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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는 아무 말 없이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사령관과 함께 온 바이오로이드들도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사령관 본인은 침입해온 바이오로이드 무리를 이끌고 도심 안쪽으로 사라졌다. 무리의 발걸음은 건물의 잔해가 떨릴 정도로 강렬했고, 땅에서 뿜어져 나온 먼지는 마치 구름처럼 하늘로 뻗어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헛웃음을 지었었다. 늑대같이 뾰족한 이빨을 가지고 있던 바이오로이드는 사령관 앞에서 혓바닥을 내밀며 애교를 부렸고, 기이할 정도로 얇고 기다란 팔을 달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사령관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다가 부끄러운 듯 팔을 접었다.

 

그 두 기종은 장화도 잘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늑대 같은 이빨의 바이오로이드는 열화우라늄 복합장갑에 사용하던 소재로 만든 치아로 장화의 와이어를 셀 수 없이 조각냈었고, 팔이 기다란 바이오로이드는 온 몸이 마치 타르처럼 늘어나는 고분자 생체 물질 소재로 만들어졌던 탓에 와이어로 수십 가닥을 묶어도 잘 잘리지 않았었다. 무엇보다도 그 둘의 공격성은 한때 사냥개라고 불리던 장화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었다.

 

그런 것들이, 한둘도 아니고 수십, 수백이 마치 잘 길들인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거리며 헤실거리는 모습을 보니 빈속에도 위액이 역류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일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령관을 보면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릴 싸움이었다면, 지금까지 싸워온 자신은 대체 뭐가 되겠냐고.

 

하지만 장화는 말없이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그녀에게 선택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잘 기른 사냥개라도 주인의 호위를 맡으려면 더 높은 차원의 충성과 실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위험한 오지에서 사령관의 경호를 맡고 있는 오르카의 대원들을 앞에서 사령관을 욕보였다간 어떤 꼴이 날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다는 냥, 뻔뻔하게 돌아가는 것은 그동안 장화가 길러온, 우울해지지 않는 몇 가지 팁 중 하나였다. 게다가 어찌 보면 정말로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모는 얼굴이 왜 그래?”

 

 

저들이 죽고 못사는 아이가 지금 자기 목을 조를 기세로 달라붙고 있었으니까. 물론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모 얼굴은 왜 점이 두 개나 있어? 엄청 이상해~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짧아? 어깨에 그림은 왜 그리고 있어? 이것도 이상해~”

 

“... ...”

 

“와, 귀에 구멍도 엄청 많아! 우리 엄마는 이런 거 없었는데.”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주둥이, 뭐가 그리 신기한지 하염없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가락에, 계속해서 자세를 바꾸는 탓에 온 사방 자국을 묻히는 신발까지.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보모 노릇에는 잔뼈가 굵었다고 생각한 장화에게 다가온 또 다른 시련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행성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에 버려진 아이들과, 수천 명의 엄마뻘 바이오로이드에게 관심을 받으며 가장 좋은 것만 받고 자란 아이의 기력과 호기심은 천지차이일 수 밖에 없지 않겠나.

 

갓 잡아올린 고등어와 냉동 창고에서 3일간 얼려놓은 고등어를 비교해보자면 비슷하게 느껴지리라, 살아있는 고등어를 본 적은 없지만 기록물에 남아 있는 자료를 보자면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장화였다.

 

 

“이모 이상해. 우리 엄마는 이모가 엄마랑 동갑이라고 했는데 이모가 더 작아.”

 

“... 원래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라...”

 

“그래도 이상해~ 엄마는 커다란데 이모는 작잖아. 왜 작은 거야? 이모는 작은 게 좋은 거야?”

 

“... ...”

 

 

세상 누가 올려다보는 걸 좋아하겠나. 홍련과 싸울 때도 언제나 고지를 점했던 장화였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언제나 높은 곳이 주는 전략적 이점 때문이라고 답할 그녀였지만, 홍련과 일자로 서면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것도 내심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홍련의 아들이라는 애가 자기 키를 보고 살살 긁고 있으니, 굳건히 지키고 있던 평정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하하, 나도 작은 걸 좋아했던 적은 없었고, 이 문신도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린 게 아니야. 애초에 나는 내 몸에 그림 같은 걸 그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진짜?”

 

“너는 엄마들이 네 몸에 그림 같은 거 그리려고 하니?”

 

 

아이는 고개를 거세게 좌우로 돌렸다.

