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본편은 완결났고 이 글은 삭제된 장면 및 에필로그 겸 외전 모음집



4화 중 삭제된 장면


복도를 걷던 중 별 생각없이 통유리로 된 벽에 가까이 가니 내 떡진 머리가 비춰보었다. 아침부터 닥터한테 불려가느라 씻지도 못했지. 인지하고 나니 머리 떡진 게 되게 신경쓰인다.


일단 좀 씻어야겠다. 나도 일단은 오르카호의 단 둘 뿐인 남자중 한 명인지라 나만 쓸 수 있는 전용 샤워실이 있기는 하다. 남성용 샤워실이 아니라 내 전용 샤워실. 귀하신 사령관님이 호위도 없이 비무장상태로 두번째 인간과 마주하게 둘 순 없는 모양인지 사령관이랑 나랑 샤워실이나 화장실도 따로 쓰게 만들었다. 뭐, 나야 오히려 좋지. 가랑이에 옥수수 달고있다는 그 놈이랑 알몸으로 마주치는 건 좀... 많이 어색할 거 같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 치고... 미호는 어떻게 씻지? 화장실 들락거리는 건 봤어도 샤워하는 건 못본거 같은데.


미호야, 그, 성희롱하려는 건 아닌데... 너 혼자 샤워실 가서 씻고 나올 수 있냐?


...


...아무래도 못하는거 같은데.

누가 씻겨줘야 하나 그럼? 내가 직접 씻겨줄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금 깨긋해보이는 거 보면 어디서 씻기는 한 거 같은데... 

나랑 만난 뒤에는 계속 내 옆에 붙어있었으니까... 닥터가 데리고 있을 때 씻겨줬나?


-그래서 나한테 돌아온거라고?


물어볼 데가 너밖에 없더라.

미호가 오르카호에 들어온 뒤로 씻는 걸 못봤는데, 혹시 여기서 씻겨줬다거나 했어? 얘가 스스로 샤워하고 머리감고 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뭐, 정답이야. 저 마리오네트는 구금된 채로 여기 이송된 직후에 세척했지.


...세척?


수술대에 묶은 채로 소독실에 집어넣었어.


...


......


세차장이냐?


그런 느낌이지? 그 땐 구속을 풀 수 없었으니까.

저 마리오네트 씻게? 소독실 빌려줘?


됐어. 샤워실에 데려다놓으면 알아서 씻겠지...



5화 중 삭제된 장면


장화는 시중에 풀린 모델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있는걸까? 그것도 홍련과 연관점이 있다는 것까지... 정말 궁금한걸? 알려줄 수 있을까?


(좆됨 감지)

(두뇌 풀회전)

(뭐라 대답하지? 게임? 라오? ...에라라오?)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예전에, 장화를 만나본 적이 있어.


...!


비오는 날 저녁이었지. 알바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길목에 왠 빨간머리 여자애가 우산도 없이 쭈그려 앉아있더군. 그게 장화와의 첫만남이었어. 

나는 무심코 갈 데 없으면 우리집에 오지 않겠냐고 했고, 그 아인 고개를 끄덕였지. 그렇게 해서 우리집에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얹혀살게 됐지.


...응, 그래서?


무슨 길고양이처럼 되게 까칠한 애였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점점... 친해지는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 홍련과의 관계도 본인한테 들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성격이 순해지는 게 장화가 마음을 여는 것만 같았지. 그런데...


(라붕이는 여기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는다. 머릿속으로 특정 키워드를 떠올린다. 만우절, 복이공주, 젠메... 무심코 눈살이 찌푸려지고, 얼굴에 그늘이 진다.)


어느날 일어나보니... 장화가 없더군. 쪽지 하나 안남겨두고 떠난거야... 그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 난 그 뒤로 두번다시 장화의 이름을 듣지 못했어.


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안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냥... 인연이 없었던 거지...

(오케이! 됐다! 잘 속여넘겼어! 감사합니다 에라라오!)


~~~

뭔가 에라라오 기습숭배 같기도 하고, 왠지 장화를 정실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스토리라서 폐기. 연기 한번 배워본적 없는 라붕이가 즉석 연기로 엘리트 탐정인 리앤을 속여넘기는 것도 에바인거 같기도 하고.



10화 중 삭제된 장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약 네 가족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너는 어쩔거지? 기회를 잡을건가?


어떤 대가를 치뤄야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예를 들어, 어머니와 재회하기 위한 대가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면, 과연 떳떳한 얼굴로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


... (상상중)


(장하구나 바르그. 나를 위해 방해되는 건 뭐든지 제거하렴)


그럴 거 같은데.



...내가 이상한건가?


(에라이ㅅㅂ 누가 테러범 집안 아니랄까봐...)


~~~

바르그 설득 시도하는 장면이 이상하게 흘러가버려서 폐기한 스토리



에필로그 겸 외전 #1

왜 에필로그 겸 외전이냐면 본편 분위기나 흐름에 안어울리거나 넣을 구간이 애매하거나 정말 본편에 넣는게 좋을지, 혹시 뇌절로 보이지 않을지 해서 애필로그 겸 외전이라고 부르기로 함


 


'띵-' 지하 최하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두 여자가 걸어나왔다. 이제는 부사령관 휘하에 소속된 바르그와 테일러 리스트컷이었다.


