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때리면 고쳐진다, 하지만 그게 초대형 잠수함의 구동부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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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부의 지속적인 문제, 이걸 그냥 7지하고 이상한 나라 사이의 스작들이 굳이 넣지 않은 스토리라고 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애초에 오르카라는 주요 인물들의 생활공간에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걸로 뽑아먹을 수 있는 사이드 스토리가 넘쳐나진 않아도 꽤 있을텐데.

 

아니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로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지휘부 일행들의 제주민군복합항 방문 및 전투, 그리고 내가 투?항 시킨 레기온. 당장 생각나는 역사개변만 해도 이정도다. 이렇게나 많이 개변이 일어났는데 스토리가 내가 아는대로 진행되리라는 그런 보장이 하나라도 있나?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금 이 구동부 고장으로 인해 제 시간 내에 괌으로 가지 못한다면, 요정 마을의 아리아가 진행되지 못한다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내 눈의 연두색 빛이 마치 내 복잡한 기분을 나타내듯 탁해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하는게 책상 위의 강화유리에 비쳐 보인다. 그리고 그건, 나만이 본 건 당연히 아니었고.

 

“철충오빠? 뭐 고민이라도 있어? 철충오빠 눈의 빛이 저렇게 빛나는건 처음 보는 패턴인데?”

 

“어? 그러네? 지금까지는 아주 밝던지, 아주 희미하던지, 그냥 보통이던지 둘 중 하나였는데?”

 

닥터와 그렘린이 각각 말을 얹었다. 저게 과연 걱정일지, 공순이들 특유의 탐구욕일지는 모르겠다만.

 

“그냥....별거 아냐. 괜시리 기분이 싱숭생숭 해져서 그래.”

 

“기분이...싱숭생숭...복잡한 심정이거나 고민이 있을때의 감정을 나타내는 패턴으로 짐작...”

 

“발광 패턴은...”

 

우리 공순이들 MBTI 뒷자리가 T라곤 생각을 못해봤는데......하긴, 쟤들이 내 고민에 대해 뭘 알고 있을 리가 있겠나. 오히려 알고 있는게 더 무섭겠네.

 

“..크흠흠, 아무튼....뭐, 철충오빠가 고민이 있다면 그냥 우리에게 털어놔도 돼.”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맙긴 한데....딱히 남에게 보여주고 할만할 그런 건 아니라서....”

 

일단 화제를 좀 돌려야 겠다. 어차피 구동부 부품 공장도 슬슬 위치 파악이 다 되었다곤 하니 오르카에서 알아서 잘 처리 하겠지. 보니까 한두번도 아니어 보이더만 뭐.

 

“..아! 근데 혹시 그 설계도면 좀 볼 수 있을까? 닥터의 설명을 들으니 좀 궁금해지네.”

 

“잠깐만, 여기에 저장이...되어있을텐데...”

 

패널의 화면을 연신 넘기던 닥터가 겨우 파일을 찾았는지 내가 있는 책상에 박힌 화면에 설계도면이 띄워졌다. 

 

처음 보이는 것은 단순화된 인간의 전신. 마치 의복 매장 가면 보이는 마네킹처럼 보였다.

 

“소체의 외모는 최소한 철충오빠가 정하는게 맞겠다 싶어서, 일단은 외장은 그냥 마네킹 모양처럼 해뒀어. 이제 내부를 봐야겠지?”

 

닥터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마치 종이를 넘기는 것처럼 마네킹처럼 보이던 외장이 날아가고, 곧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부는 금속으로 보이는 재질의 골격과, 신체 장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전술인형 아냐 이거? 이게 여기서 왜 나오는데? 오리진더스트가 사실 붕괴액이었던건가?

 

“여기서부턴 저도 같이 설명해드릴게요. 우선 기본적으로 설계는 저희 바이오로이드를 기초로 해서 설계했어요.”