 

 

“엄마는 내가 몸에 색칠 놀이를 하려고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해.”

 

“그래. 어린아이의 피부는 약하니까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당연하지.”

 

“이모도 피부가 약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도 내 몸에 그림 그리는 건 싫어.”

 

“그림 그리는 게 왜 싫어?”

 

“그림 그리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내 몸에 손 대는 게 싫다는 거야. 이런 문신을 하려면 레이저 같은 걸 얼마나 쏴대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아픈 줄 알면 너도 평생 문신 같은 건 안 하고 살려 할 걸?”

 

“나는 몸에 그림 엄청 잘 그리는데?”

 

 

아이가 장화의 뒷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꺼내 보여주었다. 손등에는 작은 장미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것 봐! 엄청 예쁘지? 하얀색 장미야.”

 

“그림이 아니라 도장... 아니, 그보다 도장을 찍을 거면 파란색 같이 잘 보이는 걸 하지, 왜 하얀색을 쓰는 거야? 도장에 쓰는 하얀색 잉크는 또 어디서 구한 거고?”

 

“엄마랑 아빠한테 들키면 안 되거든!”

 

 

아이는 장화의 귀에 입을 파묻듯이 가져다 대고 속닥거렸다.

 

 

“다른 이모들이 말해줬는데, 내 피부가 엄마를 닮아서 엄청 하얗대! 그래서 하얀색 도장을 쓰면 엄마 아빠 몰래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랬어.”

 

“... 어떤 이모들이 말했을지 훤하네.”

 

 

언뜻 들었을 때는 묘수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감안해봤을 때, 멍청하고 덜렁거리는 드라코나 영웅 놀이에 빠져 있는 핀토가 낸 아이디어가 분명하다. 만약 핀토였다면 자신을 향한 조카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가 없어서 진땀을 빼며 간신히 떠올린 생각이었겠지.

 

장화는 아이의 손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직 솜털도 나지 않은 피부에 하얀 장미가 떡 하니 찍혀져 있다. 분명 하얀 피부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떻게 하얀 잉크가 사람의 피부색에 비하겠나.

 

하얀색이라 보이지 않아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아이의 몸에 무해한 종류의 잉크로 찍은 도장이었으니 적당히 보고 넘어가줬겠지, 그리 짐작하는 장화였다.

 

 

“... 그래. 다 보여도 못 본 척 넘아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왜? 도장 다 보여?”

 

“아니. 내가 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 하지만 엄마 아빠 앞에서는 절대 몸에 손 대지 마라.”

 

“당연하지! 내가 바보인줄 알아? 나도 이모들 앞에서만 그린다고!”

 

“... ...”

 

 

아직 이 아이는 말 한마디면 그 이모들에게서 하루 종일 뭐했는지 토시 하나 빠지지 않고 알아낼 수 있는 게 자기 아빠란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어쩌면 좋은 일이다. 인간의 피를 절반이나 물려받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너희 아빠가 멀쩡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왜? 우리 아빠 어디 아파?”

 

“아니. 신경 쓰지 마. 그냥 푸념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면서 왜 다 들리게 이야기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장화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이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애는 자기 아빠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게 없겠구나.’

 

 

어느새 저택 안에서도 가장 좋은 방으로 들어온 장화는 그곳에 남아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 아이를 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마치 폐가에 온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장화에게로 엉겨붙었다. 거칠거칠한 이불의 면에 아이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름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전세계의 부가 집중되는 오르카 호에서 먹고 자란 아이에게는 턱없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자고로 침대란 부드러워야 함이 덕목이었돈 곳에서 자란 아이의 눈은 ‘이런 곳에서도 잘 수 있는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언뜻 살펴만 보아도 귀한 곳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것이 티가 나는 아이. 장화는 귀티라는 단어가 꼭 이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평생을 성녀처럼 살아도 절대 받지 못할 사랑과 존경을 단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받을 수 있는 아이를 보니 조금 샘이 나기도 했다.

 

 

‘... 뭐, 그래도 애니까.’

 

 

아이니까. 그 정도 사랑은 받고 자라야지.

 

능숙하게 감정 모듈을 조절한 장화는 무섭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다리가 아픈 자신은 침대 위에 앉았다.

 

 

“꼬맹아.”

 

 

아이는 놀란 듯이 장화를 보았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 왜, 또.”

 

“엄마가 나쁜 말 쓰면 안 된다고 했어! 이모들도 다 나한테 꼬맹이라고 안 해!”