이곳은 델타의 본거지였던 문리버 본사 빌딩의 지하. 그 날 델타가 죽은 직후, 그들은 두 번째 인간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였기에 다른 건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탈출만 우선시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그 때 미처 못다한 일을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회장을 끝장내기 위해서.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복도를 걷던 둘은 거대한 방공호 문 앞에서 멈춰섰다. 테일러가 보안을 해제하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워낙 무거운 문짝이 움직이다보니 바닥과 천장이 같이 진동하면서 위에서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문이 완전히 열린 걸 확인한 둘은 다시 발을 재촉했다. 이윽고 둘은 방공호 가장 안쪽에 안치되어있는, 문리버 회장이 잠든 냉동수면장치 앞에 도착했다. 동면장치 밖으로 새어나오는 회장의 뇌파가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기본적으로 동면장치에는 환자가 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를 위해 안락사시키는 기능이 포함되어있다. 그저 버튼 하나만 누른다면 문리버 회장은 의식을 되찾을 일도 없이 잠든 상태 그대로 조용히 숨을 거둘 것이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버튼을 누르기를 주저했다. 바르그는 한 발자국 뒤에서 팔짱을 끼고 그녀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할건가?"


바르그가 먼저 입을 열자 테일러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굳이 이러는 게 맞는건지 모르겠네. 델타가 멋대로 죽어버렸으니 대신 회장한테 원수를 갚으라니."


"어차피 오르카에 있어서 펙스 회장을 살려둔다는 선택지는 없다. 굳이 처리할 거라면 우리의 손으로 직접 처단할 수 있도록 주인님께서 선심쓰셨으니, 나는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다."


이제는 부사령관이 된 두번째 인간이 문리버 회장을 처리하는 역할로 바르그와 테일러를 보낸 건 일종의 배려였다.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하더라도, 그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바르그는 그러기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테일러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델타로부터 쌓인 증오를 회장에게 대신 풀 지, 복수를 포기하고 고통없이 안락사시킬지.


"난 연좌제라는 게 싫어. 멸망 후에 생산된 오드리들은 회장 얼굴도 직접 본 적 없는데 그저 오드리란 이유만으로 델타한테 박해받았었다고. 애초에 따지자면 회장한테는 잘못이 없지. 우리가 원수진 건 델타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주인님으로부터 델타라는 괴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들었다.


문리버 회장은 레모네이드 델타의 설계에 참여했었다. 델타가 회장한테 광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이유는 회장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회장은 철저히 오드리만 편애하고 델타를 의도적으로 밀어냄으로서 그녀의 질투심을 증폭시켰다. 칠죄종 중 질투를 담당하는 레모네이드로 만들겠다는 시덥잖은 컨셉질에 심취해서 말이다.


델타를 괴물로 만든 건 바로 회장이다. 과연 네 자매들의 죽음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너도 잘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또한 우리가 회장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회장이 죽어마땅한 악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장 레모네이드 알파도 이를 갈고있고."


바르그는 델타와 직접 대면했을 때 만큼은 아니나, 회장에게 상당한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조용히 바르그의 말을 경청했다. 


"복수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깊숙한 곳에 응어리진 이 원념을 그대로 곯게 냅두라고? 나는 그렇게 두지 않을거다. 결국 복수라는 건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네. 나도 참, 이 나이먹고 무슨 내숭을 떠는건지."


반평생을 자매들을 안락사시키며 살아왔던 그녀이나, 이번에는 안락사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결정을 내렸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는 동면 장치의 어느 한 버튼을 눌렀다.


[동면 해제 프로토콜을 시작합니다.]


안내음이 울리고 동면포드의 유리에 낀 서리가 천천히 사라지더니, 몇 분 뒤 푸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덮개가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회색 머리의 노인이 눈을 떴다.


"으... 으음..."


상체만 일으켜세은 노인은 두통끼라도 있는건지 이마를 부여잡고 잠시 인상을 쓰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어나신 걸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테일러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바르그는 입을 닫고 지긋이 회장을 응시했다.


"흐음...? 테일러 클로스컷인가? 옆에는... 모르는 기종이군. 컴패니언 신제품인가? 뭐, 됐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휩노스 병은 치료한 건가?"


"지금은 2174년 9월 25일로, 회장님께서 동면에 드신 지 60년이 지났습니다. 휩노스 병의 치료는 아직 시행되지 않았습니다만,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오호, 그래? 그럼 그 치료를 위해 나를 깨웠단 말이로군."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아직 장기간 동면으로 인해 굳은 근육이 완전히 풀리질 않은 탓에 안그래도 낡았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회장은 부축도 안해주고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는 둘에게 눈을 흘겼다.


"뭐하고 있는거지? 당장 부축하지 않고-"


"회장님, 시급히 보고드려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테일러가 무겁게 분위기를 잡자 회장은 따지려던 걸 잠시 미루고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회장님이 잠들어계신 사이 스스로를 오르카군이라 자칭하는 집단이 펙스 컨소시엄을 공격했습니다. 이미 펙스 유럽지부가 괴멸했습니다."


