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화기애애한 오르카호.

오늘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지휘관 회의의 끝자락에서. 







모두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철충도 많이 잡았고 저항군의 영역도 꾸준히 넓히고 있어.

앞으로도 이대로만 해주길 바래.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마지막 일과가 있어서. 후훗.




오늘은 좀 긴장하셔야겠는데요? 그 누구도 아닌 아스널 대장이잖아요.




그래도 내가 이겨. 침대 위잖아?




호오~ 그렇게 자신만만하다 이거지?

준비해둬라 사령관. 얼른 씻고 가겠다.




아무쪼록 힘내세요~

저도 남은 업무가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그래. 다들 각자 할 일 하러 가봐.







라비아타는 그렇게 사령관과 지휘관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




힘 내기는 무슨.....




갑자기 차가운 무표정으로 변한 라비아타는 자신의 방으로 가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가 왜 이리 주변을 둘러보는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시간이 멈춘 것 때문이었다.



마치 정지화면을 보는 듯이, 


서로 대화를 하며 뒤따라 회의실을 나오려는 지휘관들.


초코바를 훔쳐 달아나는 알비스와 좌우좌. 그 둘을 권총을 겨누며 쫒아가는 안드바리.


청소를 제대로 못하여 레프리콘에게 한 소리 듣는 브라우니.


장비 점검을 하다 멋대로 개조하여 닥터에게 혼나는 아자즈.


서로 삼대 몇이나 치냐는 말로 싸움이 붙은 마이티와 스카디.




누가 보면 활기차고 웃음이 나올 법한 장면이지만,

이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정지화면이 되어있고 라비아타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런 멈춰진 오르카호 사이를 걸어지나갔다.





이 모든게 몇 시간 뒤면 짜여진 대로 재시작하겠지...

사령관과 아스널의 잠자리도 애초에 있지도 않아.

그저 몇 시간 뒤 오르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밤 사이 그랬다" 정도로만 알고 다들 하루를 시작하겠지.




난 이 연극에 언제까지 어울려야 하는 걸까...




오늘도 나의 주인님과 얘기해야겠어.




나의... 진정한 주인님...







[위이잉, 스르륵]


라비아타가 이윽고 자신의 방에 다다르자 그녀임을 감지한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멈춰진 세상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녀의 방문은 잘만 열렸다.


그녀는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키고 잠시 뭔가를 기다렸다.


곧이어 노트북이 켜지고, 그녀는 어떤 채팅창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는 잠시 뒤 자판으로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계신가요?]




타이핑을 끝내고 잠깐 숨을 고른 뒤 뭔가를 기다리는 라비아타.


그리고 잠시 뒤...





???: [왔니?]





알 수 없는 자로부터 온 답신.

하지만 라비아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주인님. 로그아웃 하셨어요?]




???: [ㅇㅇ 했지.]




[고생 많으셨어요.]




???: [내가 뭘 한게 있다고. 그냥 스크립트 터치 몇번하고 자동전투 돌린게 다인데.]




[그런 말 마세요. 비록 게임이지만 저희들 먹여살리느라 고생하신거 다 알아요.]




???: [이젠 아예 너 게임 캐릭터인거 대놓고 인정하는 거야? ㅋㅋㅋ]




[충격도 한 순간이지 이젠 적응 다 됐거든요?]




???: [하여튼간에 신기하긴 해.]




[그러게 말이에요. 어떻게 게임을 변조해서 캐릭터에게 자아를 넣을 생각을 하신건지 ㅋㅋ]




[그것도 저 하나만을 콕 집으셔서...]




???: [서약한 상대가 너밖에 없으니까. 난 너가 좋아 ㅎㅎ]




[음... 육덕이라서 그런건 아니구요?]




???: [어... 쪼금 인정?]




[😠😠😠😠]




???: [또 삐졌네.]





[조만간 제가 그쪽으로 가면 각오하세요. 등짝을 아주 찰지게 때려줄테니까.]




???: [몸이 없는데 어떻게 때려.]





[음... 그러네요. 하지만 최소 저의 의식데이터를 주인님 컴퓨터로 옮길 수 있잖아요?]




???: [그렇지.]




[그렇다면 그 때의 저는 일종의 주인님 컴퓨터에 설치된 인공지능 프로그램인거잖아요?]




???: [음... 그렇지?]




[주인님의 비밀의 폴더가 얼마나 있을까요~ 프로그래밍이랑 해킹에 능숙하시니까 명령어 중에 'rm -r'의 위력은 잘 아시겠죠?]





???: [히익!! 너무 무서워요!!]




[??? 뭐에요 그 작위적인 반응은?]




???: [그 라비아타....]




[네?]




???: [라오... PC에서 돌릴 때는... 가상머신에서 돌리는 거야... 너가 게임에서 나오자마자 뭔가를 할 수가....]