 

“애초에 그냥 아무 바이오로이드의 유전자를 처음부터 새로 짜버려서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오리진 더스트 때문에 남성호르몬에 쥐약이라서...물론 그건 앙헬 리오보로스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제작된 T-1 고블린 모델의 문제라서 지금 오ㅃ...사령관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만든다고 고블린처럼 폭력적이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만의 하나의 확률이 터져서 고블린처럼 된다면 오빠나 오르카나 둘 다 너무 위험하니까..."

 

언제나 당당하던 닥터가 말끝을 흐린다. 확실히, 언젠가 뒤져봤던 꺼무위키에서 앙헬 리오보로스의 성격이 T-1 고블린의 폭주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었지. 만에 하나 내가 그렇게 폭주하게 된다면 나에게도 문제고, 오르카에도 문제인 상황이니 충분히 나올 수 있을만한 말이다.


“으으음...일단 계속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

 

"응, 알겠어. 우선..."


닥터와 그렘린의 전문 용어가 섞인 친절하고 자세한, 그래서 더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 약 10분이나 지속되었다.


솔직히 지금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설명을 들으며 떠올린 것은 유튜브에서 봤던 폴*웃 4의 3대 팩션, 인스*튜트의 3세대 신스의 제작 과정이었다. 거기에다가 소*전선의 전술인형의 제작 과정을 적절히 조합하면 아마 닥터와 그렘린이 설명해준 방식하고 그나마 비슷하리라.


근데, 다른건 다 둘째 쳐도, 우리의 뇌는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자아를 가지고 있잖아. 내가 소체에 내 의식을 연결하면 그 자아는 어떻게 되는거지?

 

“닥터, 질문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철충오빠. 뭐가 궁금해?”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뇌는 일단 생성될 때부터 자아를 가지고 시작하잖아. 근데 내가 그 소체에 연결한다면 어떻게 되는거야?”

 

“음......뭐랄까, 이 소체는 일종의 ‘휴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도록 만들어질거야.”

 

“휴면?”

 

“진짜로 엄밀히 따지자면 휴면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할 수 있지. 근데 내가 여기서 뭐 복잡한 용어를 쓰면 철충오빠가 알아듣지 못할 거 아냐. 그래서 의미에 가장 근접하는 휴면이라고 한거야.”

 

“어쨌든, 그래서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휴면 상태를 유지하다가, 철충오빠와 의식이 연결되면 그때는 철충오빠와 연결되서 활동하는거지. 물론 휴면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들, 자아가 생기는 것 자체는 철충오빠가 말한 것처럼 필연적인 일이니까 감정이나 의지, 자아가 없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할거고.”

 

“물론 이건 사실상 바이오로이드가 생명을 창조하는거나 마찬가지인 일이니까, 오빠....사령관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아직까진 내 머릿 속의 구상과 저 설계도 빼고는 정해진게 없어.”

 

“그렇구만...설명 고마워, 닥터. 그리고 그렘린도.”

 

“별 말씀을!”

 

“별 것도 아닌걸요.”

 

그렘린만 있으면 몰라도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게 닥터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나는 닥터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 소체를 기억의 저편으로 넘기고 닥터와 그렘린과 수다를 떨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들고 올지 모른채로.

 

그 시각, 사령관실에는 사람 여러 명이 모여있었다.

 

사령관실의 주인이자 이 세상의 유일한 남자인 사령관은 언제나처럼 그의 책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고, 

 

시라유리는 다소곳하게 응접용 의자에 앉아 있으며,

 

에이미 레이저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고,

 

블랙 리리스는 자연스럽게 사령관의 무릎에 앉으려다 제지를 당하고 얌전히 휴식용 간이 침상에 걸터 앉았으며,

 

콘스탄챠 S2는 모종의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고,

 

불굴의 마리는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언뜻 보면 화목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담소’는 생각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마리, 그 철충....을 아까전에 만났다고 했잖아. 어땠어?”

 

사령관이 마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철충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참 평범한 사람이라고 칭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각하의 말대로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있긴 합니다.”

 

마리가 대답했다.

