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낡아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공들여 세운 것을 알 수 있는 한 성에서

한 남자와 한 소녀가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 오랜만에 성에 돌아오니 좋구나. 게다가 오늘은 상차림이 좀 달라. 아주 훌륭하구나.

- 그런가요? 사실 가이엘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 가이엘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네가 온 뒤로 녀석들도 좀 달라진 것 같구나.

- 보젤님이 안 계실 때도 맛있는 걸 많이 해주시는걸요.


- 요 며칠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구나. 심심하진 않았느냐?

- 음.. 며칠전엔 그로브씨에게 화장하는 법을 배웠고요, 어제는 라그씨와 곤충 달리기 시합을 했어요.

- 그로브가 화장을? 잘 가르쳐 주더냐?

- 죽은 자를 살려내도 리얼리티를 위해선 화장이 필요하다고 하시던 걸요? 섬세하게 하시더라고요.

- .. 그로브에게 그런 고충이 있었구나. 더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봐주겠니?

-  안그래도 저에게 본토에 갈 일이 있으면 구해달라고 하는게 있었어요. 본인이 직접 가면 사람들이 무서워 한다고..


- 오늘은 무엇을 하고 보냈느냐?

- 페라키아씨에게 채찍 쓰는 법을 배웠어요. 무작정 휘두르는게 아니라 잘 다루면 남자들에게 인기도 많아질 거라면서. 근데 잘 모르겠어요.

- ..다른 얘긴 없더냐?

- 웅.. 이건 보젤님에겐 비밀이랬는데.. 남자 포로가 들어오면 더 재밌는걸 알려준다고 했어요.

- 페라키아와는 좀 거리를 두는게 좋겠구나.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소녀는 초에 불을 붙이고 남자는 차를 준비하는 모습이 고대의 그림과도 같았다.


- 이번에 다녀오신 일은 어떠셨어요? 힘들거나 어디 다치시거나 하지는 않았죠?

- 걱정 말거라. 빛의 여신과 혼돈의 왕의 섭리 안에 있는 이 몸이 상처를 입을 일은 없단다. 다만..

- 다만?

- 다만 마음이 무겁구나.

- 몇 달 전에도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이번에도 제국의 사람들이었나요?

- .. 눈치가 점점 늘고 있구나

- 헤헤


- 그래, 이번엔 그 붉은 머리의 남자가 제국의 편을 들었단다.

- 보젤님은 유독 그들과 만나고 오면 기분이 안좋으신 것 같아요.

- 내가 외출할 때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 네, 어느 정도는 알아요. 붉은머리 남자의 행보를 두고 보다가 그가 보젤님이나 카오스님에게 가까이 오면 시간을 돌려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거죠?

- 잘 알고 있구나. 그럼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알고 있니?

- 그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언젠간 보젤님께 여쭤보려던 건데...


소녀와 남자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 실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과거의 언젠가 카오스님과 빛의 여신이 한 자리에 모여 내게 말한 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란다.

- 음.. 그럼 그 분들께 여쭤보면 될까요?

- 아쉽게도, 신들은 답을 잘 안해 주신단다.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하구나.


- 그런데 보젤님은 왜 그리도 우울해 하시나요?

- ..

- 알려주세요. 알려주셔야 이 리코리스도 함께 걱정해 드릴 수 있잖아요.


- 핫하하! 네가 그리 말해주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그리 걱정 안해도 된단다. 이 기분도 잠시뿐일테니.

- 그래도 알려주세요. 알고싶은걸요.

- .. 그들이 안타까워서 그렇단다.

- 무엇이 안타까우신가요?

- 제국의 장군들은.. 모두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각자의 시대를 주름잡을 만한 영웅들이지. 거기에 더해서 그 황제에게는 신의 피가 흐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란다. 그런 영웅들이 눈물과 피로 이루어 온 것들을 신들의 변덕으로 무(無)로 되돌린다는건 너무 가슴이 아프구나.

- 그들이 나와 만나고 있지 않을 떄에도 나는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 사정을 모르는 자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영웅일 뿐이지만 그들도 피를 흘리고, 괴로워하고, 눈물을 보인단다. 그들이 나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아파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나는 안다! 때론 그들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회한만이 가득한 이 삶을 끝내기 위해, 그들의 칼끝에 이 목을 내주려 한 적도 있었어!


- 하지만 신들은 내가 편해지려는 걸 보고만 있지 않았지!!


- 보젤님..?



남자는 망연하고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 ..미안하구나 리코리스. 오늘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네게 안좋은 모습을 보이는구나.

- 죄송해요. 그렇게 마음아파하시는 줄 모르고 제가 괜한 걸 여쭤봤어요.

- 내가 미안하구나. 천년의 삶을 보냈으면서도 아직도 이리 미숙하다니. 나는 괜찮으니 이제 그만 울거라.


짧은 침묵이 흘렀다.


- 보젤님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에요. 혹시.. 뭔가 또 마음에 걸리시는게 있나요?

- 아까는 괜한 질문을 했다 하지 않았느냐? 눈물까지 흘려놓고서는..

- 그래도 궁금한건 어쩔 수 없는걸요. 대답 안해주셔도 돼요. 헤헤. 근데 오늘같은 날이 아니면 더 얘기 못들을 것 같기도 하고.

- 영악한 녀석

- 헤~


- 사실 그들을 보면 천 년 전의 사람들이 떠오른단다. 그 금발의 기사는 옛적의 뾰족머리와 분명 연이 있는 자일테고.. 이미지는 좀 다르지만 황제의 강력한 모습은 나의 사촌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 예전의 이야기는 잘 안해주셨었는데.. 역시 오늘 다 여쭤봐야겠네요!

