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결렬되었소."




지휘관의 차가운 한마디에 라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휘관 님, 단 1600 크리스탈이에요. 이 정도는 주셔야 저도 살아..."




"씨끄럽군. 라나 당신은 본인의 가치를 계속 증명할 수 있으시겠소? 동생 분이신 리아나 양 처럼?"




지휘관은 라나의 몸을 위아래로 스윽 훝어봤다.




뭐, 전자 피규어 정도의 가치는 있겠지.




'하지만 관상용일 뿐, 나의 전장에 그녀의 자리는 없다.'




서밋 아레나 토너먼트를 노리는 지휘관에게 라나는 그저 퇴물 각성자일 뿐이다.




라나는 항변했다.




"하지만 제 투력은 1~3위를 오갑니다. 딜에는 자신이 있어요."




"그거야 마녀빨 뻥투력이고."




성능충 새끼...




점점 지휘관을 설득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라나는 머리를 숙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냉정한 말이 그 위에 쏟아져 내렸다.




"거기다 당신은 오토로 지휘하면 3칸 딜을 처박는 능지처참이지 않소."




그건 라나의 잘못이 아니였다.




각성자들을 엘사리아로 불러낸 수수께끼의 소환사 '왕이'가 자신을 그렇게 소환했기 때문이다.




그녀라고 닥치고 3칸딜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럽지 않았겠는가.




라나는 오토 시 왜 3칸딜인지 왕이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검은 후드를 눌러쓰면서 조용히 답했다.




프로그래머가 병신들이라 그렇다고.




프로그래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왕이탓은 아닌 모양이라 더 따질수도 없었다.




라나가 관짝에 들어간지 수백년이 흘렀다.




역사의 희미한 기록으로 남겨진 그녀를 불러내고, 세상의 공기를 다시 맛보게 해준것도 왕이였으니까.




거기다 전성기 시절의 육체까지 주었다.




그런 왕이에게 남탓충 새끼라고 더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오토 지휘로 당신을 고용해도 시간이 너무 걸려서 별로더군. 그래서 요즘 빙룡은 그냥 빵을 더 주고 소탕해버리지."




"... 그냥 저를 고용 하시는게."




"나는 앰생백수들 처럼 시간이 많지 않소."




때문에 라나는 AUTO 비경에도 거의 출장을 나가지 못했다.




라나는 점점 절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려는 지휘관을 붙잡았다.




"그래도 저만한 마딜러는 없지 않나요?"




"레이첼 양이 있소."




"마딜러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니오. 충분하오. 레이첼 양은 딜도 딜이지만 자체 강화 복음, 아군 체력 회복과 디버프 해제, 지형 무시, 거기에 3대 길드인 전설 길드 소속이오."




서밋 아레나에는 3대 대세 길드가 존재한다.




전설의 저편, 빛의 기원, 그리고 유스케의 등장으로 차후 떡상이 예상되는 시공의 중심.




하지만 라나가 속한 공주 길드와, 어둠 길드도 그렇게 약체는 아니다.




"저도 보젤과 루나의 초절을 받으면... 블랙홀도 있고."




"모르시겠소?"




지휘관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보젤과 루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초절을 들지 않소."




"......"




지휘관은 등을 돌렸다.




"내 크리스탈은 좀 더 강력한 각성자와 계약을 맺기위해 준비해 둔 것이오. 다시 말하지만 협상은 끝났소."




라나는 속으로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존버충 새끼...










***










"좋아요. 라나짱. 계약을 연장하죠."




"감사합니다. 지휘관 님."




라나는 한숨을 돌렸다.




재계약에 성공해서 다행이긴 한데, 저놈의 짱짱 거리는거 짜증나니까 좀 안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계약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뭔가 불길한 예감에 라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후욱, 라나짱 이 옷도 입어주지 않겠냐능..."




그러면서 지휘관은 메이드 복을 꺼내 흔들었다.




딱 봐도 치맛단이 짧은게 여차하면 속옷이 보일지도 모르고, 등짝은 깊게 패여 있는게 변태적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복장이었다.




"......"




라나는 허리춤에서 황금색 시계를 꺼내 열어보았다.




왕이에게 받은 여신의 은혜의 남은 시간은 28일.




이걸 갱신시키지 못하면 라나의 육체는 한 줄기 모래처럼 바스라져 버린다.




한달도 남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라나는 한숨을 내쉬고 메이드 복을 받아들었다.




무슨 재질인지는 몰라도 매우 부드러운 천이었다.




...십덕은 돈이된다.




"지휘관 님... 스킨권은 188개 입니다. 아시죠?"




투실투실한 몸의 지휘관이 입을 비쭉 내밀었다.




"아니, 넘 비싼거 아니냐고."




라나가 폭발했다.




"아니 씹, 그럼 니가 수영복입고 몬스터 처잡아 보던가."




"그건 좀... 말이 심한거 아니냐능. 당신 눈이 무섭다능. 알았어 알았어, 사면 되는거 아니냐능!"








***










"공주 제 2길드 셀천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셀파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라나는 고대 왕국 왕녀 출신의 손을 맞잡았다.