 

“그럼 뭐라고 하는데.”

 

“우리 조카!”

 

 

‘우리’를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강조가 들어가 있었다.

 

 

“... 그래서 나보고 그렇게 부르라고?”

 

“당연하지! 나도 아무한테나 이모라고 안 그래! 착한 사람들한테만 이모라고 그래!”

 

“... ...”

 

 

저 ‘이모’라는 호칭을 가지고도 오르카 호가 뒤집어졌겠다는 생각은 뒤로 미룬 채, 장화는 이마를 짚고 물었다.

 

 

“... 아빠가 너보고 내가 착한 사람이라 그랬니?”

 

 

언제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가 착하고 나쁜 게 뭔지도 모를 테니, 자기 아빠나 엄마가 그렇게 말했으리라 짐작했다. 게다가 자기를 대놓고 죽이려고 했던 홍련이라면 자길 보고 착한 사람이라 말할 리가 만무하니, 남은 사람은 사령관뿐이다.

 

 

“응! 아빠가 그랬어.”

 

“그럼 그렇지.”

 

 

장화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꼬맹... 아니, 조카야. 내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희 아빠는 엄청 이상한 사람이니까 함부로 따라 하고 그러려 하지 마라.

... 아니, 말을 이렇게 하니까 좀 요상하게 들리긴 하는데, 여하튼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

 

“우리 아빠 이상한 사람이야?”

 

“... 어떤 측면에서는?”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게 생긴 바이오로이드 무리를 확성기 하나로 상대하려는 사람이 정상인일 리는 없지 않겠나. 멸망 전 인간들도 괴상망측한 성벽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지가 으스러진 바이오로이드를 상대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던 자는 없었다.

 

아니, 그뿐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바이오로이드 무리를 상대로 술래잡기를 하는 모습 봤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을 정도다. 

 

곁에 있는 메이드들이 하는 말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으레 하는 아이스 브레이킹 같은 것이라 했는데, 자기들이 봤을 때는 저 괴물들은 유난히 첫만남을 서먹해하는 성격이라 분위기를 풀려면 사령관이 고생 꽤나 할 것 같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 괴물들을 상대로도 분위기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미친놈이 아닐 리가 없지...’

 

“우리 아빠 안 이상해!”

 

“...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장화는 부디 이 명량한 아이가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상식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라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주었다.

 

 

“이상한 건 이모가 더 이상한 거 같아! 아직도 나보고 우리 조카라고 안 해주잖아! 다른 이모들은 나 볼 때마다 우리 조카라고 해주는데.”

 

“... ... 기도한 거 취소해야겠다.”

 

 

하긴, 동성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 없는 애가 정상으로 클 수는 없겠지.

 

장화는 재빨리 생각을 다잡고 아이의 명칭을 ‘조카’로 수정했다. 어차피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니 ‘우리 조카’와 ‘조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적어도 장화가 지금까지 길러봤던 아이는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랐다.

 

 

“우리 조카!”

 

 

울지도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마치 이렇게 똘망똘망하게 말하면 모두가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면 세상살이 모르는 꼬마아이의 오판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울먹이지도 않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피력하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귀여워하며 수긍했을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아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이미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당당함. 언뜻 봐도 고집이 고래 힘줄 같이 단단한 게 꼭 자기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장화였다.

 

하지만 장화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조카 정도로만 하자.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 못해.”

 

 

제아무리 발랑 까진 꼬마도 진짜 어른과 싸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만약 한다면 그건 어른을 모르는 꼬맹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눈앞에 있는 아이가 할만한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화의 생각은 정확했다.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하기 싫다고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하니 똘망똘망한 눈동자도 힘을 잃어갔다.

 

 

“... 그, 그래도 우리 조카! 나도 이모라고 불러주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굳이 덧붙여달라는 아이의 말에는 굳은 심지가 느껴졌다.

 

 

“조카.”

 

“우리 조카!”

 

“조카.”

 

“싫어! 우리 조카!”

 

 

그렇게 몇 번이나 유치한 설전이 이어졌다. 아는 단어를 다 까먹은 사람들처럼 서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꼭 다섯 살짜리 아이들의 싸움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나잇값을 못하고 있는 사람은 장화뿐이었다. 장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국 먼저 손을 들어버렸다. 다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백기를 든 것이었다.

 

 

“... 그래. 우리 조카라고 불러줄게. 대신 너도 계속 이모라고 불러줘야 한다?”

