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끝, 행?복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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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어둡다. 왜지?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맞다. 다친 브라우니하고 레프리콘을 보호하려고 몸으로 감쌌지.

 

-......! 빨.......! 움직일......다......러.........

 

-.......습....!

 

-쿠르르륵!

 

-...에 올....!

 

-쿵! 푸스스슥.....

 

-발...심해!

 

나를 둘러싼 콘크리트 잔해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잘 들리지 않던 소리도 선명히 들리기 시작한다.

 

-마리 대장님! 팔랑스가 보입니다!

 

-빨리 들어 올려! 팔랑스 뿐만 아니라 부상이 심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도 매몰되어 있다!

 

-알겠슴다!

 

-쿠르릉, 쿵!

 

-조금만 더! 좀만 더 힘을 내라!

 

얼마 남지 않은 잔해들이 내 방패와 몸체에서 떨어진다.

 

"팔랑스! 자네 괜찮은가!"

 

"전...괜찮으니.....제 밑에....브라우니하고 레프리콘...괜찮으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그리고 그게, 서귀포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아직......났어?

 

-네.....시스....정화......회복.....하지만......

 

-.....렘린 언니 말........시스템......일단......보는게.....?

 

-알겠..........수고해줘.

 

-감사해요.........나는 대로.....드릴게요.

 

-정신.....오빠......할게!

 

-치익. 철컥.

 

.

.

.

.

.

.

.

.

 

팟.

 

마치 컴퓨터를 부팅시키듯, 정신이 돌아왔다. 눈 앞에는 내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하지만 익숙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글귀들이 빠르게 사라지거나 채워졌다. 그런데 난 분명 서귀포에서......

 

-어? 철충씨! 정신을 차리셨군요! 사령관님 불러드릴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뭐야? 철충 오빠 드디어 일어났어?

 

아무래도 청각이 제일 먼저 돌아온 것 같다. 그렇다면....공순이 같은 목소리에, 오빠라는 말버릇까지. 오르카에서 공순이 속성은 포춘, 그렘린, 닥터로 정의된다. 든든누나 특유의 목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하니,

 

"으으...그렘린....닥터.......지금....며칠......?

 

"오늘은 한반도 기준으론 2202년 6월 27일이야. 철충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가 6월 12일이었으니까...꼬박 15일을 정신을 잃고 있었던거지."

 

역시 닥터였네. 그나저나 대충 좀 오래되었겠다 싶었는데, 2주하고도 하루라니. 그게 그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나?

 

.....아니, 잠깐만. 내가 이정도인데, 걔들은?

 

"계속 질문해서 미안한데....혹시...."

 

"387번 브라우니와 889번 레프리콘에 대해서 물어보신거죠? 387번 브라우니는 철충씨 덕분에 다행히도 원래의 부상 외에는 그렇게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상태가 상태였던지라 하루에 반나절 정도는 수복실에서 지내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은 슬슬 목발 없이도 걷고 있으니 그리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889번 레프리콘도 찰과상 정도라 마찬가지.“

 

이건 그렘린이구나. 잘 들어보니 주변에 탑돌이로 추정되는 구동음도 들리고.

 

닥터가 책상에 놓여있던 패널을 들고오며 그렘린의 말을 이었다.

 

"두 언니들 모두 철충 오빠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으니 상태가 안정된다면 스틸라인 거주 구역에 가보는 것도 좋을거야."

 

"으응...한번 들러 봐야겠네.”

 

그 순간, 시각을 필두로 전신의 모든 감각들이 돌아왔다. 

 

주변을 돌아보자, 뭔가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도 충분히 낮은 시야였지만, 더 낮아진듯한 시야. 그 시야에 부응하듯 나보다 두배는 더 커보이는 닥터. 게다가 느껴지지 않는 팔다리의 감각까지. 이건......유충 상태인건가. 전원이 정지되고 나서 램파트에서 탈출 했나보네.

 

"아, 근데 제가 지금 철충 상태인걸 보아하니.....램파트는 아직 거기 있겠군요."

 

"철충 씨도 그렇고, 브라우니도 그렇고 다들 부상이 심해서 기생하셨던 램파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엄청난 손상을 입은 상태라 쓰지도 못하셨을 거구요.”

 

그렘린이 덤덤하게 내 질문에 답했다. 하긴, 콘크리트 덩어리에 파묻혔으니 멀쩡했을 리가 있나. 그 상황에서 본체라도 튀어나온게 다행이지.

