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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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고통이었다.


'누가...좀...도와줘...!'


몸이 너무 아파 움직일 수 없다.

눈을 뜰 힘조차도, 없다.

이대로 누워있어야만 하는걸까?


나는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멍! 멍!"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울려퍼지는 개 울음소리.

저건…사람이 키우는 개가 맞는걸까?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면?

저 개가 사람이 키우는 개가 아니라,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개이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개가 내 체취를 눈치채기까지 걸릴 짧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저 개가 사람이 키우는 개가 맞기를.

그리고 기왕이면, 개 주인도 이 근처에 있기를.


“멍!”


개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얼굴을 뒤덮는, 따뜻하면서도 축축한 감촉.

반갑다는 듯 얼굴을 핥는 걸 보니 사람이 키우는 개가 맞는 모양이다.


“……”


물론 당사자로선 마냥 기쁜 일은 아니지만.

어찌나 개가 정성스레 핥는지 잠시나마 온 몸이 아프다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우왓! 있다, 있어!"


누군가 왔다.

누굴까? 이 개의 주인인걸까?

마침내 날 도와줄 사람이 온 모양이다.


"숨 쉬는 걸 보니까 살아 있는 것 같아! 벌써 죽은 건가 했는데...이거 좀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났겠는데?"


초면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내 상태가 그렇게나 심각했던 걸까?

아무튼, 사람이 와줘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말대로 큰일이 났을테니.


"그리폰, 조금 더 정중하게 말하렴. 드디어 찾은 인간님인데...우리 주인이 되실 분이잖아."'...?'


주인? 이 사람은 무슨 소릴 하는걸까?

마치 나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이 말투…

하지만 난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


"흥, 주인은 무슨. 난 아직 주인이라고 인정 안 했거든? 어쨌든 그 주사부터 놔. 숨 쉬는 걸 보니까 늦장 부르면 진짜 큰일 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왼팔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진다.

무슨 주산진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나를 도우려 하는 것 같다.


"이걸로 깨어나셨으면 좋겠는데..."


그녀 말대로, 아픔이 서서히 가시고 몸에 힘이 조금씩 돌아온다.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확인해보자.


“……”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위에서부터 내리쬐는 빛 한줄기.

푸른 하늘을 동그랗게 자르는듯한, 천장에 뚫린 구멍이 위에서부터 똑바로 뚫려있다.

저거, 내가 뚫은 건 아니지?


그나저나 난 대체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사방에 무성히 자라난 풀들,

구멍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아예 덤불로 뒤덮혀 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걸까?

사람 살던 곳 특유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눈만 깜빡거리는데 괜찮은 건가? 숨은...제대로 쉬고 있긴 한데."


그러고보니 이 둘…아니, 셋을 잊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굴까?


어…음…

복장이…참…그렇네…


한 명은 단발로 자른 노란 머리를 늘어트리곤 파일럿 고글을 머리에 걸치고 있다.

하지만 몸에 딱 붙는 쫄쫄이 위에 재킷을 걸친 차림은 왠지모르게 야시시하게 보인다.


다른 한 명은 한 술 더 뜨는 복장을 하고 있다.

안경을 쓰고 메이드복을 한 조신해보이는 아가씨.

여기까지만 들으면 조금 특이하다고만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옷은 밑가슴이 틔워져 있는, 누가 봐도 노골적인 차림새다.


혹시…내가 어디 머리를 부딪힌 걸까?

아무리 봐도, 내가 헛것을 보는 것 같은데.


메이드복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한탄하는 것 같진 않다.

그저 안심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다행이야. 이분이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우리도 이젠 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괜찮은 거 맞지? 제대로 된 명령이라면 모를까, 이상한 명령만 내리면 어쩌려고?"

"그럴 리가 있겠니? 그리고 그 정도는 상관없어. 적어도 파괴 명령만 내려주신다면...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명령?

제대로 싸운다?

무슨 말을 하는건진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칫, 지시를 제대로 못 하면 짐덩이나 다름없잖아. 그리고 딱 봐도 이해 못 한 눈친데?"

