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야, 나야. 문 좀 열어봐" 


선잠에 빠져 있던 마이야는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이미 자정이 넘은 듯 했다.
지금껏 이런 밤에 마이야의 방을 찾은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가.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지만 마이야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꿈결 같은 순간 들렸던 그 목소리는...
"마이야, 자는거야? 에이.."
원래 마이야는 잠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 몇 주간은 정말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녀의 주인,  마를 토벌하고 대륙을 통일한 영웅은 즉위식과 혼인식을 동시에 앞두고 있었다.
그 준비를 위해 마이야는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나날들보다 훨씬 더 격렬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피로에 사무친 결과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마침 그 때 목소리의 주인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이야는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밤중이라 해도 주인과 마주할 때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법.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일 업무를 위해 준비해 둔 복장으로 갈아입고 침구를 정돈하는 사이, 마이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새 너무 피곤했나 봐. 이럴 리가 없는데.'
그 잠깐 사이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뭐야? 만날 새벽이 다 돼서 자면서 오늘은 웬일이래? 나 간다!!"
투덜대던 목소리는 곧 쿵쿵거리는 발소리로 변했다. 어지간히 성질도 급한 모양이었다.
마이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왜 요새 잠이 없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무심하신 분.'
곧 '그'를 맞이하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순간, 심장이 한 차례 쿵 하고 울렸다. 마이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그토록 무심했다.
마이야는 문을 열었다. 그녀의 주인이자, 오늘 밤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이 열리고, 마이야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발소리로 향하고, 발소리가 멎고, 발소리의 주인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발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까워지고 있었고, 커지고 있었다.
그가 달려왔다.


"마이야를 찾으셨습니까, 폐하?"


마이야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곧 반가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와, 자는 줄 알았는데 그새 일어난 거야? 빠르네, 마이야는."
"물론입니다. 저는 메이드니까요. 자, 일단 안으로."
마이야는 남자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문이 닫히고, 작은 테이블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은 남자는 연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엔 처음 오네. 이놈의 궁은 너무 넓단 말이야.
마이야, 차나 한 잔 줄 수 있어?"
"폐하께서 이 방에 직접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아이들을 시켜 저를 부르시면 되십니다."
남자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시녀들 말인데, 잠도 안 자는거야? 무슨 소변 볼 때도 졸졸 따라다니고, 옷도 내 마음대로 못 갈아입게 성화라니까? 여기 올 때도 얼마나 공들여서 빠져나온 줄 알아?"
"그녀들은 제가 직접 고르고 교육한 인원들입니다. 말씀을 들으니 제가 가르친 대로 폐하를 잘 모시고 있군요. 하온데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신지?"
마이야는 그를 위한 찻물을 끓이며 물었다.
"아, 왠지 잠이 안 와서. 별 일은 아니야."
별 일이 아닐 리가. 마이야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뭔가 심각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저렇게 변죽만 울리며 망설이는 남자였다.
"내일 오전부터 즉위식 예행연습이 있습니다. 오후에는 폐하의 결혼식 예행연습이 있고요. 충분히 주무시지 않으면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어지실 겁니다."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고개를 저은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이야의 침대에 털썩 널부러졌다. 잠시 후 마이야는 그에게 찻잔을 건넸고, 남자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마이야는 그 옆을 지키고 섰다.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좀 앉으라고."
마이야는 남자가 손바닥으로 두드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잠시 차를 홀짝이던 남자가 말했다.
"그 친구들, 음식도 맛있고 일도 잘 하는데, 뭔가 부족해. 마이야가 하나하나 보살펴 줄 때랑은 뭔가 달라."
마이야의 얼굴에 설핏 노기가 서렸다.
"이제 보니 그녀들이 일을 똑바로 하지 않았나 봅니다. 다시 엄하게 교육을.."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손을 내저어 말을 끊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좀 허전한 것 같아. 마이야가 있을 때는 항상 혼나면서도 편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얘기라면 물론 할 말이 있었다. 마이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서운함을 담아 남자에게 말했다.
"저에게 직접 폐하를 모시는 일을 그만두라고 명령하신 것은 폐하십니다. 잊으셨습니까?"
"그건 그런데.. 그런 잡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랬어. 마이야는 항상 메이드라고 말하지만, 그냥 하녀는 아니잖아. 그런데 막상 다른 시녀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너무 멀어진 것 같아서 허전해."
"저는 항상 메이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저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폐하 소리 좀 그만하면 안돼? 마이야까지 그러니까 이제 아무도 날 아레스라고 안 부른다고.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마."

남자가 투덜거렸다.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황제이신 몸,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마이야는 침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눈을 흘기던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마이야는 이렇게 나랑 멀어져도 괜찮아? 안 서운해?"
그 말이 왜 그렇게 크게 들렸을까. 아까 문고리를 잡는 순간 울렸던 심장 고동이 다시 들리고 있었다. 둥. 둥. 두둥.
당연히 서운했다. 어릴 때부터 입히고 가르치고 먹이고 키워 온 소년. 이제 가장 위대한 남자가 된 어린 주인. 장성한 남자는 어릴 때의 인연과 멀어지게 되는 법이다. 마이야는 자신이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냐며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 소년 옆에 있고 싶었다.
"..서운합니다."
마이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이야의 종족은 원래 키가 컸다. 때문에 마이야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키가 컸고, 어릴 때부터 보살피던 남자도 항상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남자는 자신과 같은 눈높이를 갖게 되었다.
이 소년은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그래서 말인데, 마이야."
마이야는 뒷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남자가 방문한 목적이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야는 기다렸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남자는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마이야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마이야, 내 후궁이 될래?"
이건 무슨 소리일까. 남들은 시녀들과 궁중의 살림을 총괄하는 시녀장으로 승진했다고 축하를 보냈고, 서운한 감정과는 별개로 승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다시 자신을 직접 보살펴 달라는-남들 눈에는 승진이 취소되는- 명령을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라도 다시 가까이 있게 된다면 오히려 바라는 바였는데.
후궁? 내가? 난 메이드인데? 난 제국의 종족도 아닌데? 난 아무것도 아닌데..?
"페하.. 그게 무슨..?"
남자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마이야가 준 책에서 읽었어. 황제는 부인이 여러 명이래. 우리 아버지는 안 그랬지만,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그냥 결혼하자 그러면 마이야는 도망가 버릴 테니까, 그냥 대충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꼭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걸 직접 할 필요는 없잖아. 귀찮은 일은 다 황후 시켜 버리고, 계속 나하고 가까이 있어 줘."
마이야는 혼란에 빠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지금 대답 안해도 돼. 일단 바쁜 일이 끝나면 결정해도 되니까. 생각해 봐. 나 갈게."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남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마이야와 아레스의 심장 고동 소리는 모든 말을 집어삼켰고, 이성을 휩쓸어 갔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식은 찻물을 한입에 들이켠 다음, 도망가듯이 방에서 나가려 했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아나지 못했다. 마이야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 침대에 다시 눌러앉혔다.
남자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