 

"그래도! 철충오빠를 치료? 관리? 아무튼. 뭐 그런걸 하면서 철충 오빠의 신체 구조에 관한건 다 조사가 끝났어.”

 

닥터가 ‘사실 원래 삼안산업에서 연구하던 자료를 바탕으로 했긴 하지만 말이야’ 라고 속삭이듯 덧붙이더니, 다시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조사 결과! 아마 몇 주만 있으면 철충오빠 전용의 인간형 소체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개념 설계하고 청사진까진 만들었고, 이제 오빠...그러니까, 사령관님의 재가만 있으면 바로 제작할 수 있거든!”

 

오오, 역시 다섯 명이 모이면 특이점이 일어난다는 인류 최고 지능의 박사님.......잠깐, 철충은 펍헤드 정도의 크기가 기생 한계일텐데?

 

내 의뭉스런 눈빛을 알아챈 건지 닥터가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철충의 기생 한계는 펍헤드 까지야. 하지만 왜 내가 철충오빠에게 굳이 ‘인간형 소체’라고 했을까?”

 

어.......혹시 뇌파를 이용해서 조종하는 그런걸 말하는건가? 그..아바타 같은거?

 

“내 뇌파를 이용해서......원격으로 조종하는 소체라서?”

 

배시시 웃고 있던 닥터가 패널을 이리저리 조작하자, 그리 좁지도 않지만 넓지도 않은. 딱 정당한 크기의 연구실을 홀로그램들이 뒤덮었다.

 

“그것도 맞긴 맞아. 음......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아! 철충오빠, 혹시 ‘아바타’ 라고 들어 봤어?”

 

역시 아바타였구만? 일단 컨셉질은 해야 하니 모른다고 답해야겠다.

 

“멸망 전의 매체....인가?”

 

“응. SF 영화인데, 거기서 외계 생명체와 인류의 유전자를 혼합해 만든 인공생명체가 나와.”

 

패널을 몇 번 더 뒤적거리던 닥터가 아바타의 한 장면을 내가 보기 쉽도록 천장에 띄워 주었다. 수조에 떠있는 쌍둥이 형의 아바타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저걸 영화 속에선 ‘아바타’ 라고 명명했는데, 유전자를 제공한 인간의 의식을 저 인공생명체로 연결시켜서 원격조종을 할 수 있어.”

 

“저 원리를 약간 응용해서, 철충 오빠의 정신을 좀 이따가 만들 그 소체에 연결시키는거지. 시각이나 청각은 물론이고, 후각, 미각, 촉각까지 각 감각에 따른 센서들이 정밀하게 구현되어 있어서....”

 

닥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마치 ‘사람’처럼 생활할 수 있지.”

 

오오오....역시 오르카 최고 지성. 믿고 있었습니다! 아멘! 닥터 최고! 너도 닥터 최고라고 외쳐! 그녀는 신이야!

 

내가 당황과 감격에 잠겨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주섬주섬 물품들을 정리하던 그렘린이 패널을 확인하더니 닥터에게 말을 걸었다.

 

“닥터? 저런 거 설명해주는게 재미있긴 하지만...지금 사령관님 도착하셨거든? 문 연다~.”

 

“뭐어?! 이잇! 아직 여기 정리도 안끝났는데!”

 

"하하하.....“

 

-방문자 모델명, 알 수 없음, 방문자 성명, ???. 소속, 오르카 저항군. 직위, 총사령관. 방문을 허가합니다.

 

-방문자 모델명, CS 페로, 방문자 성명, 페로. 소속, 오르카 저항군 컴패니언 시리즈. 직위, 경호원. 방문을 허가합니다.

 

그때, 문을 열고 사령관이 들어왔다. 옆에는 리리스.......대신 페로가 있었다. 노려보고 있는건 기분 탓 이겠지. 암, 그렇고 말고.

 

“닥터, 그렘린. 오늘따라 자주 보는 것 같네. 어쨌든,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아니에요. 제가 한게 뭐가 있다고.....고작 해ㅂ.......점검하는거하고 내부 회로 분석만 했는데요...”

 

“고마워 오빠!”

 

그렘린은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고, 닥터는 아까 전에 정리 못했던건 다 까먹은 건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는지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렘린은 뭔가 위험한 단어를 말한 뻔 한 것 같지만 나도 닥터처럼 신경 안쓰기로 했다. 뭐, 그렘린이 행복했으면 된거지.