"뭐라고?"


회장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곧 놈들이 회장님을 노리고 몰려들겁니다. 시급히 피난하셔야만 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펙스가 가진 힘이 얼만데, 그런 듣도보도 못한 집단한테 당했다고?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사실입니다. 놈들이 예상 외로 강해서-"


"변명따윈 듣기 싫다! 이 쓸모없는 년들이, 내가 없는동안 회사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했건만-!"


한 발자국 성큼 내딛은 회장이 테일러의 뺨을 치기 위해 팔을 치켜든 순간-


"크헉!?"


그는 무엇에 얻어맞는지조차 모른 채 뒤로 날아갔다. 바르그가 올렸던 다리를 도로 내렸다.


"어이쿠야."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뭐, 뭐야...!? 이 쓰레기년이 감히...!! 테일러!!"


"왜요?"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은 회장은 다급히 테일러를 불렀으나, 테일러의 무덤덤한 반응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왜요? 왜요라고? 바이오로이드가 감히 인간님을 공격했는데, 저 반응은 뭐지?


"촌극은 이쯤에서 끝내지."


"그럴까?"


테일러의 대답을 들은 바르그가 검집에서 거대한 검 두 자루를 꺼내들자 회장은 식겁해 땀을 삐질 흘렸다.


"이, 이게 짓이냐!? 지금 뭘 하려는...! 멈춰! 뭘 하려든지 간에 당장 멈춰라! 명령이다! 명령...! 테일러! 당장 저년을 막아!! 명령이다!!"


"싫은데?"


테일러가 대놓고 거절하자 회장은 또다시 아연질색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 모양인데, 여기 당신 편은 아무도 없거든? 당신은 여기서 살아서 못나가. 마지막으로 잠깐 둥가둥가 해줬으니 그거면 충분하지?"


바르그에 이어 테일러까지 등에 매고있던 거대한 가위를 꺼내 허공에서 위협적으로 찰칵거리자 회장은 경악했다. 뭔가 잘못되도 터무니없이 잘못됐다.


"대, 대체 왜이러는 거냐! 내가 너, 너희들한테 베푼 은혜를 잊었느냐!"


"어차피 델타의 질투심을 부추기려고 한 거잖아. 당신이 동면에 든 뒤로 고삐 풀린 델타가 우리 자매들을 얼마나 박해했는지 알기나 해?"


이제는 테일러마저 표정 관리를 집어치우고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돌연 적대적으로 변한 분위기에 회장은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주저앉은 채로 몸을 뒤로 내뺐다.


"그, 그게 불만이어서 그랬나? 이제 내, 내가 깨어났으니 괜찮다! 델타가 두번다시 너흴 괴롭히지 못하게 내가 막아주지! 그리고, 지금이라도 멈추면 다 용서해주겠다!"


"필요없어. 델타는 이미 죽였으니까. 이제 당신도 곧 그렇게 될 테고."


테일러가 회장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하자 회장은 등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저것이 허세가 아니란 걸 느꼈으나, 억지로 현실을 부정했다.


"아, 아니야... 그럴리가...

데, 델타! 레모네이드 델타! 내가 부르는 데 당장 달려오지 않고 뭐하는 거냐! 델타!!"


회장은 있는대로 악을 썼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참 재밌네. 델타가 죽고나서야 이리 애타게 이름을 불러주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델타의 수급이라도 들고올 걸 그랬군."


바르그와 테일러가 무기를 늘어뜨린 채로 천천히 다가오자 회장은 힉 하고 숨을 삼켰다.


"거, 거기 누구 없느냐! 아무나! 당장 와서 저년들을 죽여! 날 지키란 말이다!"


회장은 등을 돌려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려 했으나 이곳은 출입구가 하나 뿐엔 지하 벙커. 그의 앞에 있는 건 막다른 길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그림자에 의해 자신이 가려지자 회장은 벌벌 떨면서 몸을 도로 돌렸다. 이곳에는 그에게 멸망 전에 최상류층의 삶을 누리게 해주었던 권력따윈 없었다. 그저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노인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 자자, 잠깐 기다려라! 나는 펙스의 회장 중 한명이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뭐든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이루어주마! 그러니-"


"네 목숨이면 충분할 거 같군."


회장이 이판사판으로 던진 거래라는 이름의 목숨구걸조차 단칼에 거절당했다.


"지금부터 너에게 행할 것은 단순한 분풀이다. 델타에 의해 쌓인 증오를 담아, 너를 토막내겠다."


"내가 델타 덕분에 고문 경험이 좀 쌓여서 말이지, 금방 죽게 두진 않을거야."


회장은 자신이 잠들어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동면 전까지만 해도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건지 생각하려 했으나 얼마못가 눈앞에 들이닥친 공포심에 의해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공포심은 가위의 형상을 하고있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울려퍼진 비명이 지상까지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

마지막화 즈음에 이 장면 넣을 구간도 애매했고, 갈등 다 해결되는 마당에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지는거 같아서 본편에선 뺐음



에필로그 겸 외전 #2



미호는 마리오네트 저격병의 몸을 빌려 내 폰에서 현실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이론대로라면 다른 마리오네트를 통해 더 많은 애들을 데려오는 게 가능하다. 


