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시스 제국에게 점령당한 발디아 성에서 도망치다시피 퇴각한 레딘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었던 무력감
전선이 밀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탈출시켰던 이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압박감까지
수많은 부담을 등에 업고 피난길에 올랐던 레딘은 비록 병사들 앞에선 항상 흔들림 없는 모습만을 보였으나,
아무리 빛의 후예라도 아직은 왕자. 세월로 단련되지 못한 그의 정신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이유였을까? 가던 피난길에서 발견한 한 프리스트 여성에게 점점 마음이 끌렸다.
그저 흔히 있던 순례 행렬 중이였던 프리스트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분쟁에 휩싸였던 것도 자신의 행렬에 동선이 겹쳤던 것이 이유였기에. 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을 이유도, 그녀를 잡을만한 동기조차도 없었다.
자신을 떠나 그저 순례를 계속해도 되었을 그녀. 크리스는 예상과는 다르게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옆에 남아주었다.
나암에게서 받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호의(好意 ), 국가나 분쟁, 신하관계같은 복잡한 이해 관계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해서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같이 싸워주는 그녀의 모습은 흔들리던 그의 마음에 파고들기 충분했다.
순결하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모습, 평범한 수녀가 아무 연고 없는 타인을 위해 행하는 자기희생은,
조금씩 레딘의 마음을 치유해갔으며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저녁놀에  들었던 한마디는 레딘의 정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레딘님은 밥을 허버허버 드시는군요''
''응?''
''네? 레딘님은 밥을 허버허버 드신다구요''

비록 지금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 피난 중이라고는 하나 레딘 또한 일국의 왕자.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면서, 성별 관련 문제에 대한 문서를 읽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크리스 지금 말했던 '허버허버' 라는 단어 어디서 들었지?''
지금이야 아닌 것을 알지만 처음에는 크리스가 첩자였을 가능성을 보고 수소문을 했던 레딘이였다.
수소문의 결과는 정말로 시골의 교회에 순결하게 자라온 수녀. 그런 크리스가 저런 종류의 단어를 배웠다면
필시 순례 행렬을 떠나기 전까지 있던 교회임이 분명했다.
'젠장 설마 그런 질 나쁜 교회였을 줄이야 왕이 된다면 반드시 엎어야 하는 곳이겠어'
''...크리스, 지금 말한 단어는 좋지 못한 단어다. 크리스는 잘 모르겠지만 도시에선 여성이 남성에 대해 성별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단어 중 하나야.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혹시 그 외에도 교회에서 배운 단어가 더 있나?''
''네?! 아뇨 이건 나암님이 가르쳐주신 단어인걸요..혹시 이것도..그런 표현인가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리스는 엄지와 검지로 무언가를 집는듯한 표현을 했다...젠장
''...그것도 나암이 알려준 거라고? 혹시 더 있나? 빠짐없이 알려줄 수 있겠어?"
그로부터 듣게 된 사실들은 충격적이었다. 오조오억개,힘조등등..하나같이 차별적인 발언들이 나온 것 이였다.
생각해보면 교회보다 먼저 의심해 봐야 했다. 자신과 볼코프를 제외하고 부대 내에서 유일한 여성 사령관은 나암밖에 없을 터
'평소 둘이 잘 어울려 다니기에 같은 성별로서 친밀감을 느꼈나 싶어 했지만 설마 그런 사상을 전파하고 있을 줄이야'
''나암이 무언가 착오를 했나 보군. 크리스. 앞으로 그런 단어나 행위는 표현하지 말도록 해. 나암에게는 내가 말해두지"
진실과는 별개로 나암은 지금 세력에서 꼭 필요한 인재 중 하나였다. 사적인 사상이 불손하다곤 하나, 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으며 또한 지금 시점에서 사령관을 경질했다간 병사들 사기에 큰 악화가 있을 것 이다.
'그렇다고 그런 불순한 사상을 크리스한테 옮기려 하다니..용서할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다른 여성 부대원들에게 전파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떻게든 처리를 생각해야...'
생각을 이어나가던 레딘의 머리에 순간 번뜩이는 계획이 떠올랐다.
' 그러고 보니 게속해서 추격해오던 란스라는 녀석...외모는 나름 봐줄 만했다. 마물놈들을 소탕하기 위해, 훗날에 놈과 손을 잡더라도, 녀석에게 죽은 병사들을 생각해서라도 소소한 복수 정도는 해주는 게 좋겠지.
나암의 사상이 불손하더라도 그녀가 발디아 왕가를 위해 봉사한 노력 또한 진실, 그녀의 은퇴를 위한 소소한 선물 정도는 챙겨주는 게 맞겠지 '
''큭 크하하하하하"
막사의 너머로 들리는 호쾌하면서도 불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에서, 마치 먼 훗날 그의 후손이 보여주는 패왕의 자질이 보이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