 

“아싸! 그럼 이제 계속 우리 조카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다? 알았지?”

 

“내 뒷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나...”

 

 

원래 어린애가 그렇지 뭐, 장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팔과 다리에서 힘을 뺐다. 자기도 모르게 사령관의 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호칭을 정하기 전에 비해 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전에도 충분히 부드럽다고 느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말랑말랑한 아이의 팔에도 긴장한 근육이 잔뜩 힘을 머금고 있었던 모양이다.

 

 

“히히, 있잖아, 이모.”

 

“왜, 우리 조카.”

 

“나 사실 이모한테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거 있었어.”

 

“뭔데.”

 

 

한결 분위기가 풀리자 아이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모는 왜 몸에 있는 그림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그 얘기는 아까 하지 않았나. 원래부터 있던 거였다고. 지우기 귀찮으니까 내버려둔 거야.”

 

“아니야.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니야.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건지 궁금한 거야.”

 

 

아이는 자신의 손등에 있는 하얀 장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장화는 아이가 도장과 문신의 차이를 몰라서 묻는 것이라 생각했다. 도장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도 하지만 문신은 피부 안쪽에 잉크를 박아두는 것이니까.

 

아이라면 그 차이를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장화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로 말을 돌려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왜 없어야 하는 거니?”

 

“그야 이모는 그림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이모는 옷도 엄청 얇은 걸 입고 있었으면서 엄청 커다란 잠바를 입고 있잖아. 엄청 이상해. 마치 그림을 일부로 가리고 다니려는 것 같아. 난 손등에 그림 그리고 나면 장갑 입는 것도 싫어하거든.”

 

“... 이건 잠바가 아니라 코트...”

 

“그리고 몸에 그려져 있는 그림 보면 지우개로 엄청 지운 것 같은 흔적도 있고. 
눈에 있는 점도 이상해. 우리 엄마도 눈에 점이 있는데 점 주변은 엄청 깨끗하거든. 그런데 이모 꺼 주변은 엄청 빨개.”

 

 

장화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고 있던 아이의 손이 장화의 눈 밑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도 저렇게 빨갰던 적 있었어. 엄마가 엄마 친구들이랑 내 등을 초록색 수건으로 엄청 세게 밀었었는데 그때 엄청 아팠어. 이모 눈이랑 똑같이 빨갰던 부분이 엄청 아팠어.”

 

“... ...”

 

“근데 왜 그렇게 빨간지 모르겠어. 내가 눈을 비비려고 하면 다른 이모들이 와서 나쁜 짓이라고 절대 못하게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모는 눈 주변도 빨갛고, 점도 엄청 빨게.”

 

“... 내가 그랬니?”

 

 

장화는 똘망똘망한 아이의 눈을 보았다. 그 순간에는, 단지 떠벌거리던 입을 보는 게 지겨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내 그렇게 돌아본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머리카락이 어미를 닮아 새빨간 아이인 탓에 나머지도 어미를 닮았으리라 생각한 아이의 눈은 신기하게도 사령관의 눈과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응. 그러니까 이모가 사실 눈에 있는 점을 엄청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싫어하는 게 얼굴에 묻어 있으면 닦아야 하잖아.”

“... ...”

 

“그래서 물어본 거야. 이모, 엄청 이상하다고.”

 

 

사실, 바이오로이드의 세계에서 검은 눈동자는 그리 흔치 않는 색이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출발한 삼안 기업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동양권에서 흔하지 않은 색으로 바이오로이드의 눈을 만들었고, 그것이 유행이 되어 멸망 전에는 오드아이를 가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보다도 많았을 정도였다.

 

인간에게는 가장 흔한 눈동자가, 바이오로이드에게는 가장 귀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아이는 인간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알려줬어. 나는 아빠가 다섯 살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한 곳에서 자라고 있고, 엄청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자라고 있다고. 아빠가 다섯 살이었을 때보다 내가 훨씬 똑똑하다고도 했어.”

 

 

그런 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인간이 보는 세상을 볼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이모가 싫어할 지도 모르는 얘기를 하는 게 무서웠어. 그런데 이제 이모가 우리 조카라고 불러주니까 진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어.”

 

“... ...”

 

“이모는 왜 싫어하는 걸 하는 거야? 혹시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무서운 거야? 한 번 좋아하는 걸 했다가는 다시 싫어하는 걸 할 수 없게 될까봐?”