"설명이야 해드리면 되잖아.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분명 우리한테 제대로 된 명령을 내려 주실 거야."

"그러려나? 음...어쨌든, 인간? 슬슬 약 기운이 제대로 돌 것 같은데 움직일 수 있는 거 맞지?"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아프거나 하진 않다.

힘도 돌아와 움직일 수 있을 정도.

바로 일어나면 몸에 무리가 올 수도 있으니 천천히 일어나자.


"여긴 어디지? 당신들은 누구지?"


그리폰이라 불린 여자가 깜짝 놀란다.

내가 말을 건넬 거라고 생각 못한 걸까?


"어, 뭐야?! 말을 하네?! 콘스탄차, 인간들은 말도 할 수 있어? 철충들은 말 못 했잖아?"

"원래 인간님들은 말할 수 있잖니. 우리야 인간님들을 모방해 만든 거라 말을 할 수 있는 거고."


"반갑습니다, 인간님. 전 가정경비용 바이오로이드 콘스탄차, 그리고 이 아이는 기동 공격용 바이오로이드 그리폰이라고 해요."

"어...음..."


콘스탄차라고 불린 여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아까도 그렇고 나를 인간이라 칭하는 걸 보면 그녀들은 인간은 아니되, 그와 유사한 다른 무언가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폰, 너도 인사해야지?"

"흥, 미리 말하지만 이름 함부로 부르면서 친한 척할 생각 마. 난 다른 애들처럼 인간만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그리폰, 그건 인사가 아니잖니? 다시...제대로 하자, 응?"


그리폰은 성격이 원래 퉁명스러운걸까.

그래도 태도에 날이 서 있거나 적대적이거나 하진 않으니 다행이다.

지금으로선 얼굴 붉힐 일은 없겠지.


"바이오로이드? 당신들은 인간이 아닌 거야? 인간을 기다렸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아, 궁금한 게 많으실 테지만...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직, 절차가 끝나지 않아서..."

"절차?"

"네, 그럼....일단 비상시 사령관 등록 절차부터 시작할게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사령관이라…

어딘가의 군사 조직 소속이기라도 한 걸까.

대체 무슨 군 조직이길래 누군지도 모를 외부인을 명령권자로 간주한 거지?


"제대로 설명을 해드리려면 사령관 등록이 필요해요. 혹시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내 이름? 이름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있는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누군가의 이름이었을지 모를 교유명사.

이게 내 이름인걸까?


"XXX…XXX라고 하면 돼."


XXX, 기억해두자.

어쩌면 내가 누구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XXX님이시군요. 알겠어요. 바이오로이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도 했으니 지금 상황에 관해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여긴 지금 많이 위험하니 일단 본부로 가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위험하다고?"


그렇다면 오랫동안 방치된 것도 이해가 된다.

방사능같은 물질로 오염된 지역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지만.


"여기 온 것도 철충을 따돌리고 온 거라 들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하거든요.”

“철충?”

“적이에요, 적. 그러니 인간님, 저희를 따라..."


...!!!!!!...!!!!


어디선가 삐삐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다름아닌 그리폰이 머리에 걸친 고글에서 나고 있다.


창 같은 걸 띄우곤 빨간 경고 메세지를 출력하는 고글.

이곳의 지도로 보이는 이미지엔 우리를 표시하는 듯한 파란 점 넷, 그리고 우릴 향해 가까워지는 빨간 점들.


아까 말한 철충이 이 놈들인 걸까?

우릴 해치러 오는 거고?

젠장, 방사능 어쩌고 했던 건 취소다.


"칫, 콘스탄챠, 이 자식들 눈치챈 것 같아. 동쪽 거리에서 반응이 있고, 거리는...씨이...500미터 이내!"

"벌써? 다른 통로를 확인해 줘. 철충이 없는 통로는 없어?"

