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그는 바다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제, 그는 검푸른 바다가 삼킨 이야기를 두고 등을 돌렸다.



손에 든 가방 하나와 입은 옷 한 벌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들도 사내에게는 이미 넉넉하다 못해 풍족했다.


바다 밖으로 나온 그에게 검은 하늘이 끝 모를 천장이 되었고, 지평선을 그리는 초원이 마루가 되었다.






사내는 밤하늘 아래를 걸었다.


차갑게 찌르고 들어오는 날이 살을 저몄지만 그는 옷깃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왜 가는지도 몰랐다. 


허나 천장에서 빛나는 별들이 그의 길을 밝혀주었다. 그가 가는 곳이 길이 되고 있었다.





별이 하늘의 반을 지났을 때,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의 고된 하루를 위로하며 그는 마루에 누웠다.




사내는 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늘 아래에 남은 게 그 혼자만이라도 나아가야 한다고.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사내는 바닷속의 삶을 돌이켰다.



시끌벅적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렸으며, 웃음도 눈물도 넘쳤던 그때.



이제는 메마른 샘물처럼 땅을 파도 한 방울 감정조차 나오지 않는 지금.





소란스러웠던 함성은 그의 귀가 아닌 머리를 울리고



어울렸던 이들은 그 한 사람 밖에 안 남았으며



웃음과 눈물이 이제 볼 수 없는 밤의 백색왜성이 되었다 할 지라도



별이 사내에게 말하고 있었다.




새기고 기억하라고.






사내는 별 사이의 허공을 좇았다. 



연을 놓친 아이처럼 그는 빛나는 조각 사이 미로에서 잃어버린 걸 애타게 찾았다.



쥐어도 쥐어도 흘러내리는 손 안의 모래알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이윽고, 사내는 시선을 돌렸다.



그가 찾는 건 거기 없었다.





시간은 미추를 가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도, 끔찍한 것도 다 시간의 바람에 흩어져 날아간다.



사내와 함께 한 이들도, 그들과 보낸 시간도 모두 시간의 손에 조각나 뿌려졌다.




잔인한 시간의 선고 앞에서 사내는 별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별을 좇았다. 희미한 자국을 남기며 지평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의 꼬리를 좇으며 마루의 서늘한 냉기를 맞았다.



별이 그에게 속삭였다.



사내는 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잊혀 사라질지라 해도



땅속에 묻힌 비석처럼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영겁을 보낼지라도.



시간은 사내의 순간을 앗아가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유성의 꼬리가 하늘에 남긴 자국이 사라진다 해도, 사내에게 남긴 순간이 바래지 않는 것처럼.




사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어느새 밝아진 별이 지평을 밝히고 있었다.





사내는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잊힌다 해도 지울 수 없는 순간을 안고



설령 잊히더라도 자신이 있었다는 순간을 남기기 위해.






별이 사내의 순간에 길을 새겼다.

------------------------------------------------------------------------------


운동하면서 든 생각에 최근 읽은 라틴어 책의 한 구절을 섞어 만든 주제로 쓴 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를 읽고 간결한 문체를 시도해봤는데, 쓰다보니 또 중간중간 부연설명이 길어지네.



이어령 선생의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인간을 컵이라고 하자. 그럼 컵 안에 void, 빈 공간이 있지. 이 빈 공간에 끝이 있나? 끝없이 올라가 우주와 만나. 여기에 무언가를 채우는 게 mind, 우리의 정신이고.

컵이 깨지더라도 빈 공간은 사라지지 않아. 이 빈 공간이 spirit, 영혼이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건 컵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야.'


컵의 유무와 관계없이 빈 공간은 존재하지. 라오라는 게임의 추억도 마찬가지겠지. 우리가 기억했고, 즐긴 그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테니까.



작금의 현상이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되길 바라며, 다들 좋은 하루 보내긴 바란다.







휘갈겨 쓴 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