 

 

어쩌면, 자신도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 우리 조카.”

 

 

그녀는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도 아빠가 물어보라고 한 질문이었니?”

 

“어... 나, 나는 모르겠는데? 아빠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에?”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눈동자. 더듬거리는 말투와 비규칙적으로 변한 숨소리.

 

다섯 살짜리 아이치고는 잘 숨겼지만, 장화가 보기엔 미소가 나올 만큼 뻔한 거짓말이었다. 제아무리 심계가 깊은 아이라고 해도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손바닥 꿰듯이 알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답지 않은 어른 노릇을 하려고 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날도 저물어가고 있을 터다. 사령관과 함께 온 메이드들이 따로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갈 심상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젠 이 아이를 어디서 재워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장화는 아이의 잠자리를 준비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 아! 아, 아빠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해준 말은 있었어!”

 

 

아이는 팔을 허둥거리며 장화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표정을 보면 읽힌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이모가 아니었으면 나를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했었어! 이모 덕분에 나도 무사하게 태어난 거라고... 그러니까 이모한테 가면 반드시 공손하게 인사하라고 했었어...”

 

“... ... 나, 때문에?”

 

“응! 이모 때문에! 그러니까 이모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도 꼭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했어. 그리고... 그리고 또...”

 

 

지금까지 청산유수였던 말과 달리, 아이는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리기 위해 한참을 끙끙거렸다. 머리도 똑똑한 아이가 이렇게나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들이 있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장화는 일어날 준비를 마무리하고 자기 품에 있던 아이를 반쯤 떼어놓았다. 어차피 떠올려봤자 그리 중요한 말도 아니었을 테니까.

 

 

“... 아, 맞아! 엄마가 뭐라고 했었냐면,”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겠냐고 꼭 물어보라고 했어.”

 

 

‘행복하냐’도, ‘행복해라’도 아닌, ‘행복해질 수 있느냐’.


그토록 기억하기 어려운 문장을 떠올려낸 아이는, 구슬땀을 흘리며 자기 볼살을 붙잡고 입술을 떼었다. 

 

손등에 찍힌 하얀 장미 도장이 반짝거렸다.

 

 

“이모는 평생을 힘들게 살아야했고, 그것 때문에 엄마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냐고 했었어.”

 

“... ... 엄마가 그랬니?”

 

“응. 이모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분명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을 거라고 했었어.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집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 ...”

 

 

장화는, 고개를 돌려 동물원 출입구 같은 복도를 응시했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 틀지 않은 복도 조명은 기다란 그림자를 촛불처럼 드리워 방 안까지 흩뿌려놓았다. 잡초처럼 자란 그림자에서는 아직도 죽은 주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 도시에 남아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로 다짐했을 때부터, 그렇게 돌본 아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저택의 벽 한쪽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장화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저택의 반대편으로 걸어가 흘러나오는 과거의 망령들을 저택 깊은 곳에 봉인해두었다.

 

설령 사령관이 온다고 해도 절대 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추악한 옛 흔적과 산물이, 죽은 어미의 태반을 뚫고 나온 아이의 탯줄처럼 어지러이 남겨져 있다.

 

 

[넌 평생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옛 주인의 망령이 말하지 않았나.

 

 

[내가 너를 지옥에서 태어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게 운명이라고.

 

 

“... 우리 조카는, 이모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절대 모를 거야.”

 

 

장화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아이도 조용히 답했다.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 앞으로도 모를 거야.”

 

“알려주지 않을 거야?”

 

“응.”

 

“그럼 상관없잖아! 나는 이모가 좋고, 이모가 옛날에 뭐 했는지 모르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모가 좋겠지!”

 

“... ... 하핫.”

 

 

하핫?

 

장화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들릴 리 없는 웃음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던 탓이었다.

 

아이도 그걸 눈치챘다. 순간의 웃음을 장화의 마음이 풀렸다는 것으로 착각해버린 아이가 장화를 와락 끌어안으며 몸을 기우뚱거렸다.

 

 

“아빠도 이모가 착한 사람이라고 했고, 나도 이모가 좋아! 엄마는 내가 안아주려고 하면 너무 커다래서 힘들거든! 그런데 이모는 작으니까 좋아!

귀에 구멍이 많은 것도 좋아! 엄마 귀랑 다르게 이모 귀는 재미있어! 머리카락도 짧아서 안았을 때 머리카락이 콧구멍을 간지럼 피지도 않고!”

