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앗!”

   대련 중인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기사 무리가 내뱉은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듯한 기합성이 연무장에 가득 찬 흙먼지를 헤치고 울렸다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땀에 절은 그들의 옷과 군데군데 이가 나간 훈련용 철검이 그들의 훈련 강도를 이루어 짐작하게 했다그리고 그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마련된 단상에 앉아 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주홍빛 머리의 중년인이 있었다.

그만모두 삼열 종대로 해쳐모여라!”

삼열 종대 해쳐모여!”

주목!”

주목!”

 중년인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정렬하고 선 기사들을 바라보며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귀관들의 검술에 대한 지도를 시작하겠다우선 부단장부터 앞으로....”

   그러나 중년인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중년인의 눈에 그를 향해 다가오는 푸른 갑옷의 기사가 보였기 때문이다이내 중년인의 앞에 도착한 푸른 갑옷의 기사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중년인에게 예를 취한 후 말했다.

실례하였습니다광룡기사단장님방금 전 단장님의 은퇴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황제 폐하께서 직접 광룡기사단 본부 내성에 도착하셨다는 말씀을 전달드리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 녀석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곧 환복하고 갈 테니 기다려 달라 전해주게.”

   주홍 머리의 중년인광룡기사단장 엘윈은 파란 갑옷의 기사에게 그렇게 말한 후에

모두 주목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로 한다현 시각 이후로 자유시간을 가져도 좋다오늘 은퇴하더라도 오늘치의 검술 지도는 내일 오전에 끝마치고 갈 테니 내일 불참하는 자는 없도록 한다!”

   라고 휘하 기사들에게 지시하고 자신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오늘이 은퇴라니참 세월이 빠르군.”

   환복 후 마련된 자리에 앉은 엘윈이 말했다.

그렇구먼자네와 처음 적으로 만나서 고전했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발가스 장군의 대답은퇴식 이후 마련된 연회 자리에는 수십 년 전대륙을 위진시켰던 전쟁의 주역들이 둘러앉아 있었다청룡기사단장칼자스 대공을 역임 후 베른하르트의 후계로 2대 레이갈드 황제로 즉위한 레온그리고 전쟁 후 레온의 끊임없는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연 황후 라나와 그들의 아들 레온하르트염룡병단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발디아 대공으로 지내고 있는 발가스와 그 아내 에리자그들의 딸 에밀리아흑룡마도사단장이자 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마법사인 헤인레온이 물러난 후 청룡기사단장 직을 승계한 레아드까지덕분에 전쟁 이후 태어난 세대의 현 기사들은 한 자리에 모인 전설들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연회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수준이었다.

이것으로 성검 전쟁 시기의 레이갈드제국의 장군들이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군이멜다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그렇게 갈 줄은...”

그러게 말이에요전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레온이 침통하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아들에게 음식을 썰어 주고 있던 라나가 대꾸했다그 말대로이멜다 장군은 베른하르트 황제에게 해양 영지를 하사받아 공국을 세우고 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려그 자축을 위해 개최한 선상 파티에서 만취한 상태로 물에 빠져익사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자자그런 씁쓸한 이야기는 그만 둬요서로 즐거운 이야기만 해도 모자란 날 아닌가요?”

   침울해진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헤인이 말했다그 말마따나 대륙 통일 이후 각자 황제인 레온과는 교류가 있었지만 서로끼리는 교류가 뜸해 엘윈과 발가스의 경우 거진 10년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헤인의 그 말을 기폭제로그들은 술을 마시며 추억담을 펼쳐나갔다랑그릿사를 손에 넣은 이야기보젤의 당황한 모습죽는 순간까지도 대륙의 평화만을 걱정했던 에그베르트...

   !

   그들의 흘러간 옛 추억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렸을까갓 열 세 살이 된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졸다가 머리를 탁자에 머리를 부딪히고는 졸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며 주의를 두리번거렸다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모두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황태자께서 지루하신 모양이구나에밀리아네가 광룡기사단 본부도 구경시켜 드릴 겸 같이 나가서 놀아드리렴.”

네 어머님.”

   에리자가 에밀리아에게 말하자 에밀리아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연회장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나 안 졸았어요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는 에밀리아가 다가올 때마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에밀리아가 그의 손을 잡자 이내 얼굴이 푹 익어 조용히 걸어나갔다그 모습을 보고는모두가 다시 한 번 작게 실소했다.

좋을 때네.”