나는 사령관에게 살아있는 마리오네트를 종류별로 데려와달라고 요청했고(미호는 이미 왔으니 저격병 제외), 사정을 들은 사령관은 흔쾌히 수락해줬다.


그리고 지금, 닥터의 연구실에 방문한 나는 3개의 수술대 위에 마리오네트가 각각 한 명씩 눕혀져있는 광경을 보고있다.


브라우니 유전자 기반의 마리오네트 보병.

블러디팬서 유전자 기반의 마리오네트 중장갑병.

비스트헌터 유전자 기반의 마리오네트 포병.


"와, 내 마리오네트 버전은 단발로 고정됐는데 비헌 쟤는 생머리 다 유지하고 있네. 부럽다아~"


미호가 마리오네트 포병을 보면서 궁시렁댔다. 진짜로 자기 머리에 애착이 많이 남아있었나 보다.


"마리오네트를 변화시키는 걸 직접 관찰할 수 있다니, 이건 못참지! 기록장치 정상작동 확인! 이제 시작해도 돼!"


닥터는 이번에야말로 비밀을 파헤치겠다며 내가 마리오네트를 바이오로이드로 바꾸는 과정을 참관하겠다고 했다. 닥터 말고도 사령관과 리리스, 레모네이드 알파도 와서 구경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서있는 미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해보자. 그 설원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이 폰이 네 몸에 접촉함으로서 영혼의 전송이 시작됐다고 했지?"


"맞아. 이번에도 그냥 폰을 마리오네트 몸에 갖다대기만 하면 될 걸?"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이건 대체 무슨 물건으로 변한거지 진짜. 아님 폰은 그냥 폰이고 여기 깔려있는 라오 앱이 변했다고 봐야하나.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폰의 가장자리가 마리오네트 브라우니의 몸에 툭 닿게 했다.


"...이제 된 건가?"


"음... 어디 보자..."


나는 손을 거두었다. 마리오네트 브라우니는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이게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가늠이 안되고 있었는데, 한순간 브라우니의 몸이 움찔 떨렸다.


<1%>


브라우니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오, 된 거 같은데? 나 처음에 막 변하기 시작했을때도 이런 반응이었지?"


"진짜네... 진짜 겨우 이런걸로 변화가 시작된 거란 말이야? 이번에도 전생에 연인이었던 브라우니의 혼이 깃들었다, 뭐 이런거야?"


닥터가 가까이 와서 고글을 고쳐쓰고 브라우니를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수첩에 필기체로 뭔가 휙휙 적고있는데, 브라우니는 닥터한텐 눈길도 안주고 나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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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36%>


"이제, 그러면... 이대로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마도. 그치만 혹시 모르지? 이번엔 더 빨리 끝날지도."


"둘째 오빠, 그냥 한꺼번에 가자. 여기 마리오네트 브라우니가 말할 수 있게 되는데 또 몇 달씩이나 걸린다고 치면 남은 둘은 그 전에 수명이 다해서 죽을거야."


아참, 생각하보니 그렇겠구나. 나는 마리오네트 팬서와 헌터도 폰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제 됐겠지 하는 생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는데...


"어어...!?"


"저, 저거...!"


느닷없이 뒤에서 닥터랑 사령관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려던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헤헤! 드디어 합류했지 말임다!"


"?????"


뭐여 시벌


브라우니?


뒤를 돌아보려고 했으나 뒤에서 백허그로 꽉 붙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각하! 보고싶었슴다! 아니, 처음뵙겠슴다? 아무튼 무지무지 반갑지 말임다!"


"브라우니? 브라우니? 잠깐 놔봐! 브라우니!"


"아, 실례했지 말임다! 너무 기뻐서 그만 저질러버렸슴다!"


브라우니한테 풀려나고 나서야 몸을 뒤로 돌릴 수 있었다. 눈이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하얀 머리의 브라우니와, 그 어깨 너머로 미호와 사령관 일행이 얼빠진 표정으로 서있는 게 보였다. 닥터가 떨어뜨린 펜이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와."


미호가 탄성을 내뱉자 브라우니가 고개를 돌렸다.


"오, 미호 씨 아님까! 먼저 각하 옆에 와계셨던 검까? 그럼 제가 2빠인거 맞슴까? 어, 근데 머리 자르셨슴까? 염색도 하신검까? 완전 하얗지 말임다!"


"너도 하얘..."


"그렇슴까? 아, 생각해보니 그렇겠지 말임다!"


옷이나 머리색은 분명 마리오네트의 것인데 저 주둥이는 모터라도 단 건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나불댔다.


"브라우니. 혹시 머리가 하얘져서 어색하다거나, 그러진 않아?"


"어색할 게 뭐가 있슴까! 처음부터 이 색이었는데! ...어라, 원랜 갈색이었는데? 아니지, 하얀색이 맞는... 내가 흰머리고, 내가 갈색머리고..."


"...브라우니의 기억과 마리오네트의 기억이 섞이면서 혼선이라도 온 건가?"


