으로 미식전의 멤버들과 이어지고, 캬루는 생애 처음으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보게 된다.

동등한 관계라니,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운명은 다가온다.

캬루의 행복은 끝날 시간이다.


패동이 쓰러지고, 캬루에겐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다.

뭘 해도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선.


...

이렇게 살 가치가 있을까?


캬루는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침묵만이 답해준다.


혐오와 냉대.

캬루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동료들...이라 불렸던 주인님들이 돌아온다.


캬루는 문 앞에 엎드려 자신을 발닦개로 써달라 청한다.

그 덕분인지, 오늘은 제 주제를 안다고 때리지 않았다.




비참함.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바닥까지 끌어내려 노예를 자청한다.

제 주제를 안다고 칭찬받은 것이 너무나도 기쁜데, 너무나도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의문에 의문을 더해봐도 나오는 것은 비참한 현실뿐.


바꿀 수 없는, 차가운 현실.

캬루가 살아가는, 하나뿐인 인생.



누구나 하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는 행복하고 활기차게.

누구는 평온하고 잔잔하게.




그럼 캬루는?






비참하고


천대받고


멸시받고


내쳐지고


싸늘하고


혹독하고


외롭게.





그렇게 살다 모두에게 잊혀지겠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묘비를 세울 가치조차 없는 인생.



캬루는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