 

그렇게 그렘린과 닥터와 잠깐 대화를 나누던 사령관이 뭐라 말하자, 닥터와 그렘린은 뻐근해보이는 몸을 한껏 풀며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축객령이라도 내린건가?

 

"팔랑스. 좀 괜찮아? 정신이 들어?“

 

내가 누워있던....이걸 침대라 해야 하나, 책상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나에게 다가온 사령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이 서있는데 그대로 누워있기는 대한민국에서 자란 유교맨의 예절 상식에 근거하여 심히 찔리는 행위였기에 꼬리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꼬리를 제대로 써본 적이라곤 처음 제주도에서 눈을 떳을 때 램파트에 기생한 적 밖에 없어서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일어나는 중간에 고꾸라지는 쪽팔리는 사태 없이 잘 일어섰다. 이러고 있으니까 뱀 된거 같네.

 

"죄송은 무슨, 네가 오르카의 귀중한 대원들 셋을 살린건데. 오히려 내가 고맙지."

 

"하하...과찬이십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요."

 

잠깐, 내가 구한건 387번 브라우니와 889번 레프리콘. 그렇다면 남은 대원 한 명은........

 

“387번 브라우니와 889번 레프리콘, 그리고 이번에 새로 합류하게 된 레기온까지. 모두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뭐, 나도 그랬지만.’ 이라면서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가는 사령관. 내가 지금까지 라스트 오리진을 하면서 봐온 사령관 그대로였다. 아무튼,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닌데. 대체 레기온이 뭘 어떻게 오르카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냐고.

 

“특히 그 레기온은 너를 꼭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 일단은 지금 빈 AGS 격납고에 임시로 수용시켜놨으니, 나중에 상태가 더 괜찮아지면 09번 격납고로 가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거야.”

 

“387번 브라우니와 889번 레프리콘 만나러 갈 때 같이 들러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사령관 각하.”

 

“각하는 무슨. 그냥 편하게 사령관님이라고 불러. 사령관님이 싫거나 불편하면 다른 호칭으로 불러도 되고. 어쨌든 이만 가볼게. 몸조리 잘하고, 상태 괜찮아지는대로 지휘관급 정기회의때 부를 수도 있으니까 알아둬.”

 

-우웅, 철컥.

 

사령관이 손을 흔들며 페로와 함께 연?구실을 나간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라오를 하면서도 느꼈던 거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거지만. 저 양반 권위 의식은 대체 어디에 내다버렸길래 어디서 뭐하다 왔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철충에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구실을 둘러보니, 다시금 내가 라스트 오리진 세계로 떨어졌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닥터의 키에 맞게 만들어진 의자와 거기에 걸쳐져 있는 실험용 가운, 저 한 구석에서 충전되고 있는 탑돌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망라하는 수준의 홀로그램과 모니터들, 여러 설계도와 자료, 패널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진 책상, 필시 그렘린의 것이리라 짐작되는 공구상자들로 이루어진 삼층석탑까지. 라스트 오리진을 하면서 상상만 했었던 그런 것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자니 참 감개무량했다.

 

이 몸으로 움직이는 연습이라도 해볼 겸 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연구실 여기저기에 널부러진 책들과 자재들, 잡동사니 등을 피하면서 돌아다니니 나름 뱀처럼 이동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던 순간.

 

-철충.....씨? 철충...양반? 아무튼, 거기 있나? 들어가겠네!

 

인터폰에서 울려퍼지는 절도있고 힘찬 목소리, 스틸라인의 대장, 불굴의 마리가 나를 찾아왔다.

 

“잠....잠깐만...!”

 

내가 바닥에서 돌아다니는 꼴이 흡사 기밀사항을 얻기 위해 탐색을 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되어 급하게 누워있던 책상으로 뛰어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이동하는 것까진 익숙했어도 힘을 줘서 점프하는 것 까진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방문자 모델명, C-1 마리, 방문자 성명, 불굴의 마리 4호. 소속, 오르카 저항군 스틸라인. 직위, 소장. 방문을 허가합니다. 

 

-우웅, 철컥.

 

“사령관 각하께 소식을 듣고 찾아왔네, 드디어 깨어......자네, 괜찮은가......?”

