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의 어느 날

아직 사춘기의 끝에 있던 소년 왕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게임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세가 세턴으로 발매된 랑그릿사3였다.

당시 일본의 비디오 게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왕이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게임기를 가지고 놀 수 있었고

최신 게임기인 세가 세턴과 랑그릿사3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데어 랑그릿사를 손에 넣어 흠뻑 빠져버린 왕이의 기대는 굉장한 것이었다.

랑그릿사3를 100% 즐기기 위해 일본어까지 배웠을 정도다.

하지만 기대했던 랑그릿사3는 왕이에게 큰 실망을 주고 말았다.



스토리는 나쁘지 않았다.

다소의 설정 오류는 있었지만 1, 2 때보다 더 길어지고 깊어진 스토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가 문제였다.





이게 뭔가 싶은 어설픈 3D 전투는 1, 2 때의 전투를 생각하고 있던 왕이에게 큰 실망을 주고 말았다.

전투씬이 너무 구려서 때려치고 싶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이가 랑그릿사3를 몇 번이나 클리어 한 것은 3에서 새로 추가된 어떤 시스템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호감도 시스템. 랑그릿사 1과 2는 히로인이 정해져있었지만, 3에서는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주인공과 이어지는 히로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티아리스, 리파니, 소피아, 프레아 등 1, 2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히로인이 있었지만, 왕이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단 한 명. 루나였다.

우루시하라 사토시의 미려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루나의 모습은 소년 왕이의 가슴을 강하게 흔들었다. 목소리(CV 신구지 사쿠라)도 귀여웠다.

이번에는 다른 히로인 엔딩을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무심코 또 루나 엔딩을 볼 정도로 왕이는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그런 왕이는 전투는 똥같지만 갓캐 루나가 나오는 랑그릿사3를 친한 친구에게도 전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자신의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같이 랑그릿사3를 플레이 했다.

평범한 집안의 자녀라 세가 세턴 같은 최신 비디오 게임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친구는 신나서 게임을 즐겼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왕이는 은근슬쩍 자신의 여친인 루나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친구에게 누가 제일 예쁜 것 같냐? 난 루나가 제일 낫던데 너는 어떠냐? 난 엔딩도 루나 엔딩을 봤다며 친구의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온 친구의 말은 왕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 루나랑 디하르트랑 이어지는 거야?"

"아, 루나랑 디하르트랑 이어지는 거야?"

"아, 루나랑 디하르트랑 이어지는 거야?"






그렇다. 루나랑 이어지는 건 디하르트다.

자신(왕이)이 아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왕이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나는 내 것이 아니다?

디하르트 것인다?

디하르트? 이 성능도 애매한 파인애플 같은 머리를 한 주인공의 것이다?






아직 사춘기의 끝에 있던 왕이의 마치 NTR을 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날밤, 왕이는 꿈 속에서 자신의 앞에서 디하르트와 사랑을 나누는 루나를 보며 눈물 흘렸다.


그후로 왕이는 디하르트라는 주인공을 혐오하게 되었다.

우스운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한 번 피어난 혐오는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랑그릿사 모바일을 홍보하는 PV에서 디하르트 대신 키리카제를 넣고

디하르트를 도저히 못 써먹을 정도로 구린 성능으로 내놨다. 전장도 애매하게 줬다.

그걸로도 부족해 진중하고 뜨거운 본래 성격을 무시하고 대충대충 사는 금발 양아치 같은 캐릭터로 만들어버렸다.

인기로 치면 랑그릿사3의 진 히로인이나 다름 없는 루나와 디하르트를 격리시켜서 이벤트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랑그릿사3 시공에서도 디하르트의 AI가 삽질을 해서 유저들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디하르트를 향한 분노와 질투는 아직 남아있었다.

결국 왕이는 최후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SP로 부관참시를 하기로 말이다.







은근히 못 생기게, 뭔가 그럴 싸해 보이면서도 구리게.

그런 알 수 없는 대표의 요구에 따라 직원들은 SP 디하르트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SR급 SP만도 못한 처참한 성능과 구린 일러스트의 SP 디하르트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