"아, 듣고보니 그런 거 같지 말임다. 금방 적응될검다. 아마도."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나는 오는 데 몇 달이나 걸렸는데?"


"예? 여기 온 거 말임까? 저도 모르겠지 말임다? 그냥 길 나있는거 그대로 따라온 거 뿐임다."


"길...? 내가 먼저 오면서 무슨 길이라도 뚫어놓게 된 건가?"


미호가 턱을 짚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펜을 도로 주워든 닥터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저기, 마리오네트? 브라우니... 언니? 어느쪽으로 부르면 될까? 질문 좀 하고 싶은데-"


"오, 닥터도 와있었던 검까? 닥터는 원래 머리색이지 말임다?"


"얘는 '이쪽'의 닥터야."


"이쪽 닥터란 건 뭐야, 그럼 저쪽 닥터도 있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지."


닥터가 힐끗 미호를 쳐다보면서 넌지시 묻자 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눈썹을 치켜올린 닥터는 다시 브라우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브라우니 언니... 마리오네트랑 인격이 섞이면서 혼란스럽다던가, 그런 감각은 없어?"


"뭔가 신기한 느낌이긴 한데, 그리 어색하진 않슴다. 그 있잖슴까, 피콜로도 네일이나 신하고 융합해도 인격은 피콜로가 베이스였지 않슴까? 그거랑 같다고 보면 됨다!"


"...피콜로? 관악기? 도대체 무슨 비유야, 그건?"


"엑. 드○곤볼 안봤슴까? 고전명작인데!"


닥터는 브라우니의 말을 이해 못하면서도 열심히 기록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살짝 웃었다.


"너는 정말 놀라운 일들만 해내는구나..."


"오옷! 거기 계신 건 사령관님 아니-"


순간 뇌정지 온 브라우니는 말을 멈췄다. 나랑 사령관을 여러번 번갈아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세우고 차례대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사령관님, 이랑, 각하. 각하! 저긴 사령관님! 여기는 우리 각- 꾸웩!


누군가가 브라우니의 정수리에 꿀밤을 콰직 먹이자 곧장 입이 다물어졌다.


"이 새끼가 개념을 제조기에 두고 나왔나, 어디서 하늘같은 사령관님한테 삿대질이야?"


"블러디... 팬서?"


하얀 머리의 블러디 팬서였다. 팬서는 나를 보더니 얼굴에 쓰고있던 바이저를 벗고서 경례했다.


"승리. A-1 블러디 팬서 중령, 복귀 신고합니다. 아니, 여기선 중령이 아니지. 그냥 블러디 팬서... 아님 마리오네트 팬서. 편한 쪽으로 불러주십쇼."


퍽 팬서다운 말투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손 내리라고 손짓하자 팬서가 경례를 풀었다.


"팬서... 너도 왔구나."


"늦어서 죄송하지 말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보아하니 사령관은 이미 따로 있는 모양인데."


팬서는 그리 말하며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사령관을 힐끔 쳐다봤다.


"부사령관이라고 불러. 여기 와서 부사령관이 됐거든."


"알겠습니다, 부사령관님."


"아니, 잠깐만 기다리시지 말임다!? 여기선 중령이 아닌거라면 방금 때린 건 부조리한 폭력 아님까?"


"어쭈, 이 놈 봐라? 불만 있냐? 한 대 더 맞을래?"


"으엑! 이, 이거 병영부조리지 말임다!"


머리에 혹을 달고 징징대려던 브라우니는 팬서의 말 한마디에 바로 깨갱했다.


"뭔가... 벌써부터 시끌시끌하네요."


"아, 너도 깨어났구나."


때마침 의식을 되찾은 비스트헌터도 수술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헌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하얘진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제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만... 결과적으론 어찌저찌 다 잘 풀린 것 같네요. 다시 보게되어 반갑습니다. 부사령관님."


"반가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쪽으로 온 걸 환영해, 비스트헌터."


"헤에. 이걸로 마리오네트 4종류 전부에 자기네 대원들 불러오기 하는데 성공한 셈이네?"


미호의 말을 들은 헌터는 미소를 지으려다가, 무언가 떠오른 건지 갑자기 낫빛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아스널 대장... 에밀리는..."


비스트헌터가 꺼낸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브라우니도, 팬서도, 그리고 미호도 이곳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내 폰 안에 남겨진 자신들의 가족과 자매들을 떠올렸다. 


"으우... 레후 상뱀..."


"...어쩔 수 없었어. 우리가 이쪽으로 온 것만 해도 기적이야."


미호는 인상을 쓰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시큰둥하게 쳐다보던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더이상 부사령관 당신을 따르는 마리오네트를 늘리지 않을 생각인 건가요?"


"이젠 하고싶어도 못해. 중복되는 마리오네트를 대상으로는 소용없을거야."


영혼밖에 없는 상태인 그녀들이 이쪽으로 넘어오려면 영혼 없는 그릇이 필요했고, 마침 조건에 맞는 육체인 마리오네트는 네 종류밖에 없다.