 

문을 열고 들어온 마리는 한 마리의 철충이 볼썽사납게 책상에 턱만 걸쳐져 꼬리는 공중에서 마치 갓 잡은 활어처럼 파닥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혹시......실례가 안된다면.....요 위로...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네.”

 

담담하게 말하는 마리, 하지만 난 보았다. 그 단단하던 마리의 얼굴이 잠깐 웃음으로 일그러진 광경을. 게다가 지금은 입술까지 깨물면서 버티고 있는 그 모습을.

 

“잠시....실례...크흡, 하지.”

 

...하긴. 나같아도 철충이 이러고 있으면 사살이고 나발이고 웃음부터 터졌을텐데, 얘들이라고 뭐가 다르겠나.

 

어쨌든, 한 고비를 넘긴듯한 마리는 내 꼬리와 머리를 받쳐 잡아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내 머리와 마리의 가슴이 접촉하는 행우ㄴ...불상사가 있었지만, 마리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마리는 나에게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스틸라인의 대장으로서, 오르카의 한 대원으로서 자네에게 큰 감사를 표하겠네. 자네가 정말 큰 일을 해 주었어.”

 

“아닙니다...그 자리에 있던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오히려 387번 브라우니가 그런 큰 부상을 당하기 전에 구조했어야 하는데.....”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 허나, 세상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2주 전의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사례를 예시로 들 수 있겠지. 오히려 자네가 그런 것으로부터 그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생명을 구한 걸세. 그것도 철충의 몸으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정말 감사합니다. 마리 소장님.”

 

마리는 짐짓 웃어보이고는 근처에서 의자를 끌어와 내 옆으로 앉았다. 자연스레 나도 마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시금 일어섰고.

 

“그나저나 자네, 이제 좀 괜찮아진건가? 1주 전 까지만 해도 마치 죽은 시체마냥 있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닥터가 신경 신호는 잡힌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진짜 죽은 줄 알았을 걸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거는 마리. 뭔가 답을 해줘야 하는데, 머리에서 답을 내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지금 이 신체가 멀쩡한건지 장담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뽈뽈뽈 기어다니던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싶겠지만, 진짜로 그렇다. 아니, 인간의 신체면 몰라, 구조도 모르는 철충의 몸인데 내가 어떻게 상태가 멀쩡한지 엘롱한지 판단을 내릴 수가 있겠나. 그냥 잘 움직여지니까 괜찮은갑다 하는거지.

 

나의 선택은...

 

“지금은 좀 괜찮아 진 것 같습니다. 아까 보셨잖습니까. 책상에 턱이 걸려서는 갓 잡아올린 활어마냥 파닥거리던거.”

 

“푸흡!”

 

아, 터졌다. 

 

그 광경이 얼마나 웃겨 보였으면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시점에서도 웃음보가 터지게 되는걸까.

 

“푸흡! 후흐흡.........후. 그래,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구만, 하긴 닥터와 그렘린이 밤새가며 간호하고 진료하고 조사하고 해ㅂ....이건 못 들은 걸로 하게. 아무튼 정성을 들였으니. 괜찮아 보여 정말 다행이네.”

 

웃음과 함께 눈에서 찔끔 흘러내린 눈물 방울들을 닦으며 마리가 말했다. 그 호탕하게 웃는 마리의 모습을 눈 앞에서 직관할 수 있다니. 이래서 사령관 빙의물(물론 난 철충이지만)이 유행하는 거구나 싶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네가 괜찮다는 것도 확인했고, 난 이제 슬슬 가보겠네.”

 

“벌써 가십니까? 조금 더 있으셔도 됩니다.”

 

“나도 여기 있으면서 자네에게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고 싶었네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 꽤 남아있네. 그리고 괜찮아졌다곤 하지만 환자를 이렇게 오래 잡아놓고 있는것도 예의는 아니지.”

 

“자네가 뭔가를 섭취할 수 있었다면 오르카 명물인 엘븐밀크를 선물해주고 싶었지만......것 참 아쉽게 됐어. 그럼, 진짜 가보겠네. 편히 쉬게나.”

 

-우웅, 철컥.

 

“...”

 

마리가 나가자, 시끌시끌하던 연구실이 적막으로 뒤덮혔다. 

 

원래 사람들은 조용하고 적막한 그런 환경에서 사색하길 좋아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고로 나도 그냥 드러누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기로 했다. 지금의 몸땡이는 철충이지만, 뭐 어때. 내 정신은 아직 인간인데.