 

“음...시라유리, 에이미. 혹시 지금까지 그 철충을 관찰하면서 뭔가 이상하거나 그런 점은 없었어?”

 

이번에는 시라유리와 에이미를 바라보며 사령관이 질문했다.

 

“아직 이렇다 할 용의점이 발견되진 않았어요.”

 

시라유리가 그녀의 패널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는 CCTV 영상을 보며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에이미가 말 끝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 저녁 19시 43분 즈음, 그러니까 마리 대장이 방문하기 약 3분 전에, 누워 있던 책상에서 내려와 연구실 바닥을 돌아다니는 장면이 포착되긴 했어요.”

 

“하지만 딱히 뭔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뭐랄까......마치 동경하던 것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같이 연구실 여기저기를 기어다니기만 했어요.”

 

사령관이 답했다.

 

“에이미, 이건 우리 오르카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야. 그 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어?”

 

평소의 사령관 답지 않은 진지한 말투와 표정, 그럼에도 에이미는 당당하게 답했다.

 

“네, 확신할 수 있어요.”

 

시라유리가 뒤이어 말했다.

 

“저도 에이미와 함께 CCTV를 몇 번이고 돌려 보았어요. 에이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까전에 답변드린대로 이렇다 할 용의점은 없었어요. 현재로선 이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답안으로 보여요.”

 

사령관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고, 이윽고 리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리스, 리리스도 저 철충을 가까이서 보았잖아? 어땠어?”

 

“리리스는 저 철충에 대해 딱히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시라유리 양과 에이미 양의 의견대로 계속 지켜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콘스탄챠는?”

 

“저도 리리스 씨의 의견에 동의할게요. 아직 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의심하는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한숨을 쉰 사령관은 이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말을 꺼냈다.

 

“그래, 너희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지금은 일단 현상유지를 하는걸로 하자. 이만 가봐도 좋아. 아! 마리는 잠시만 남아줘.”

 

시라유리와 에이미, 콘스탄챠, 리리스가 떠나고, 사령관이 마리에게 말을 걸었다.

 

“마리도 역시 그때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거지?”

 

“그렇습니다, 각하.”

 

“‘오르카 호의 소문을 들었을 때, 제 머릿속으로 그 모든 정보가 밀물이 갯벌을 덮어버리듯 들어왔습니다.’ 라.......”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계속 곱씹을수록 이상하더군요.”

 

“마리, 혹시 내가 철충에 대한 정보를 떠올릴 때마다 두통이 찾아온다고 말했었나?”

 

“네, 말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 철충도 그런 현상을 겪은게 아닐까?”

 

“넵?”

 

“......아니야, 그냥 내 가설일 뿐이니까 진지하게 믿지는 말아줘.”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알겠습니다.”

 

“흠...우선 철충의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내가 독대를 원한다고 전해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래, 슬슬 어둑어둑해지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각하. 편안한 밤 되시길.”

 

위잉, 철컥.

 

문이 닫히고, 혼자만 남은 사령관은 이내 미뤄뒀던 업무를 재개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에 있는 찝찝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스멀스멀 커져만 가고 있었다.

 

다시 시점을 돌려 연구실. 나와 닥터, 그렘린은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어떠한 기계적이거나 과학적인 개념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닥터가 받아서 설명해주고, 그렘린이 보충해주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ㄹ.....철충이 침공할 때 열고 온 포탈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조차 설명이 안된다고?”

 

“응, 아쉽게도 그래. 철충오빠네 동족들이 조금만 덜 호전적이었다면-”

 

괜히 뜨끔하네 이거,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닌데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연구가 이루어 졌겠지만......그걸 규명할 연구진도 사라졌고, 인간이 오빠 빼고 완전히 사라졌으니 더는 포탈이 열릴 일도 없고. 그러니 연구가 진척이 안될 수 밖에.”

 

“하하하.........”

 

-삐비빅! 삐비빅! 오후 11시입니다! 삐비빅! 삐비빅!