이제는 다른 마리오네트를 찾아 내 폰이랑 닿게 시킨다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다. 요컨데 마리오네트 브라우니의 육체에 레프리콘의 영혼이 자리잡을 일은 없다는 거다. 코어링크에서도 같은 모델을 박아넣었을 때만 링크율 100%가 떴었으니...


...잠깐만, 코어링크?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뭐?"


하얀 머리를 가진 넷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오네트는 더 없잖아. 설마 새 타입의 마리오네트라도 개발하자는 거야?"


"그게 아냐. 사령관! 여기 대체코어 얼마나 있어?"


"어? 대체코어? 물자창고에 몇 구 보관돼있기는 한데, 그건 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어떤 캐릭터랑 코어링크시켜도 링크율 100%를 찍고, 링크되면 메타몽마냥 그 캐릭터의 모습으로 변하는 대체코어라면... 영혼없는 육체라는 조건도 일치하니 불러오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


급하게 준비해올 수 있었던 대체코어는 총 8구였다. 푸른 빛을 띈 S급 대체코어 4구와, 황금빛을 띈 SS급 대체코어 4구. 우선적으로 강화가 필요한 전투원들은 이미 다 코어링크를 끝내고 남은 것들이라 생각보다 많이 들고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하려는 건 대체코어의 몸에 바이오로이드의... 영혼...을 불어넣는 의식이라는 거지?"


닥터가 확인차 물었다.


"단어선정이 좀 그렇기는 한데, 맞아. 시도는 해봐야지."


"근데 그러면 이번엔 누가 오는거지? 랜덤인가?"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저기, 나도 질문해도 될까?"


사령관이 슬쩍 손을 들었다.


"뭔데?"


"너 대체 전생에 연인이 몇 명이었던 거야?"


"오르카호 대원 수만큼 많다고 할 수도 있고, 0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


게임 안에선 너님처럼 하렘왕이었는데 현실에선 모쏠아다였습니다.


"뭐야, 그게..."


사령관은 내 말을 이해못했거나 아님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 시작한다."


일렬로 나란히 눕혀져있는 대체코어 중 제일 왼쪽에 있는 s급 대체코어에 다가가 폰으로 건드렸다.


...


반응이 없다. 그냥 대체코어인 것 같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안일어나네요?"


갸웃거리던 알파가 말했다.


"그러게...? 뭔가 나를 쳐다본다던가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이게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알 수가 없는데.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인가?"


다른 대체코어들도 지나가면서 툭툭 폰으로 건드려봤지만 기다려봐도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브라우니가 의식을 찾는 데엔 얼마나 걸렸지?


"잘모씀다? 아, 어어, 그게..."


"45초. 참고로 지금은 1분 2초 지났어."


닥터가 재고있었던 건지 바로 대답했다. 미호는 내심 몽구스 팀 대원들을 다시 볼 수 있을거라 기대했었던 모양인지 얼굴이 침울해졌다.


"결국... 올 수 있었던 건 우리 네 명 뿐인가 보네."


"..."


나는 말없이 가장 오른쪽에 있는 ss급 대체코어의 손을 쥐었다. 황금빛 피부를 가진 그 손은 의외로 따듯했다.

아니, 따듯하다 못해 좀 뜨거운 거 같은데. 왜 뜨겁지. 


그 때 모든 대체코어들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일제히 발작하듯 경련하기 시작했다. 대체코어의 손이 내 손을 꽉 붙잡자, 나는 놀라서 팔을 뺐다.


"뭐, 뭣, 이번엔 또 뭐야!?"


"뒤로 물러서계십쇼! 뭐가 튀어나올 지 모르지 말임다!"


팬서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제 등 뒤로 숨겼다. 대체코어들의 몸이 눈에 띄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어떤 건 체격이 줄어들고, 어떤 건 반대로 늘어나거나 부풀어올랐다. 빛이 한 층 더 강해져서 팔로 눈을 가렸고, 잠시 후 눈부심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주인님...?"


뭐야, 방금 누가 말한거야. 천천히 팔을 내린 나는 왠 여자 둘이 나한테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그대로 굳었다. 


"인간!"


"권속!!"


곧이어 왠 금발머리 여자와 파란 머리 여자애가 덥석 끌어안는 바람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왜 멋대로 사라지고 그래! 걱정끼치지 말라고, 바보, 바보야!"


"정말로 권속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다! 두번다시, 훌쩍, 짐을 두고 떠나지 말거라!"


"그리폰...? 좌우좌?"


이름을 부르자 둘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정말로 그 둘의 얼굴이었다. 마리오네트의 몸을 통해서 온 넷과는 달리 원래의 외모 그대로였다. 옷도 기본스킨에서의 옷이었고. 둘을 번갈아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메이드와 기사가 보였다.


"콘스탄챠... 요안나까지...!"


"주인님...! 이렇게 만나기만을 기다렸어요!"


"기다리고 있었다네, 주군. 이 만남을 위해 시라도 한 수 짓고 싶지만... 훗. 막상 주군의 얼굴을 보니 머릿속에 주군 말고는 아무것도 안떠오르는군."


모두 21스쿼드의 맴버들이다. 설마 하는 생각이 나는 ss급 대체코어들이 진열돼있던 곳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드디어 함께군요, 주인님... 예전처럼... 다시 주인님을 모실 수 있게 되서 정말로 기쁘답니다."


