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을것이다. 
지금 죽지 않았지만 곧 숨이 끉어질 것이다. 사지는 더이상 온존한지 그렇지 않은지 조차 알 수 없으며 눈앞엔 시커먼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몸은 정신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 압박했고 나는 이것에 굴복할 것이다. 간신히 붙들어맨 가느다란 의식의 다발도 곧 시들것이다.

  
이제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그것은 아무 의미 없다. 나는 잠들 것이고 이것이 내 미천한 삶의 마지막 안식이다.



그러나 나는 잠들지 않았다.
비루먹은 한 인간의 삶이 종착역에 다다랐음에도 그는 쉬지 못했다. 아니, 쉴 자격이 없었다.
스틸라인 4중대가 뉴 멕시코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 했을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철충이 태평양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호라이즌과 머메이드의 함대를 무참히 짓밟았을때도, 별의 아이의 거체가 일본에 상륙해서 지상을 물로 휩쓸었을때도, 무의미한 저항인줄 알면서도 한반에서 항전을 시도했을때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들에게 최악의 지휘관이자 만나는 안되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들을 기만했다.
인류는 재건될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는 더 이상 인간의 소모품이 아니며 새로운 인류의 희망이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었고, 내 목적을 위해 적들 가운데로 내던졌다.
저항군의 이름아래 희생된 자들, 날 부르며 죽어간 자들, 보잘것 없는 남자의 가치없는 한마디에 얼마나 소중한 목숨이 허망하게 사라진 것일까.



나는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망자는 데이터일뿐이고 그들이 겪은 고통은 내가 겪은것이 아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것이 이미 죽은자들에게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일주일 내 잠을 자지 않아 결국 쓰러지든 식음을 전폐하다 겨우 음식을 들이키든 그것은 전부 가식이거나, 부하들을 붙잡아두려는 치졸한 연극이었고 그것은 불우하게도 잘 먹혀들어가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죽기 직전까지 폭군의 곁에 남게 하였다. 
'나'라는 자의 손에 이들의 목숨이 걸리게 된 순간부터 파멸은 예정된것이다.
그날 내가 금속의 관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콘스탄챠와 보리, 그리폰이 날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철충과 처음 마주쳤을때 내가 바로 죽었더라면, 오르카의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운명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나를 후벼파기 시작한다. 철충의 화력에 온몸이 찢기고 뭉개져간 바이오로이드들, 함선이 폭파되어 그대로 바다로 가라앉아 시체조차 찾지못한 승무원들, 헛된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건물 옥상에서 농성하던 포병과 AGS, 자신을 고기방패삼아 나를 위해 막아내던 그들의 비명소리, 고통, 원망이 한꺼번에 머리속에 울려퍼진다.



괴롭다. 신체의 고통에 신음하는 비명소리가, 물에 잠기는 숨소리가, 불에 타들어가도 멈추지 않는 심장의 고동이.


도망가고 싶다. 잠들고 싶다. 이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들이 날 가두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파렴치하고 뻔뻔해진다. 




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어. 내가 도출 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결과만을 작전에 적용했고 피해 또한 줄일 수 있는 만큼 최대로 줄였어. 

내가 직접 싸울수 있는 기회가 오자 선두에서 달려나갔고, 수많은 금속 장갑과 역겨운 살점을 부수고 갈라냈어.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뜯겨나가며 내장이 으깨져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나를 대신에 타인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철충과 별의아이는 너무 강했잖아. 애초에 우리가 막을수가 없는 적이었어.


미안해! 난 할 수 있는게 없었어! 그건 내 능력 밖이었다고! 이건 너무 고통스러워!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온몸으로 내뱉는 절규에도 그것들은 멈추지 않는다. 날 에워싼 것들에서 증오가 물밀친다. 

날 할퀴고 물어뜯고, 사정없이 파낸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나에게 돌려주려 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맛보는 것, 맡는 것, 만져지는 것까지 전부 그것에게 지배당한다. 

형체가 없음에도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입이 없음에도 비명을 지르고 또 지른다.



나는 엉겁의 죄인이다.











무언가 날 잡아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가장 악랄한자가 끌려나온다.

구원...? 더한 고통...? 아무 실마리도 잡을수 없다.


끌려가는 공간이 점점 좁아지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는 힘이 날 단단한 벽에 내던져 으깨고는 무자비하게 압착해 여러갈래로 흝뜨려 놓는다.


고통의 파도가 잠잠해지며 내가 '이마'라고 불렀던 장소로 모이기 시작한다.


엄청난 소음이 나를 강타한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눈이 따갑고 점점 앞이 밝아진다.









분명히 죽었어야 할 난 어느날 그렇게 다시 깨어났다.

의식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감각이 닿는 곳은 얼굴과 상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흐리멍텅한 눈이 초점을 잡아간다.


시야의 오른쪽에 사람의 형체가 아른거리고 곧 그것이 갈색의 피부와 풍성한 밝은 빛깔의 머리카락의 한 여인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앉아있는 여성은 늘씬한 키에 다부진 몸이 건강해 보였지만 풍성한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몸과 정 반대로 엄청난 고초를 겪은 것처럼 매우 피폐해 보였다.


말라붙은지 얼마 되지 않은 눈물자국은 그녀가 방금전까지도 정신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곧 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챈 그녀의 눈에서 다시금 새로운 물줄기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령관님? 보이세요? 사령관님? 저에요! -라구요!!"




청력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녀의 말이 끉겨서 들려왔다. 허나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했음에도 누군지 떠올리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버뮤다 팀의 해커이자 잠입요원, 최후의 전투까지 내곁에서 싸웠던 그 스카디가 내 앞에서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