 

“... ...”

 

“그것뿐이 아니야! 엄마가 나를 낳고 나서 몸이 많이 아픈가 봐. 닥터 누나가 바이오로이드의 출산을 도운 건 처음이라면서 엄마를 엄청나게 열심히 간호해주고 있는데, 그거 때문에 나도 엄마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못 봐.

다른 이모들이 나랑 엄청 잘 놀아줘서 괜찮기는 한데, 그래도 엄마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못 보는 건 너무 속상해. 그런데 있잖아.”

 

 

아이는 장화의 시선을 복도의 그림자에서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이모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엄마랑 닮았어!

그래서 너무 좋아!”

 

 

그 말이, 너무도 이상하게 들렸다.

 

장화는 고개를 돌려 벽에 달린 거울을 보았다. 빨간 눈동자. 빨간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눈 아래에 찍힌 두 개의 점.

 

장화는 홍련을 닮았다.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홍련에 대한 열등감을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한 바이오로이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장화는 홍련만큼이나 거울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보지도 않았고, 바닥에 고인 물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을 때, 자신의 얼굴을 보며 분노를 되새김질 하려 했을 때만이 그녀가 자신을 바라본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알려줬어. 나는 이유 없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유 없이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모를 만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주라고 했었어. 아빠도 이모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해줬으니까 나도 그렇게 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그런데 아빠한테는 그렇게 못했다고 얘기해야겠다.”

 

“... 왜?”

 

“난 이모를 좋아할 이유가 너어어무 많은 것 같거든!”

 

 

아이는 팔을 크게 펼쳐, 있는 힘껏 장화를 껴안았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의 짧은 팔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장화의 허리를 감쌀 수가 없었다.

 

 

“... ...”

 

 

그래서 장화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물었다.

 

 

“... ... 이유가 없어도...”

 

 

지어버린 죄가 컸다.

 

묻어버린 과거가 깊었다.

 

언제부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이오로이드를 죽였다.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지 않고 지금껏 도망치기만 했다.

 

언젠가, 아주 먼 미래가 되면 그 값을 지불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묻은 과거는 썩어 곪아버리기만 했다.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죄는, 용서받고 싶다 생각할수록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얼마나 많은 아이를 키워내든, 얼마나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하든,

 

그녀는 살인자로 태어나, 살인자로 살았고, 살인자로 죽을 것이다.

 

 

“... ... 이유가 없어도... 이모를 사랑해줄 수 있어?”

 

 

그럼에도, 사랑받고 싶다.

 

그 이기적인 욕심을 차마 꺼내 보일 수가 없었기에, 그녀는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말한다.

 

 

“응!”

 

너무도 쉽게.

 

그제서야 장화는 왜 사령관이 자신의 아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깨달았다.

 

어른이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말을, 아이의 입을 빌어 하기 위해서.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나는 너희에게 했듯,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걸 줄 거다.]

 

 

사령관이 그녀를 위해 처음으로 했던 말.

 

 

[지금껏 인간이 네 목을 쥐고 있었으니, 너도 한 번쯤은 인간의 목을 잡아야 하지 않겠니.]

 

 

또한, 그가 그녀를 위해 목을 내어주며 했던 말.

 

그리고 이제, 그의 독생자가 그녀를 위하여 해주는 말.

 

 

“나는 이모를 사랑해!”

 

 

장화의 머릿속에는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이유 없는 사랑이란 조건의 광오함은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순수성은 장화에겐 일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였다.

 

그녀는 다시 자리를 잡고,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이모의 태도에 짐짓 소름이 돋는 아이였지만, 이내 품 안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온기에 말없이 수긍해주기로 하였다.

 

조용히 느껴지는, 심장의 맥박.

 

그것은 사령관을 믿고 홍련을 용서하기로 택했던 과거의 장화가 주는 선물이었으며,

 

장화를 받아들인 아이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건넨 말이었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 신의 아들로 눈을 뜬 아이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아버지에게로부터 배운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 고마워.”

 

 

곧,

 

사랑이었다.

 

 

 









*

 

 

 

 

 

 

 

 

문득, 숨결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었다.

 

들숨과 날숨.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뱉는 지루한 과정의 반복.

 

무의미한 되풀이.

 

난 무언가를 반복하는 걸 싫어했다. 거기에 의미가 없다면 더더욱.