"평생을 함께할 아내로서,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군. 비록 반지는 통행료로 쓰여 사라졌으나... 다시 만나게 된 이상, 앞으로도 소관이 지켜드리겠소. 서방님."


라비아타와 용이 한 발자국 씩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알파도. 말을 걸려다 문득 오르카호 알파도 여기 와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리폰과 좌우좌가 달라붙은 채로 안놔주길래 어기적거리며 뒤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사령관과 알파, 닥터, 리리스 모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있었다.


"알파가... 둘...!?"


"당신은... 대체...?"


"아아, 당신이 바로 이쪽의 저로군요. 반가워요. 그동안 저희 주인님을 보호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만 겠네요."


내 쪽에 서있는 알파는 생글생글 웃고있는 반면 사령관 옆의 알파는 놀라서 입도 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 리리스가 홀스터에서 쌍권총을 꺼내 이리로 겨누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라비아타와 용이 재빠르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주인님, 제 뒤로!"


"리리스, 잠깐 멈춰! 뭐하는 거야!?"


"설명해보시죠, 부사령관. 원오프타입인 라비아타 통령에 용 중장, 거기다 알파 비서실장이 어떻게 둘 씩이나 존재하는 건지. 이번에도 전생의 연인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셈인가요?"


리리스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야 물론 세상에 단 하나만 있어야 할 알파가 둘이나 있으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밖에 없기는 했다.


"리리스 씨, 진정하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란 거죠? 무슨 술수를 부렸던 간에, 오르카호의 전력을 복제하고 있는 걸로밖에 안보입니다만!? 제 말이 틀립니까?"


알파의 만류에도 리리스는 진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했다. 사령관은 리리스를 더 말리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고민하던 그 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라비아타와 용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주장은 제가 반박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리리스, 총을 거둬주세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눈을 크게 뜬 알파는 리리스가 총구를 내리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성큼 앞으로 나왔다.


"베타."


"만나서 반가워요. '이쪽'의 알파."


베타의 다소곳한 인사에 알파는 숨을 삼켰다가 내뱉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변한 게 느껴졌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 와있는 거죠? 당신은 분명 카라카스에 있는 게 아니었나요?"


"맞아요. 이쪽의 저는 아직 거기 있겠죠. 지금의 저는 주인님을 곁에서 모시게 됐고요."


"주인님이라니..."


베타가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자 알파 또한 그녀를 따라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당신... 정체가 뭔가요? 이쪽은 뭐고, 저쪽은 또 뭘 말하는 거죠?"


"아니, 그렇게 물어본다 한들 나도 여기까진 예상 못해서..."


"제가 대신 설명할게요 주인님. 먼저 거기 계신 사령관님께 하나만 물을게요. 평행우주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베타가 내 말을 끊고 사령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평행우주? 단어의 뜻 정도는 알고 있는데... 

...설마 지금 말하려는 게..."


"저희는 평행우주의 오르카호의 21스쿼드, 그리고 여기 계신 이 분은 평행우주의 오르카호 사령관님 이십니다."


베타는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한 손을 들어 공손히 나를 가리켰다.


동공지진 온 사령관은 나를 쳐다보다 마리오네트였던 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너희들도...?"


"맞아. 난 21스쿼드는 아니지만 오르카호 몽구스팀 소속이었긴 했어. 스토커를 해치우고나서 얼마 후에 합류하게 됐었지."


"저는 아니지만 레후 상뱀은 21스쿼드 소속이었었는데 사령관 각하 구할 때 떨어진 상태였다고 거기서 제외됐지 말임다..."


"아하하... 21스쿼드의 뜻이 좀 변하긴 했죠..."


미호와 브라우니가 차례대로 말하자 콘스탄챠가 머쓱 웃었다. 사령관은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 아무 말도 안했었어?"


"...그야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했다간 미친놈 취급 받았을테니까?"


"아, 그렇겠구나... 그럼, 네가 평행우주의 나 자신이 되는건가?"


"그건 아니에요, 사령관님. 저희 주인님도 지구 최후의 인류로서 21스쿼드에 의해 구조되고, 오르카호의 사령관으로 등극하고, 스토커나 트릭스터같은 연결체들을 무찌르고, 철충 감염 흔적때문에 저에게 칼을 겨눠졌다가 김지석의 묘에서 생체재건장치를 찾아 몸을 고치는 등 같은 역사를 거쳐오기는 했지만, 당신과 주인님은 결국 다른 인간이에요."


"애초에 둘이 얼굴이랑 뇌파부터 다르잖아. 유전자 검사도 보나마나 불일치로 나왔을테고."


라비아타가 설명하자 미호도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다시 알파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저희와 같은 역사를 거쳤다면, 어째서 레모네이드 베타가 포함되어 있는거죠?"


"그건 저희가 좀 더 미래 시점의 오르카이기 때문이에요. 여기는 지금 몇 년도죠?"


"2174년 9월이야."


"그렇다면 바르그의 배신을 제압하고 델타 침공군을 무찌른 뒤겠군요. 원한다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드릴 수도 있어요?"