“싸우자, 콘스탄챠! 숫자도 여섯 정도 밖에 안돼! 흩어져 있는데다가, 이제 인간도 있으니 명령만 받으면 제대로 싸울 수 있으니까 문제될 것도 없잖아!”

“…일단은 통로부터 찾아줘. 이렇게 XXX님이 노출된 전투는 너무 위험해. 일단은 피하는 게…”

“빈 통로가 없어서 하는 말이거든? 이 자식들..문을 부수면서 오고 있어.”


놈들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 그리폰의 말이 매우 섬뜩하게 들린다.

이쪽을 확실히 인지했고, 철저히 죽여버리기 위해 퇴로가 될 만한 걸 전부 부수고 오고 있다면…싸울 수 밖에 없겠는데.


“전투 프로그램이야, 너나 나나 다 탑재하고 있잖아. 동쪽 통로에서 오는 녀석들 정도는 수도 얼마 안되니까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리폰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인간이 파괴 명령만 내려준다면 말이야.”


파괴 명령이라…

일종의 제약 같은 게 걸려있고 그 제한을 내가 해제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게 있나보다.

콘스탄챠도 마음을 굳힌 모양인지 각오를 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될 줄은 몰랐는데...XXX님? 저희한테 파괴 명령을 내려주실 수 있나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저희는 사령관, 인간님의 명령 없이는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 외엔 철충에 대한 공격적 파괴 행위가 금지되어 있어요. 하지만 만약, 인간이신 XXX님이 저희한테 파괴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관리자 권한 또는 생체 인증 등으로 해제할 수 있는 제약 비슷한…마치 로봇의 3원칙 같은 게 걸려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건…


“요약하자면 동쪽 통로로 이동해서 그곳에 있는 철충들을 잡고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거지?”

“정확해! 그게 지금 녀석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렇다면…음?”


갑자기 칼이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이어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많고 많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


…포식! …멸망! …이단! …악마! …


그리폰과 콘스탄챠를 덧칠하듯, 눈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단어와 이미지.

범람하는 정보들의 형태는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하나였다.


철충은 네 적이다.


철충의 전투 방식, 그들에 대항하는 전술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상황 분석과 취해야 하는 전술이 순식간에 정리된다.


“인간! 갑자기 왜 그래? 왜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파괴 명령을 내릴게. 지휘는 내가 해도 되지?”


내 분위기는 아까 전과는 다르다.

내가 생각해도, 마치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 둘도 그걸 느낀 건지 그리폰은 몸을 움찔거리고, 콘스탄챠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기억하는 것도 없으면서 지휘를 어떻게 하려고?”

“문제없어. 믿어줘.”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이며, 문제될 것은 없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음...나쁘지 않네. 이 근방에 돌아다니는 놈들 수준이 그러니, 별문제 없을 거야."

"그럼 주인님, 제 뒤로 와주시겠어요?"


작전대로 그리폰과 콘스탄챠가 자기 위치로 이동한다.

물론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숨을만한 장소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큰 의미는 없었지만.


콘스탄챠는 날 자신의 뒤로 이동시켰다.

여차하면 자신이 대신 철충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겠다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인간 말대로 하는 거니까,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할 거야.”

“물론이야, 날 믿어.”

“만약에 인간이 잘못해서 콘스탄챠가 다치거나...하기라도 하면, 절대 용서못해."

"그건 걱정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한 말인 게 분명하다.

그녀 역시 전술을 구사할 줄 알고 있으니, 내 작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진작 반대했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작전은 속전속결.

도망쳐봤자 금방 따라잡힐 게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보이는대로 선공을 날려 놈들을 박살내자.

라는 게 이번 작전의 키 포인트다.


설령 놈들을 파괴하는 데 실패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놈들은 우릴 절대 추격해올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질테니.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둘은 꽤나 긴장한 모양이다.

그리폰은 계속 입술을 혀로 핥고 있고, 콘스탄챠는 손을 희미하게 떨고 있다.


"걱정하지 마. 날 믿어."


이걸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으면 좋을텐데.