 라나가 말했다. 라나의 말을 들은 좌중은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아마도 그들의 모습에 자신들의 젊었던 시절 모습을 겹쳐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에밀리아와 레온하르트가 나간 연회장의 문 사이로, 연회장 바깥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가을꽃이 보였다. 에밀리아와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보고 있는 순간 살랑거리며 불어온 바람에 가을꽃이 사뿐히 실려 레온의 앞까지 날아왔다.

백일홍이로군. 엘윈 자네가 심은 건가?”

   날아온 꽃잎을 집어든 레온이 말했다.

맞네리아나와 처음 만난 날도자네와 처음 검을 맞댄 날도 주변에 피어 있던 꽃이지.”

   엘윈이 가볍게 대꾸했다레온의 구애에 마음을 연 라나와는 다르게 리아나는 더더욱 마음의 문을 걸어잠궜다그들이 처음 만난 마을에 고아원을 차리고쉐리키스레스터아론제시카... 성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던 빛의 후예들의 무덤을 만들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들을 기리며 전쟁고아들을 기르고 있었다굳게 잠긴 마음의 문에 엘윈은 이따금 고아원에 익명으로 기부를 하거나 먼 발치에서 지켜볼 뿐성검 전쟁 이후 그녀와 직접 만나는 일은 없었다.

가을꽃이라는게 생각해 보면 참 신비하지 않나.”

그렇지다른 식물들은 가을이 되면 슬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이파리를 떨구는데 가을꽃은 다른 식물들이 이파리를 떨구는 시기에 더욱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니까.”

   엘윈은 어쩌면 자신들이 가을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대륙의 전란기모두가 소중한 가치에 대해 움츠러들 때 대륙의 영웅들은 분주하게 일어났고원래라면 전란의 혼돈으로 뒤덮였어야 할 시기에 평화라는 화려한 꽃을 피워내었으니까.

백일홍의 꽃말... 인연망설임그리움이라더군.”

그런가꽃말은 그렇게 신경써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인연... 망설임... 그리움... 생각해 보면 우리 레이갈드가 대륙에 평화를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은 자네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가세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만약 자네가 빛의 후예 쪽에 섰다면 지금쯤 레이갈드는 사라지고 빛의 후예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네. 자네는 어떤가? 그때 그 마을에서 나를 만나서 나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을 때 빛의 후예들과의 인연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그 당시의 망설임이나 당시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은 없었나?”

당시의 인연에 대한 망설임이나 그리움이라... 많이 고민해 본 생각이기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잠깐, 자네들?”

   대답을 위해 눈을 감고 고민하다 이내 눈을 뜬 엘윈의 시야에 동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빈 탁자와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이내 그 사물들도 하얗게 세더니 엘윈의 의식은 급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

 

   차가운, 그러나 선선하다면 선선한 가을바람이 엘윈의 몸을 파고들자 엘윈은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심연에 빠져 있던 의식이 점점 수면으로 부상하자 이내 하나둘씩 생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노회한 제국의 광룡기사단장이 아닌, 젊은 떠돌이 검객 엘윈이었고 꿈 속에서 술잔을 쥐고 있던 오른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술잔이 아닌 랑그릿사였다. 레온도, 발가스도, 이멜다도, 에그베르트도, 베른하르트도, 레아드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었다. 레이갈드를 멸망시키고 빛의 여신이 말하는 대로 대륙에 전란을 없애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갈드라는 억제제가 사라진 대륙에는 더더욱 전쟁의 화마가 치솟았고, 엘윈은 전쟁의 불씨를 잠재우기 위해 홀로 떠돌던 중이었다.

   노숙을 하고 일어난 탓일까. 가을바람이 마치 칼바람처럼 느껴졌다. 엘윈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어젯밤 노숙 자리를 펼 당시에는 어두워서 눈치채지 못했으나, 아침에 다시 보니 주변에 백일홍이 흐드러졌다. 엘윈은 비로소 어젯밤 꿈에 나왔던 백일홍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마음 속에... 아직도 미련이 있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엘윈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련이 남아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동료들이 바란, 또한 자신이 베어버렸던 적들 역시도 염원했던 대륙의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지평선까지 꽃길이 이어진 것을 보니 오늘 가는 걸음마다 가을꽃이 서글프게 따라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킨 설명 보고 한 번 이런 거 써 보고 싶었는데

머릿속에 있는 게 글로 안 옮겨진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