"아, 참고로 말하자면 델타는 이미 죽였어."


미호가 담담하게 꺼낸 말에 새로 들어온 11명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뭣이라? 아니, 어떻게 지금 이 시기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오? 지금의 오르카는 프리드웬도 스트롱홀드 군단도 없어 병력이 부족할 터인데."


"그게... 내가 개입되면서 역사가 좀 바뀌었거든. 문제가 있어서 바르그의 배신을 제대로 막지 못했었어."


"...설명을 들어야할 게 많을 것 같군."


용이 미간을 짚었다. 사령관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너희가 여기에 온 거면, 너희가 있던 원래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대로 멸망하는 건가? 아니면, 부사령관을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야?"


"유감스럽게도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오. 우리가 어떻게 이곳으로 건너올 수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편도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오.

우리가 원래 있었던 세상은... 멸망이라기보단, 서방님이 이쪽 세상으로 튕겨져나온 순간 문자 그대로 정지됐소. 다만 그 휴대폰을 매개체로 이쪽 세상과 연결됐을 때만 시간이 일시적으로 다시 흐르게 됐지."


리리스가 총구를 내린 것을 확인한 용은 나를 돌아봤다.


"이 대체코어의 육신과 연결된 그 찰나에, 우리는 전뇌공간에서 수많은 회의를 거쳤소. 누가 먼저 올 것인지에 관해서. 서약순으로 보내자, 전투력 순으로 보내자, 도감번호 순으로 보내자 등 다양한 안건이 오가다 최종적으로 소관을 포함한 21스쿼드의 대원들이 먼저 가기로 했다오. 서방님이 또다른 오르카호의 사령관이라는 것을 확고히 보여주고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소."


"그렇지만 사람밖에 올 수 없었던 건 조금 아쉽네요. 제가 입고있던 옷은 서비스 차원인지 이 새 몸과 같이 생성되었지만, 란제리 스킨이 아니라 기본스킨이라 천만다행이지만, 케스토스 히마스는 이리로 가져올 수가 없어 저쪽에 두고왔으니 예전만큼 도움을 드릴 수가 없어 죄송할 따름이에요."


"너무 상심할 것 없다네, 알파 양. 짐 또한 검과 방패를 잃어버렸기는 했지만, 짐이 주군을 섬기는 기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네. 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말일세. 주군. 이 심장이 그대를 위한 사랑과 충성심, 긍지로 채워져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그대를 위한 헌신을 멈추지 않을 걸세."


요안나가 자신감 충만한 미소를 지으며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팍 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두를 둘러보다가, 좌우좌의 머리를 헝클어주면서 운을 뗐다.


"비록 여기서 난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이고, 여긴 내 오르카호도 아니지만, 너희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뻐. 이쪽 세상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

그리고 저쪽에 남아서 날 기다리는 애들도, 모두 다 데려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더 많은 대체코어를 사서 말이지. 내 월급으로. 부사령관직이 그래도 월급은 꽤나 나와서 다행이지.


말을 마친 나는 사령관을 뒤돌아봤다. 아까보단 진정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 식구가 좀 늘어나게 됐는데, 다들 여기서 살아도 되지?"


"어... 뭐, 상관없겠지, 아무래도?"


"주인님!"


"리리스, 괜찮아. 다만 확인해두겠는데 우릴 적대하거나 따로 세력을 차려 독립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지? 이제부터 두 오르카호가 합병한다고 보면 되나?"


"물론이에요. 저희도 원래부터 오르카호의 대원들이기도 했고, 철충이나 펙스 등의 적대세력을 소탕해야 주인님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니 전면적으로 협력할 생각이에요." 


라비아타가 정중한 태도로 확실하게 못을 박자 사령관도 안심이 된 듯 했다. 그리폰과 좌우좌가 날 놓아주자 미호는 슬쩍 내 곁에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아~ 나 혼자 우리 자기 독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깝다~"


"그... 미, 미안?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할 테니까-"


"히히, 농담이야. 자기를 바라보는 애들이 이리 많은데, 어떻게 나 혼자 독점할 수 있겠어. 여기서도 가장 먼저 자기한테 청혼받고 반지도 받았으니, 그걸로 족해."


미호는 제 약지를 보며 방긋 웃었다. 옆에서 그걸 본 브라우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미호 씨 벌써 반지 새로 받았던검까? 우와! 부럽지 말임다! 근데 지금 생각난건데, 저도 좀만 기다렸다가 왔으면 원래 머리색 유지할 수 있었- 꽥!"


"이 자식이 배가 불렀구만? 눈치 챙겨라잉?"


브라우니는 블팬이 건 헤드락에 자동적으로 입이 다물어졌다.


~~~

마리오네트 추가 3명에 이어 대체코어를 통해 더 많은 대원들을 불러온다는 설정이 뇌절처럼 보이지 않을까 해서 본편엔 넣지 않은 스토리. 미호 한 명과의 순애 분위기가 깨지기도 하고.


아무튼 이걸로 라붕이와 마리오네트 미호 이야기 진짜로 끝!

끝까지 읽어주신 라붕이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