...!!!!!!...!!!!


그 순간, 들어오는 햇빛 너머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철충들이 문을 부수고 오고 있다.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걸 보면 가까이 온 게 분명하다.


"온다, 준비해."

"알았어."

"네."


말이 끝나자마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까맣고 육중해보이는 몸체,

무자비하게 질주해오는 한 쌍의 다리,

흡사, 곤충의 눈을 연상케하는 미사일 발사대까지.


기세로만 보면 전차 못지 않은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러한 것들이 무려 넷이나 된다니.

듣기만 하면 절망뿐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작전을 저들이 돌파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적 조우! 총원 넷! 나이트 칙 런처가 전방에 하나, 후방에 셋이 위치한 상태!"

"좋아."


나이트 칙 런처는 철충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하는 개체.

하지만, 그것이 쏘아대는 미사일 공격은 두꺼운 건물 벽조차 손쉽게 터트려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봤자, 하급 개체는 하급 개체에 불과하지만.


'다행이다, 속전속결로 잡을 수 있어!'


장갑도 얇고, 명중률도 낮은 나이트 칙이 아무리 넷이나 모인다 한들, 그리폰과 콘스탄챠만 있어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


"콘스탄챠!"

"보리야, 물어!"

"컹!"


나를 보자마자 미사일을 겨누던 나이트 칙 런처가 기우뚱거린다.


콘스탄챠의 개, 보리가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겉보기엔 평범한 개처럼 보이지만 보리 또한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동물형 바이오로이드.

치악력은 강철도 구부러뜨리고, 물어서 끄는 힘은 960kg를 넘는 나이트 칙 런처도 균형을 잃게 만들 수 있다.


비틀거리던 나이트 칙 런처에게 겨눠진 콘스탄챠의 총구.

그녀는 항상 전투에 들어갈 수 있게끔 만전의 준비를 끝내둔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에 특화된 인재(人材).


총구에서 튀어나온 열화우라늄 탄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철충 내부에 있는 본체를 정확히 꿰뚫는다.


총으로 전차의 튼튼한 장갑을 뚫고 내부의 탑승자를 사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콘스탄챠에게 있어 크게 문제되는 일은 아니었다.

고된 전투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재주와, 오랫동안 인간을 찾으며 철충과 싸워온 경험을 쌓아 온 그녀였기에.


앞장서던 철충이 당하자, 후방에서 뒤를 따르던 세 마리는 급히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지만.


"그리폰!"

"날~아간다~!"


공중을 날며 기회를 엿보던 그리폰이 가하는 미사일 폭격.

한때 인간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자비한 공격이 철충들의 외피를 두들기고, 폭발의 여파가 내부를 뜨겁게 달군다.

어찌나 화끈한 공격인지, 여기까지 열기가 느껴진다.


보리는 아예 두려운 나머지 바들바들 떨고 있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아까 전까지만 해도 너 저기 바로 앞에 있지 않았니?


…그리폰과 보리의 사이가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폭발의 여파가 가시고 나자, 모습을 드러내는 철충 세 마리.

아니, ‘철충이었던 것’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완전히 찌그러진 고철덩이랑 그나마 덜 찌그러진 예비 고철덩이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으니 말이다.


콘스탄챠의 머스킷이 아홉 번에 걸쳐 확인사살을 가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역시 명령만 받으면 별거 아니잖아."

"그래, 처음치곤 잘한 것 같아. 그래도 이 철충들은 하급 전투원이니까 방심하면 안 돼. 연결체 같은 고위 철충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너도 잘 알잖니?"

"걱정하지 마셔, 방심 같은 거 안 하니까."


콘스탄챠 말이 맞다.

만약 그 탁 트인 공간에 런처 말고 더 강한 개체가 나타났다면…


물론 그걸 굳이 입 밖에 낼 생각은 없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러한 전투를 더 벌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목숨 걸고 올린 사기고,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봤자 이득 볼 게 없다.


"주인님, 지휘를 자연스럽게 하시던데 혹시 따로 배우신 적이 있으신 건가요?"