사실 셀파닐은 성능충 지휘관들에게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각성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신적으로 셀파닐에게 재화를 투자하는 지휘관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손도 컸다.




때문에 재화가 풍족한 셀파닐은 카콘시스 왕국 스타일의 공주 2길드 건물을 세우고 그곳의 대표가 되었다.




광신도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길드명은 셀천지로 정해졌다.




"믿습니까?"




"셀멘."




"어서오십시오. 라나님. 공주 길드 소속이시군요."




음침한 눈빛의 지휘관들이 라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공주 길드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특히 서밋 아레나는 어디 근본도 없는 시공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와서 설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때일수록 저희 공주연합 셀천지가 힘을 모아서 대항해야 할 때 이지요."




셀천지 지휘관들이 뭐라 뭐라 수근거렸다.




"그런데 라나님은 어떻게 여기에?"




그들의 음침한 목소리에 라나도 목소리를 내리 깔 수 밖에 없었다.




"루나 님은 초절드는걸 싫어하셔서... 고민 끝에 왔습니다."




"그분도 성능충 지휘관들의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간 어리석은 각성자일 뿐이지요."




"안타깝군요."




"루나님 초절은 퍼센트로 고뎀을 먹이는 아주 강력한 성능을 지니고 있지만... 빛의 기원 쪽으로 마음을 굳히신 거 같더군요."




"아아, 그분이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셀천지가 아니라 루천지가 되었을텐데 아쉽군요."




"??"




한 지휘관의 철없은 소리에 셀천지 지휘관들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무엄한 놈!"




"저 저거, 성능충이다. 셀천지의 가면을 쓰고 침입한 가짜다. 저놈 잡아!"




"셀멘. 이단자을 제압하겠습니다."




음침한 지휘관들이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셀파닐은 한숨을 내쉬고 살짝 흘러내린 카콘시스 왕관을 고쳐썼다.




"저희 지휘관 님들이 좀 이상하신 분들이 많아서 이해 부탁 드릴게요. 라나님. 그래도 나쁜 분들은 아니랍니다."




그때, 라나는 근처에 있던 퇴폐적인 눈빛을 가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깊고 어두운 공허에, 라나는 흠칫 놀랐다.




"이분은?"




"유리아 님 이십니다. 저희처럼 소환된게 아니라 엘사리아 대륙에서 힘을 각성하셨다더군요."




유리아는 말없이 목례를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라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한 때 라나는 보젤의 어둠 길드에서도, 루나의 공주 제 1길드에서도 입지가 탄탄했었다.




그녀의 시니컬한 외모와, 호쾌한 딜량에 지휘관들도 만족을 표했다.




하지만 왕이는 끈임없이 새로운 각성자들을 계속 소환해댔다.




로스터 수는 정해져 있기에, 전장의 판도는 뒤바뀔 수 밖에 없었다.




그 거대한 흐름에 보젤과 루나는 굳이 독자적 길드를 이끌지 않았다.




그들은 초절을 버리고 객원으로 뛰는 유연성 있는 선택을 하여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하지만 라나는 강화없이는 시체나 마찬가지인 몸.




'셀천지...'




라나는 셀천지 교단에 방을 얻게 되었다.




카콘시스 왕국 특유의 고풍스러운 침대에 몸을 던지며 라나는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몸담을 곳은 여기일까?'








***








라나는 오늘도 검은 드레스를 입고 차분히 전장을 준비했다.




하얀 깃털에 검은 벨벳의 망토를 두른 그녀는 한 때 전장의 사신으로 군림했다.




'다 지난 일이지...'




지휘관이 십덕새끼든 성능충이든 개의치 않는다.




전장에만 나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갑주의 기병들이 라나를 짓밟아 버릴 기세로 달려들어왔다.




저 기병에 휩쓸리면 나의 몸은 조각조각 육편으로 흩어져 전장을 피로 적시겠지.




기병들의 엄청난 기세에도 라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했다.




마력이 차오르며 긴 머리칼이 마구 휘날렸다.




짓밟히기 전에, 먼저 부순다.




그것이 마법사가 해야할 일!




라나의 손에서 파직거리는 전류가 튀어올랐다.




"쇼부도코로데스!"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뇌격에 살기 등등하던 황가기병 부대가 모조리 날아갔다.




라나는 최대한 마력을 컨트롤 해 황가기병을 뚫어내고, 기여코 란디우스의 부활을 한 번 빼냈다.




란디우스가 던진 창에 몸이 꿰뚫려 그녀의 상태도 엉망진창이었다.




'아직 괜찮아...'




트윈 브릿지의 파도에 흘러내린 핏물이 빨갛게 번져간다.




당장이라도 의식이 끊어질 거 같다.




평소에 준비가 철저한 그녀답게, 마부를 잘 발라놓아 간신히 살아남았다.




시야가 아득해졌다.




'가시가 뜨지 않아서 다행이야.'




저 멀리서 티아리스의 세인트나이트 부대가 뛰어오는것이 보였다.




그녀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사제들의 치료를 기다렸다.




두근두근.




라나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것을 느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