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은 분명히 기억했다.


소환 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대전당. 그 대전당 한가운데에 꽂혀 있던 빛나는 검, 랑그릿사를.

생전에 자신이 얻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던 그 검. 결국 엘윈에게 빼앗겼으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휘황찬란한 광채.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

그리고 그 검 주위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기억, 기억, 기억들.



나 레온은 매튜와 아멜다, 그리고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환 의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레니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흠, 나도 엘윈도 라나도 이들의 의식을 통해서 이 세상으로 소환되었단 말인가.


 처음 소환되었을 때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것은... 내가 살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갑옷에, 전혀 다른 무기를 든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소환진 바깥에 매튜와 아멜다, 그리고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레니어도 있었다. 

세 사람은 어둠의 왕자가 부활하여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으며, 내게 어둠의 왕자의 야망을 막는 대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나는 흔쾌히 수락하였고.


 얼마 전, 뒷뜰에 갔다가 그 어둠의 왕자라는 작자가 어느 어린 소녀와 캐치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땐 나도 깜짝 놀랐지만 말이다(그치를 베어버리려던 나를 제지한 아멜다의 설명으로는 저 어둠의 왕자는 세상을 타락시키려는 그 어둠의 왕자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한다).

 성검의 기억이란 건 저런 어둠의 왕자도 소환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 소환될 역사의 영웅은 누구일까.


"자, 그러면 소환 의식을 시작할게요! 모두 뒤로 한 발짝만 물러나 주세요!"

아멜다의 맑은 목소리가 대전당 내벽을 때리고 튕기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전장에 데려갔더라면 뿔나팔 역할은 확실히 해내겠군.


 그렇게 속으로 뇌까린 순간, 성검이 더욱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성검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더니, 다시 퍼져나오는 모양새를 반복하길 두어 번. 


 "아멜다, 부담 갖지 말고 해! 전처럼 소환에 실패했다고 화장실에서 눈물 짜고 그럴 거 없어!"

  그레니어가 아멜다를 향해 외쳤다. 저 친구는 뭐라고 할까... 배려심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심성은 착한데, 조금은 숙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조용히 해! 지금 집중하고 있잖아, 창쟁아!"


앙칼진 아멜다의 반박에 좌중에서 잠시 웃음소리가 일었다. 그 웃음은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가는 빛의 무리가 생겨나자 바로 잦아들었다.

성검의 기억을 담은 빛이 서서히... 사람의 형상으로-여성인 것 같다-바뀌어갔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소환진 한가운데 발을 디딘 것은 아니나다를까 여성이었다.

살짝 헝클어진 것처럼 보이는 짦은 밤색 머리칼에, 호박색의 눈망울, 그리고... 강인한 갑옷으로 몸을 감싼 여성이다.


그녀의 등장에 대전당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재빨리 역사책을 뒤지며 눈앞의 여성과 역대 왕과 왕비의 어진을 뒤지는 사람, "레딘 님이 아니잖아."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 

뭐가 뭔지 모를 그녀를 박수로 맞이하는 사람 등.


아멜다가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살짝 어리둥절한 모습의 그 여성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었다. 매튜와 그레니어도 만약에 있을 영웅이 소환자를 공격하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아멜다 뒤로 뛰어갔다.

(좀 찔리지 않나, 소환되자마자 아멜다의 싸대기를 갈긴 이멜다 장군)


 이윽고 그 갑옷 차림의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당하게 걸어와 우리들 앞, 그것도 내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대 바랄 왕국의 공주 프레아입니다. 반갑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틀림없이 내게 건네는 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내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을 수많은 눈동자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있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


 이 느낌은 뭐지?


생전에 내가 베른하르트 폐하와 대업을 이루기로 결심한 그 날 느꼈던, 이 뜨겁게 요동치는 느낌은 뭐란 말인가?

왼쪽 가슴이 쿡쿡 쑤시는 듯한 감각에, 대답은 고사하고 똑바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내 얼굴은 틀림없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져 있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대답하고 이 상황을 벗어냐야 한다. 이런 상황은... 좀 위험하다.


"레이갈드 제국... 청룡 기사단 단장... 레온입니다."

 "레온 씨로군요. 바랄 왕국의 공주 프레아가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한동안 말이 없으셔서, 혹시 몸이라도 안 좋으신 건가 걱정했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녀는 내 앞에서 미소지었다. 


그녀는 아름답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계속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간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았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누군가 내 팔을 붙들었다. 

강한 악력에 항의하듯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바랄 왕국의 프레아 공주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날씨가 좋습니다. 이렇게 따스한 날에는 혼자서 조용히 호숫가를 거니는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답니다."

방금 소환되어 모든 것이 어리둥절할 텐데, 그녀는 다른 사람을 신경써 줄 여유가 있는 것인가.


 "감사... 합니다."

"아닙니다. 기사님이라고 하셨지요? 제 어릴 적 친구도 기사가 되었지요, 그래서 기사들을 보면 그 친구가 생각나곤 한답니다."

"그러십니까... 저는 먼저 실례하지요."


나는 문간에 서서 뭔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부남 발가스 장군을 지나치며 빠르게 대전당을 빠져나갔다.


곧 그녀는 성검 군단 입단수속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생활하게 될 것이다.


우리와 같이...


나와 같이...



그녀의 맑은 눈망울이,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균형잡힌 몸이 자꾸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한 마리의 청룡이 한 송이의 강철 장미를 품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잡생각을 털어내려 애썼다.



오늘 오후에는 호숫가에서 산책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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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던 글을 쓰다가 뇌절한 보니 이를 주화입마, 용두사미라고 하는구나?  짤도 있어서 이걸 팬아트 탭에 올려야 할지, 문학탭에 올려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몰랑 프레아 너무좋아 프레아 핥핥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