 

그런데도 그것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살아가는 관성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열심히 숨을 쉬었다. 폐가 터질 때까지 게걸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도가 찢어질 만큼 숨을 들이켰다.

 

너무도 열심히 살아왔다. 

 

살아남았다.

 

이제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일이다.

 

 

‘의욕도 없었으면서, 왜 죽어라 버텼던 거지.’

 

 

바스라지는 눈송이처럼 흩어지는 생각들.

 

돌이켜보면 그다지 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팔다리를 잘랐고, 또 그만큼 내 팔과 다리가 잘렸다. 모듈의 과부하 회로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숙면이라는 단어를 이해했을 때는 이미 내 주인이 죽은 이후였다.

 

어차피 주인의 말 한마디면 길바닥 낙엽 부스러기처럼 조용히 사라질 목숨. 행여 마리아가 잠결에 자결 버튼을 누르지 않을까,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아침까지 이어졌다가, 다음날 밤이 되면 사라졌다.

 

아니, 잊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다음날 밤에는 또 다른 이유로 두려워지니까. 

 

그러니까 결국. 나는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는 거다. 무슨 대단한 목적이나 꿈이 있던 것도 아니고, 아주 열심히 두려워하며 살았던 거다.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한 것일 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베이면 시큰거린다. 

 

팔이 부러지면 뜨겁다. 

 

발목이 으스러지면 화끈거린다.

 

그냥 그게 싫어서 죽지 않았을 뿐.

 

 

‘...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이 답답함의 근원은 조금 더 깊고, 철퍽거리는 곳에 있는 것이다. 떠오르는 의문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늘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오늘은 전기 충격기에 맞은 것처럼 삐걱거린다.

 

그래도, 뭐.

 

시간은 많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봤다. 자기를 조카라고 부르기 주저하지 않는 아이가 있는 탓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오늘은 밖에서 침입자가 오지도 않을 것이다. 저 얼빠진 사람이 인간도 못 알아보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상대로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나는 여유롭게 생각을 해봐도 된다.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라 했던 그 인간의 명령은 덤이었고.

 

그러니까 그 동안은 간만에, 천천히, 멍청한 머리 굴려서.

 

이 답답함의 원인을 찾기 위한 질문을 구태여 한 줄의 문장으로 써내려가보자면.

 

 

‘...’

 

 

왜. 죽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래.’

 

 

이건 좀 마음에 드네.

 

그러니 생각이 간단해진다. 나는 왜 죽음에는 미련을 갖지 않았던 걸까. 삶에는 겨자씨만 한 미련도 가지지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날이 있다.

 

나답지 않게 커다란 소설책 한 권만 쥐고 오르카 호를 나왔던 날. 행여나 나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누가 내 거지꼴을 보기라도 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가지고 나왔던 터번은 금세 걸레짝이 되었고, 가지고 있던 식량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는 거지만 동북아시아 끝자락, 작은 반도에서 시작해 유럽의 중심부까지 걸어가려고 한 멍청이의 말로로는 제법 적절한 꼬라지였다.

 

그래도 단 하나, 그 사람이 준 책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다녔다. 터번이 거적데기가 되고 나서부터는 소설책, 아니,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초판 인쇄본을 보호하기 위한 보따리로 썼고, 길에서 보이는 풀들 중 가장 부드러운 것들을 골라 종이 뭉치를 감쌀 끈으로 썼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만큼은 읽으려 하지 않았다. 먼 길을 가야하는 여행길에서 물을 아끼려는 사람처럼,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의 뒷이야기를 마지막 보루로 여기며 품속 깊이 묵혀두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초원 위를 걸었을까, 기억을 따라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게 되는 때가 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날에 보았던 밤하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푸르렀다는 것이었다. 

 

모래알 같은 별들이 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졌었고, 마음 가는 대로 손을 뻗어서 하늘 위에 선을 그으면 그 선을 따라 떨어지는 별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달빛이 밝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책을 펼쳤다. 들고 있던 책이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라 착각하고 있었을 만큼 오랜만이었어서, 첫 장을 넘기는 감각이 너무 어색했다.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탓에 앞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이 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별들이 달리는 하늘.

 

밝은 조명처럼 반짝이는 달.

 

아무도 없는 주변과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광활한 초원 위.

 

그리고, 이제는 잊어버린 이야기.