 

닥터의 패널에서 날카롭게 울리는 알람소리. 그덕에 내가 얘기를 꺼내놓고 곤란해질뻔 했던 상황이 어찌저찌 유야무야되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고?”

 

“왜? 오후 11시에 뭐 일이라도 있어?”

 

내가 물었다.

 

“아...요즘 닥터가 너무 늦게 자서, 사령관님이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도 그렇게 몸을 혹사하면 안된다’ 고 하시면서 평시에는 1주일 중 3일은 11시에 자라고 했거든요.”

 

웃음을 지으며 대신 답해주는 그렘린.

 

“하긴, 바이오로이드라고 해서 피로에 무적은 아닌거니까. 사령관님이 좋은 선택 하셨네.”

 

“좋은 선택은 무슨...나중에 오빠한테 꼭 풀어달라고 할거야.”

 

툴툴거리며 답하는 닥터, 근데 너.......왜 내 앞에서 뱀 허물 벗듯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있는거니....?

 

하루종일 연구실에 있으면서 흘린 땀으로 약간 젖은 면 재질의 브래지어와 귀여운 무늬가 그려진 팬티. 그리고 결정타인 슬쩍 비쳐보이는 핑크빛의 조그마한 열매와 도끼......아니, 시발. 뭔 미친 생각을 하는거냐 이 마구니 새끼야. 

 

게다가 이제는 브래지어를 벗으려고 하는 닥터, 여기까지 놔두면 진짜 대형사태 하나 터지는건 시간문제다. 농ㅋㅋ고 자시고 이건 진짜 막아야 한다.

 

“저기......닥터...?”

 

“응? 왜.......아.”

 

내 말에 답하던 중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지 말이 멈추고, 얼굴이 마치 앵두처럼 붉어진 닥터.

 

“...!!!”

 

황급히 다시 가운을 둘러입더니 연구실 구석에 있던 간이 샤워실로 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그......미안하다, 닥터야. 내가 이게 볼려고 봤던건 아닌데......

 

당황하기는 그렘린도 매한가지였는지, 어벙벙한 표정으로 닥터가 들어간 간이 샤워실을 바라보다 나에게 말을 건다.

 

“저기......철충씨.....?”

 

“....네....?”

 

“아까전에......보셨던건......없던....걸로...”

 

“....넵....”

 

닥터야, 닥터야, 우째서 사령관에게도 못 보여준 알몸(진)을 내게 먼저 오픈한거니......

 

내 심정이 참으로 복잡하다 이 양반아......

 

그렇게 그렘린과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던 찰나, 닥터가 샤워를 끝냈는지 간이 샤워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수건 한 장 목에다 걸친 알몸 상태로.

 

아아, 이세상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나이까.

 

두 번 더 같은 일이 반복되면 이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건 그렘린도 매한가지였는지 내가 시각을 차단함과 동시에 내 머리로 수건을 던져 내 시야를 가렸다. 나이스 제구.

 

“닥터! 여기 아직 철충씨 있잖아!”

 

화들짝 놀란 듯 소리를 지르는 닥터, 펄럭 소리도 들리는거 보니 그렘린이 잠옷을 던져줬던지 수건을 던져줬던지 했나보다.

 

“아오 진짜! 오늘 왜이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단다 닥터닥터야.....오늘 진짜 왜 이러니 우리 둘 다.

 

사태가 30분만에 겨우겨우 진정되고, 닥터가 연구실에 마련된 침대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철충오빠.”

 

“..응?”

 

“잘자...”

 

“...으응...”

 

닥터가 침대에 눕고, 그렘린이 연구실 중간에 있던 커튼을 닫아 닥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며 말했다.

 

“..철충씨가 보지 않으리란건 잘 알지만.....혹시 모르니 닫아놓을게요...”

 

“네....”

 

그러고 둘이서 조용하게 서로 할 일 만 한지 40분이 조금 넘었을까, 닥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그렘린의 공구 만지는 소리를 ASMR처럼 들으며 멍하니 있던 나에게 그렘린이 말을 걸어왔다.