- 굳이 숨길 이야기는 아니란다. 다만, 다만.. 나의 죄에 대한 얘기일 뿐이야.

- 보젤님의 죄..요?

- 첫 오백년은 증오와 분노로, 다음 오백년은 죄책감과 후회로 지냈지. 천 년이 지나서야 그들을 그저 가까운 지인처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미움을 지우는 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 필요하단다. 너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도록 하거라. 

- 보젤님이 있으니 리코리스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거에요!

- 허허, 그래 그래.


두 사람은 잠시 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어둠이 짙어지자 각자의 잠자리로 향했다.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 보다 빛나는 아침. 소녀가 남자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남자는 이미 아침 단장을 마친 뒤였다.

여느 때보다 빛나는 날엔 여느 떄보다 큰 아픔이 다가오는 법


- 일찍 일어나셨네요?

- 네가 좀 늦게 일어난게 아니냐. 내가 있는데도 이러한데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어떨지 눈에 선하구나.

- 그런거 아니거든요! 그저 오늘은 왠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 그건 그냥 핑계가 아니냐 허허허.

- 아이 웃지 마세요. 원래는 안그런다고요, 흥!


남자와 소녀는 웃음지으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깥의 소란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온갖 마물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성에서 사고는 일상인지라 소리를 들었음에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는게 맞을 것이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뒤에는 소녀와 같은 머리색을 한 소년이 검을 들고 있었다.


- 보젤!! 네놈의 목을 치고 동생을 데려가겠다!!

- 오빠! 어떻게 여기에?

- 잠깐만 비켜있어 리코. 금방 끝날거야


소녀는 앞으로 나서며 소년을 말리려 했지만 무언가 말할 틈도 없이 소년은 검날을 세우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검날의 끝은 남자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야 천년의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에 힘을 뺐다.


- !!!


 소녀가 뭔가를 외치자 남자의 눈 앞에까지 다가왔던 소년의 모습이 소녀의 뒷모습으로 바뀌었다. 곧 소녀의 등에서 검끝이 튀어나왔다.


- 리코리스!! 이게 무슨짓이야!!


아레스가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보젤의 귀에는 그저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를 향해 쓰러지는 리코리스의 몸을 무심결에 부여잡았다. 보젤의 마음 한 쪽에서 무언가 깨졌고, 동시에 방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곧 움직일 수 없게 될 한 사람만이.


- 보젤님?

- ..

- 보젤님??

- 리코리스..

- 전 괜찮아요. 이상하게 아프지 않은걸요. 페라키아씨에게 배워둔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 리코리스..

-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말거라

- 오빠를.,., 오빠를 용서해 주세요. 오빠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 어려운 부탁을 하는구나

- 보젤님을 위한 부탁이니까요

- 그게 무슨..

- 미움을 잊으려면 천년이 걸린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보젤님 마음 속에 미움같은 거 없었으면 좋겠어요.

- ..

- 그래, 그렇게 해보겠다. 해 보겠으니 기운을 내거라.

- 보..젤님..

- ..


보젤은 리코리스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문득 아레스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흔들며 보젤에게 달려들었다. 보젤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손을 들어 아레스를 어딘가 먼 곳으로 전이시켰다. 리코리스의 오빠이다. 리코리스의 마지막 말이 아니더라도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소녀는 누워있었고 남자는 생기 없는 소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마치 고대의 그림과도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망연하게 앉아있던 보젤의 시야에 희디 흰 맨발이 들어왔다. 


- 여신이여, 이제 끝내주면 안되겠소?

- 아비를 죽이고 형제를 질투한 죄는 무겁지만, 너무도 긴 시간이지 않소.

- 천년의 고통 뒤에 또 다시 이런 고통을 주다니!! 너희 신들에게 자비란 정말 없는가!!

- 이제 제발.. 제발 나에게 안식을 주시오.. 제발, 이렇게 빌겠소. 제발.. 제발..



[파울]

[벌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벌은 이미 수백년 전에 끝났읍니다]


-그럼 어째서! 어째서 내가 아직 이 곳에 있는 것이오!!


[미안합니다 파울.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당신 뿐입니다]


-그게 무슨.. 목적이라니? 


[수십년 전, 혼돈의 신과 저는 긴 이야기 끝에 이대로라면 세계에 미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시간을 왜곡해서라도 인간이 바른 길을 찾도록 해야 했습니다]


- 그 바른 길이란 건..?


[인간의 힘으로 혼돈의 신도, 빛의 여신도 베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슬픔의 와중에도 보젤은 놀란 눈으로 여신을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엘윈 일행은 이미 올바른 길로 발을 들였습니다. 미안하지만 파울, 한 번 만 더 보젤의 이름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세요]

[이 일이 끝나면 당신은 이 모든 다툼과 관계 없는 곳에서 인간으로 남은 수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젤은 다급하게 말했다.


- 나의 생사는 관계 없소! 이 아이. 리코리스의 삶을 돌려줄 수는 없겠소?

[생명은 그런 식으로 거래할 수 없습니다만.. 당신이 원하니, 소녀의 생명은 이미 돌아왔습니다]

- 고맙소! 정말 고맙소!


보젤은 품 속의 리코리스를 내려다보았다. 피와 상처는 사라지고 이미 가볍게 숨을 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 처럼 리코리스가 눈을 뜨려는 순간, 보젤은 리코리스의 기억을 적당히 지우고 아레스를 전송시킨 곳으로 보냈다.


앞을 보니 여신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 이게 맞는 거겠지. 리코리스.. 고마웠다. 


- 행복하거라.






아이 싯팔 재미도 없고 길기만 한거 술김에 줄줄이 썼네. 좀 쪼개서 쓸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