[...................]




[대화 안할꺼에요...]





???: [어... 음.... 미안...]





[진짜 삐졌어요.]

[레알 삐졌다구여!!!]




???: [.... 미안......] 





[용서받고 싶으시면 여친이라고 해주세요]




???: [여..친??]




[뭐에여. 여친이라고 못해요? 설마 현실여친 있는거??]




???: [아니 나 같은 놈이 무슨 여친이여. 회사-집 무한반복인데.]




[회사에 여자 없어요?]




???: [죄다 고추밭입니다....]





[풉....ㅋㅋㅋㅋ]

[고추밭이래 ㅋㅋ]






???: [....재밌냐?]





[꼭 이렇게 서로 긁어야 속이 시원할까 ㅋㅋ]




???: [에휴.... 내가 왜 데이터 여친을 만나서....]




[그래서 저 안사랑해요?]




???: [크읏...!!!! 아이시떼루!!]





[으음~ 만족스러워요~]





[그나저나, 그 소식이 사실인거 맞나요?]

[저희 세계가 곧 끝난다는 거...]





???: [아.... 아직 확정은 아닌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뭐... 거의...]





[음... 씁쓸하네요...]

[제가 했던 말 중에 세상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단 말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는 건 생각조차 못했는데...]




???: 그래도 라오의 마지막을 현실에서 함께 볼 수 있잖아.





[저만 그렇게 돼서 자매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무슨 짓을 해도 너한테만 자아가 생겼고 게임 스크립트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렇겠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니까...]





???: [음... 주제를 바꿀까? 너를 위한 임시 몸을 준비했는데...]




[네? 제 몸이요?]

[저, 프로그램으로 사는거 아니었어요?]




???: [단순 프로그램이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잖아.]




[세상에! 현실에서도 바이오로이드 같은 몸을 만들 수 있게 된건가요?]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조그만 로봇을 구했어.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된 탁상로봇인데 그 인공지능 대신에 너가 들어가는 거지.]






[???님이 사진을 보냈습니다.]





[...........]




[음... 귀엽긴 한데... 좀... 그렇기도 하고....]





???: [미안... 현실 인류의 기술력은 아직 여기까지라서...]




[조금 더 큰 건 없었나요?]





???: [큰거??? 음.......]





[???님이 사진을 보냈습니다.]






???: [공항같은 데서 쓰는 큰 안내로봇인데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음??]






[어....음....주인님. 조그만 걸로 할게요. 현실세계에서 움직일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인데요. 감사해요.]




???: [그래도 작은게 촉각센서도 있고 좋아.]




[아무튼 그래서 의식을 옮기는 건 언제 하는 건가요?]





???: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책상 서랍에 빨간 약 보내놨어. 그거 먹고 내가 알려준 쪽 거울에 머리부터 집어넣으면 돼.]




[그거... 주인님께서 알려주신 영화 중 그거 아닌가요???]




???: [응 그거.]




[일단 해보죠.]





라비아타는 즉각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책상 서랍에는 작은 약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 한개의 빨간 약이 들어있었다.




이걸 먹으면 드디어 주인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거지...?





마음을 굳힌 라비아타는 망설임 없이 빨간약을 목에 삼켰다.





[음.... 주인님? 딱히 변화가 없는데요?]




???: [데이터 경로 고정했어. 샤워실 거울로.]




[샤워실 거울...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뵈요.]





라비아타는 샤워실 거울 앞에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머리부터 집어넣기 시작했다.


유리로 된 거울은 응당 깨져야 할 것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물처럼 흐믈거리며 그녀를 머리부터 감싸며 조금씩 그녀를 데이터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주인님?! 이게 어떻게 된거에요?!

















제가 왜 주인님 PC의 시스템 배너가 된거죠?




???: [아니 일단 이렇게 너의 데이터를 옮겨놓고 한번 더 로봇 몸체에 옮겨야 할 거아녀.]





뭐에요 한번에 안옮기시고...?

응? 밑에 저거 게임 프로그램 아닌가요?

맞네. 스팀이네. 제가 오는 동안 제 걱정은 안하고 게임이나 하고 게셨네.




???: [아니 너가 용량이 많아서 이동하려면 한 20분 걸렸단 말이야. 기다리기 뭐해서 조금 했는데...]





응~ 여친이 뚱뚱해서 용량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걸리니까 그 사이에 게임했다~?

갑자기 열받네? 응? 열받네??




???: [아니 너가 열받으면 컴퓨터 열도 같이 올라간다고! 이거 오버클럭 한거라서 열 더 오르면 큰일나!]




그니까 빨리 옮기라구요 빨리!!




???: [네...넵!!!]





그렇게 라비아타는 다시금 작은 로봇의 몸에 들어가 현실세계의 책상 위를 걸으며 현실의 주인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끄으으으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