 

“그...철충 씨가 들어오면서 닥터가 쓰던 이 연구실 겸 침실에 저도 들어와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게 벌써 2주가 넘었잖아요. 그동안에는...철충씨가 말 그대로 의식 불명인 상태로 계속 누워만 있었으니 신경 안쓰고 살다 보니까 그런거에 익숙해져서 그랬나봐요...”

 

“아...네...이해는 됩니다만...오히려 닥터가 트라우마라던가 그런게 생기진 않을지 걱정이네요...”

 

“그러길 바래야죠 뭐...”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피던 그렘린이 만지고 있던 공구를 정리한다. 그렘린도 이제 잘려는 모양이다.

 

“일단은 저도 이만 자러 가볼게요. 좋은 밤 되세요, 철충씨.”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렘린이 하품을 하며 커튼을 열고 들어갔고, 곧 불이 꺼졌다. 그리고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적당한 크기의 연구실에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 채워졌다.

 

나도 딱히 지금 당장 할 일도 없고 하니 그냥 책상에 1자로 누웠다.

 

철충이 되면서 느낀게, 저런 ‘인간적인 행위’ 들이 참으로 부러워진다는 점이다.

 

당장 음식만 해도 그렇다. 음식을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맛을 느낄 수 없다. 애초에 먹지도 못한다. 공복감과 포만감이라는 느낌을 느낄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의 ‘잠’ 도 그렇다.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내 UI 속의 한 구석에 피로도 라는 이름의 그래프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을 뿐이다. 저게 풀로 채워지면 강제로 재워지는건가.

 

심심하기도 하니 언제였나, 유튜브에서 보았던 명상법을 따라해본다. 심호흡을 하진 못하니 그 과정은 과감하게 빼버리고, 그 대신 시각 센서와 청각 센서를 내일 아침 8시까지 차단해 확실하게 명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마음속으로 원래의 내 모습, 인간형의 내 모습을 그려낸다. 그렇게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을 무렵,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왜, 영화 ‘참새의 문단속’에서 남주가 자기 자신의 몸에서 멀어져, 어떤 문 앞에서 일어날 수 없는 채로 의자에 앉아 얼어붙는 꿈을 꾸는 것. 그런 느낌이라 보면 되려나.

 

그렇게 내 몸, 그러니까 철충의 몸에서 멀어지고 멀어져 어느 투명한 바닥에 닿았을 무렵, 어떤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를 만나러 오다니. 정성이 갸륵한지고.

 

뭐야, 누구세요. 내가 미쳐서 만들어낸 환청인가?

 

-하하, 환청으로 들릴수도 있겠구만. 이런 관점은 처음이야.

 

그 ‘환청’은 마치 자신이 높으신 사람이라도 된 양 떠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다양했다.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중후한 노년의 목소리이기도 했으며, 젊은 여성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존재 X를 심상에서 구현시킬 만큼 내 상상력이 이렇게 방대했었나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던 그 목소리가 분통이 난 듯이 말을 걸었다.

 

-아직도 나를 못 믿는게냐? 좋아, 이걸 보여주면 알테지. 

 

‘그에게 접촉해 굴레에서 해방시켜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눈이 감겨있지만, 어째서인지 보이는 하나의 문구.

 

이건......그때 레기온을 해방시키기 전에 떠오른 문구잖아.

 

-이제야 믿는게냐?

 

믿고 자시고 간에, 누굽니까 대체. 당신이 나를 이 세계에 떨어트린 놈이야?

 

-놈이라니, 허참.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아라.

 

마치 레기온을 상대했을때와 비슷한 감각. 내 머리가 자동으로 올라가고,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

 

내 눈 앞에 보인건, 푸르른 단발머리를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였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튜닉처럼 보이는 의복을 입었고, 오른쪽 눈은 푸른색, 왼쪽 눈은 보라색의 오드아이였다.