"그러게. 뭐, 그리 좋다고 할 수준은 아니고 보통 정도였지만, 나쁘진 않았지."

"글쎄? 그냥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던데?"


적당히 대꾸는 했지만…나는 왜 기억을 잃은걸까.

나한테…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것보다 인간, 아까 뭐 물어보려 하지 않았어?"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준다며."

"아, 참. 그러고 보니 본부에 통신 넣는 걸 잊고 있었네. 해가 지면 본부에 도착하기 힘들 테니까 일단 연락부터 할게."


확실하진 않지만 이 근방엔 철충이 여럿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콘스탄챠도 괜히 이곳은 위험하다고 한 게 아니니까.

그러니 이 둘이 향하는 곳은 당연하면 당연하겠지만 철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분명하다.


"어? 이거 왜 이러지? 고장 났나?"

"무슨 일이니?"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통신을 안 받는데? 무슨 일 있나?"

"혹시...기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그, 그럴리가...가보면 알겠지."


다른 곳도 아닌, 본부라는 곳이 연락을 받을 수 없다고?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걸까?


"아니, 일단 피난처로 먼저 가자."

"피난처? 피난처라면 어느 피난처를 말하는 건데?"

"등대 아래, 쉘터로."

"거기로 가자고? 그냥 기지로 바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아?"

"인간님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사태는 피해야 해. 만약 기지가 공격받고 있다면..."

"윽..."

"일단 쉘터에 인간님을 모시고 나서 기지에 가보면 될 거야."

"그래, 그럼...그렇게 하지 뭐. 인간, 괜찮지?"


보다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좋아, 거기까지 얼마나 걸려?"


폐허에서 빠져나와 해안 길을 가로지르자, 저 멀리 산이 하나 보인다.

우리의 목적지인 쉘터 입구가 정상에 있다고 하니…

갈 길이…참 멀다.


그나마 주사를 맞았으니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그 몸 상태로 강행군을 벌어야 했겠지.


물론 이 둘 중 한 명한테 업혀 갈…생각은 없었다.

체면도 체면이고, 언제 적이 나타날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러는 건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둘의 무장도 조금 전의 전투로 상당량을 소모했으니 조금이라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미쳤어, 진짜."

"......"


안타깝게도 상황은 우리 편이 아닌 모양이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그리폰에 따르면, 철충들이 우릴 향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고 한다.


"우회로는..."

"없어, 있다면 진작 말했을 거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을 끌수록 더욱 불리해진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강행 돌파할 수밖에 없겠네. 포위망이 가장 얇은 곳을 알려줘."

"일단 동쪽으로 가는 게 제일 좋을 거야. 근데...우리들만으론 무리일 것 같은데..."

"어떻게든 해야 해. 그럼 이동할게요, 주인님."

"그래, 바로 출발하자."

"네, 주인님. 그럼, 바로 출발할 준비를..."


콘스탄챠가 말을 하다 말고 어딘가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뜬다.

뭘 보고 있는거지?


"저 사람은...?"


누군가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은은한 구릿빛이 감도는 피부,

그리고 중세 시대의 기사들이나 할 법한 갑옷 차림.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듯한 신비한 분위기까지.


"거기 있는 건 우리 자매들이랑...인간이군. 보아하니 제법 곤란한 상황에 처한 모양인데, 맞나?"

"요안나 씨...? 기지에 있는 게 아니었나요?"

"음, 자세한 설명은 우선 이 사태를 헤쳐 나간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요안나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의 두 눈에서 콘스탄챠 이상으로 상당한 각오와 의지가 느껴진다.


"만나서 반갑네, 인간이여. 짐 또한 주군을 향한 한 자루 검으로써 그대를 돕겠네. 지시를 내려주게나.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어...응...


지나칠 정도로 호의가 느껴지는 게 수상하지만…상관없다.

믿음직스러운 동료가 한 명 더 늘어난 건, 좋은 게 아니겠는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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