 

여기로 빙의하기 전, 내가 살았던 그곳에서 생겼던 모든 기억들과 추억들. 내가 신경쓰지 않으면 닳고 흐려져 다시는 찾지 못할 그런 기억들을 다시 한 번 더듬어 떠올려 낸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친구와 가족들의 얼굴, 그리고 그들과 부대끼며 만들어낸 추억들, 정신 못차리고 수능 전날에도 딱 한판만 조졌던 칼바람, 여기로 빙의하기 전날에 먹었던 야식, 언제나 내 곁에서 묵묵이 뜨뜻하게 있어주던 게임용 공기계, 그리고 이 세상의 원본, 라스트 오리진.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괜히 쪼만한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만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 대신, 내가 오르카에 들어오게 된 주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철충들에 대한 지식을 기억해내기로 했다. 이왕 오르카에 오게 되었으니, 밥값이라도 해야지. 

 

어차피 폴른 계열이나 램파트 계열은 자주 봤을테니 이름과 외형만 대충 기억해내고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넣고, 다른 철충들을 떠올린다. 스팅어 기반 감염체, 탑돌이 기반 감염체, 익스큐서너, 이모탈 익스, 모리아티, 네스트, 철트리스.........아 씨발.

 

그렇게 멍하니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에 잠겨 있던 차에,

 

-방문자 모델명, 특별형 독립 기술 개발용 바이오로이드 ‘닥터’. 방문자 성명, 닥터. 소속, 오르카 저항군 080 기관. 직위, 박사. 방문을 허가합니다.

 

-방문자 모델명, T-9 그렘린. 방문자 성명, 그렘린. 소속, 오르카 저항군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직위, 공병 겸 엔지니어. 방문을 허가합니다.

 

-방문자 모델명, 산업 관리용 바이오로이드 ‘포츈’. 방문자 성명, 포츈. 소속, 오르카 저항군 퍼블릭 서번트. 직위, 엔지니어. 방문을 허가합니다.

 

-우웅, 철컥.

 

“철충씨? 이 누나가 왔거든?”

 

“저도 복귀요!”

 

“철충오빠! 나 왔어!”

 

오르카 대표 공순이 세 명이 등장했다.

 

구면같은 초면, 포츈. 원래 세계에선 든든누님이라 불리며 라오의 진입장벽을 맡았었다. 실제 실물로 보고 든 생각은...한국산 짝퉁 올리버쌤이 내 머리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시바 살려줘요, 머릿속에서 올리버쌤들이 ‘와, 젖탱이 보소?’ 아카펠라를 시전하고 계신다고.

 

“드디어 일어났네. 소식은 몇 시간 전에 들었었는데, 함 내 시설 정비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거든? 늦게 와서 미안해.”

 

포츈이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딱히 미안해 할 그런 것도 없는데, 왜들 그렇게 내게 사과를 하는걸까.

 

“어...이분은 ‘포츈’ 이세요. 저희들은 보통 ‘언니’라고 불러요. 오르카 내부의 웬만한 기계 장치들은 포츈 언니가 도맡고 있으세요. 그만큼, 오르카에 오래 있으셨답니다.”

 

그렘린이 포츈의 소개를 대신 해 주었다. 솔직히 여기 있는 애들 중 미실장이거나 게임에서 등장하지 않은 바이오로이드 빼곤 다 알긴 하지만, 철충이란 걸 연기해야 하니 지금 알게되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포츈 씨. 오르카로 투항하게 된 철충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어머, 그렇게 딱딱하게 격식차려서 말 안해도 되거든? 그냥 편하게 말해. 어차피 우리들도 거진 말 놓고 있는데 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적당한 예의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차차 자연스럽게 놓도록 하겠습니다.”

 

“호호, 뭐. 그래. 편한대로 하면 되는거거든....”

 

-따르르르릉! 라비아타 님의 연락입니다. 따르르르릉!

 

포츈의 패널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벨소리, 아마 기계장치 등을 수리할때는 엄청난 소음 때문에 급한 연락이 와도 듣지 못 할 것을 우려한 거겠지. 근데 그래서 그런가 진짜 엄청 시끄럽다. 저기 봐라, 닥터도 그렇고, 그렘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인원들 중 포츈을 제외한 모두가 귀를 막을 수 있는 거라면 다 들고 와서 막고 있다. 나는 잠시 청각의 민감도를 최대한으로 낮췄고, 닥터는 어디서 구했는지 감도 안잡히는 3M 귀마개를 귀에 쑤셔넣고 있었고, 그렘린은 사격할 때나 쓰는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어어어? 아잇 참. 분명히 아까 전에 볼륨 낮춰놨을텐데, 정말 미안하거든?!” 