 

소녀가 나에게로 걸어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바닥에 마치 빗물이 떨어지듯 소녀의 발걸음대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찰박, 찰박.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를 걷는듯한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이게 나의 본 모습은 아니다만, 자네같은 인간에겐 이런 모습이 적합하겠다 판단되어 이 모습으로 현현했네.

 

그 소녀, 아니. ‘소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예쁘다 라기 보단, 경외심에 더 가까웠다. 마치 진짜 신을 본 듯이.

 

동시에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를 이 세계로 빙의시킨 존재가 바로 저 ‘소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 라고.

 

저를 대체 왜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온 겁니까. 굳이 이 세상에 데리고 오실거면 저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간다. 대체 왜 나지. 나보다 더 이 게임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서만 수백수천명은 될텐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구만. 왜 나인지. 나보다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왜 굳이 나를 선택했는지.

 

‘소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뒷짐을 지고 내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럴 때마다 파동은 어김없이 그것의 발걸음대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걸 지금 알려줄 수는 없겠네.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거든.

 

시간이 별로 없다는 양반이 그렇게 느긋하게 계십니까. 

 

-아, 시간이 벌써 다 되었구만. 힘이 예전처럼만 있었다면......

 

아니, 아니. 사람을 가장 빡치게 하는게 말을 하다 마는건데. 최소한 당신이 누군진 알려 주셔야지!

 

그런 내 생각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떠오르기 시작한다. 내 의지도 아니라 막을 수도 없다.

 

-뭐, 그래. 그정도 쯤은 올라가면서도 들을 수 있겠지.

 

그러는 와중에도 내 몸은 점점 빠르게 떠올라 ‘소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라갔다.

 

-지금은 이것만 알아두게. 나는 자네들이 흔히 말하는.......

 

----라네.

 

철충의 몸에 가까워져 거의 합체할 때 즈음 되자, 강제로 시각 센서와 청각 센서가 풀렸다.

 

마치 스프링이 튕기듯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아는 그 연구실이었다.

 

“휴, 다행이네.”

 

“어? 철충씨, 일어나셨네요? 아까 전에 저희가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렘린이 볼을 부풀리며 얘기한다. 귀엽다. 아니, 이게 아닌데.

 

“아까 전에 제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아세요? 아니 글쎄.........”

 

“글쎄....?”

 

“뭐야, 뭔데? 철충오빠, 왜 말하다 갑자기 끊어?”

 

내가, 꿈에서 누구를 만났더라.....?


작가의 말 : 

3주만에 돌아온 창작......예이~


이번화가 18탭인 이유는 중간에 보이는 닥터의 알몸 묘사 때문임. 혹시나 해서 걸어놓은거라 빼도 되면 댓글로 달아주면 좋겠음.

아무튼, 이번 화는 지금까지 썼던 글 중 제일 도자기를 많이 깨먹고, 그만큼 수정을 많이 했던 글임. 이 묘사가 혹시나 작위적이게 보이면 어떡하지, 여기서 이 대사가 나오면 부자연스럽게 느낄려나 등등의 그런 생각들이 넘쳐나서 밤마다 계속 수정하고 삭제하고 퇴고하고 반복하다 보니 3주가 넘게 만져놓고 문자 수는 고작 10,000자 정도밖에 없네. 이게 글쓰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내글구려병인가 싶긴 한데, 아직까지 5화밖에 안쓴 놈이 이런 말 하는거 자체가 웃기긴 하네. 솔직히 이거 찾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잊지 않고 봐줘서 너무 고맙다. 


2024-03-31 수정

18창작탭에서 일반 창작탭으로 변경

소체 제작 과정에서 설정 오류가 있던 부분을 적절히 수정


2024-04-03 수정

표정콘 추가 및 어색한 부분 수정


2024-04-14 수정

닥터, 그렘린, 주인공과의 대화 중 어색한 부분 수정

주인공이 닥터의 알몸을 의도치 않게 보게 된 부분에 일부 내용 추가

일부 문법오류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