 

“일단은 연락 좀 받고 올 거거든? 조금만 기다려줘!”

 

당황한 포츈이 부리나케 연구실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 까지 확인한 우리 셋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귀 터지는 줄 알았네. 닥터, 포츈 씨는 원래도 저렇게 벨소리가 큰 편이야?”

 

최대로 낮췄던 청각 민감도를 다시 적절한 감도로 올리며 물었다.

 

“응. 포츈 언니 특성상 여러 기계 장치들을 다뤄야 하니까, 저렇게 클 수 밖에 없지.”

 

닥터가 귀에 쑤셔넣었던 3M 귀마개를 꺼내며 답했다. 아까 전에 보니 너무 세게 쑤셔넣길래 혹시나 고막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했는데, 외형이 갓 청소년기에 접어든 여성 모습이라도 바이오로이드는 역시 바이오로이드. 멀쩡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일반 구역 오실 땐 낮춰 놓으시는데, 아마 오늘은 까먹으신 것 같아요.”

 

그렘린이 사격용 헤드셋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저 사격용 헤드셋이 평?범한 연구실에는 대체 왜 있는걸까. 설마, 저런 사태가 원투데이가 아니었나? 에이, 아니겠지. 물체의 경도를 테스트 할 때 총이 필요하니까 있는거....겠지?

 

-포츈 언니 님의 전화입니다. 포츈 언니 님의 전화입니다.

 

닥터의 패널에서 울리는 벨소리. 포츈의 전화다. 다행히도 그냥 무미건조하고 적절한 볼륨의 알림음이었다.

 

“응 언니, 무슨 일이야?”

 

-어 닥터, 미안하지만 철충씨는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할 시간을 만들게. 지금 갑자기 구동계통이 불안불안하다고 연락이 와서....아무래도 지금은 가봐야 할 것 같거든? 나중에 봐!

 

“으응, 알았어 언니. 조심해!”

 

-뚝.

 

“이놈의 오르카는 어째 맨날 구동계통이 문제인지 원. 불안해서 출항을 할 수가 있나 몰라.”

 

“그래도 그 부품이 어디에 있는지 거의 좁혀졌으니, 아마 조만간 해결되지 않을까?”

 

 

뭐지?

 

내가 아는 라오 스토리 연표엔 구동계통이 문제였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오르카 1호, 이거 원래 이랬던 거냐? 아니면, 나라는 이레귤러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바뀐건가? 시발 어쩌지? 내 유일한 강점이자 생존을 가능케 한 가치가 철충에 대한 지식과 미래에 벌어질 스토리들에 관한 지식인데, 내가 끼어듬으로 인해서 앞으로의 모든 스토리가 통째로 꼬였다면? 난 어떻게 되는거지?

 

작가의 말 : 

거의 1달만에 돌아온 창작.....아마도 앞으로의 연재는 비정기적이 될 가능성이 높음. 이유를 설명하려 하는데 괜히 구구절절 변명이나 하는 것 같아 그냥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연재가 비정기적이 되더라도 연중은 없다. 절대 없다.

애초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 자체가 연재를 중지한 작가들을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 보단 내가 직접 내가 쓰고 싶었던 내용을 쓰면서 기다리는게 뭔가 더 옳은 방향이라 생각했기 때문임.

저번 글에서 언급했던 대로 연재는 비정기적에, 연재하는 기간마저 고무줄 투성이 일테지만, 이 글을 포기하고 싶진 않음. 내가 처음으로 써본 글이고, 라붕이들도 이런 소설 초보가 되는대로 써내려간 글을 생각보다 너무 좋게 봐줬으니 말야.

이런 졸작을 계속 봐주고, 기다려주는 라붕이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주고 싶음. 정말 너무 고맙다.

 

2024-03-03 수정

3화 링크 추가 및 작가의 말의 '부정기적'을 '비정기적'으로 수정함


2024-04-03 수정

표정콘 추가 및 어색한 부분들 수정


2024-04-14 수정

닥터의 날짜 설명 중 2172년을 설정에 맞도록 2202년으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