 

나 같은 바보도 운명이라 착각해버릴 만큼 고요한 밤이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이 쓰려고 했던 소설의 첫문장이 이리저리 적혀 있었다. 왜 이게 정식 인쇄로 넘어가지 못한 건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오늘 내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중에는 꽤 감성적인 문장도 있었고, 

 

 

「사령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사-령-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사. 령. 관.」

 

 

내 입으로 따라 읽기에는 부끄러울 만큼 이상한 문장도 있었다.

 

 

「나는 좆됐다.

이게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진짜 좆됐다.」

 

 

그냥 완벽하게 이상한 문장도 있었고.

 

다만 그렇게 무수한 괴이쩍은 문장들이 글씨체만큼은 훌륭했다. 누가 쓴 것인지는 몰라도 오돌토돌한 것이 직접 펜에 잉크를 묻혀 손수 적은 수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 문장이 유난히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휘황찬란한 필기체의 향연으로 가득한 첫 페이지에서 눈에 띄게 삐뚤빼뚤하게 쓴 문장이 하나 있었다.

 

 

「함께 해줘야 하는 아이가 있었다.」

 

 

모두가 ‘사령관’, 혹은 ‘나’로 시작하는 문장 속에서, 이것만큼은 주어가 없었다. 다른 모든 문장은 사령관이 환생한 시점을 시작점으로 두었던 반면에, 이 문장은 전혀 다른 곳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신경쓰고 있지도 않았고, 그 당시의 나는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세상의 마지막까지 함께 해줘야 하는 아이가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이 사람이 이곳에 와서 느낀 혼란과 두려움, 연민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함께 해주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두 단어로 축약된 비명소리와, 그 단어만큼 짧았다고 표현된 어린아이들의 키.

 

그곳에는 이 사람이 더치걸이란 아이를 살리는 과정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살기로 했다.」

 

 

세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이 사람이 리리스라는 사람을 살리는 과정이 적혀 있었다.

 

 

네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다섯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책장을 넘기는 마찰음이 마치 눈이 내리는 소리 같다고.

 

내 메마른 눈으로도, 별들이 질주하는 하늘이 마치 추운 겨울밤처럼 보인다고.

 

 

.사락

 

 

여섯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일곱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긴 꼬리와 함께 내리는 눈이 소복이 쌓여 갔다.

 

지난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었다.

 

지난 날에 차마 내리지 못한 눈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충분히 쌓이다 못해 날 익사시킬 만큼 쌓였던 눈들이, 아직도 쌓일 것이 있다는 냥.

 

 

.사락

 

 

그럼에도 달랐던 것은.

 

따스한 눈이었다.

 

 

.사락

 

 

그렇게.

 

몇 번을.

 

몇 번을.

 

넘기고.

 

페이지를. 넘기고.

 

백 서른 번째의 페이지를 넘기고.

 

 

.

 

.사락

 

.

 

 

이백 오십 구번째 페이지를 넘기고.

 

 

.사락

 

.사락

 

.

 

 

이백 구십 육 번째.

 

 

이백 구십 칠 번째.

 

 

이백 구십 팔 번째.

 

 

이백 구십 구.

 

 

그리고 

 

 

삼백.

 

 

.

 

.사락

 

 

그 다음.

 

삼백 하나.

 

 

수백 송이 눈이 내렸다.

 

수천 송이 꽃봉우리가 피었다.

 

 

거기서 그 사람을 보았다.

 

몇 명을. 몇십 명을. 몇백 명을.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구하고.

 

구하고.

 

구하고.

 

구해내는 이야기를.

 

 

「장화야.」

 

 

그 끝에서, 어색했던 첫 문장과 똑같은 필체의 글씨가 나를 불렀다.

 

왜 그리도 숨결을 어색해 했던 것인지,

 

왜 그리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인지,

 

왜 그리도 죽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인지,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고 있던 나에게.

 

 

「살아주렴.」

 

 

말하는 문장이.

 

그리도 처연하게.

 

 

.

 

.

 

.

 

 

사실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의 글씨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이 날 위해 준 이 책이 그냥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중 하나가 아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래서.

 

.

 

아팠어.

 

숨이 아팠어. 코끝을 스치고 지난 향취가 시렸어. 손끝이 저렸기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어.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어.

 

어느 추운 겨울날.

 

크리스마스 트리와, 싸락눈이 내리던 날.

 

저택 담장 위, 가시철조망 위로 하얗게 낀 서리가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하게 새겨진 날.

 

그리고,

 

내게 물을 건네주었던 그 아이.

 

내 첫 번째 살인.

 

그날 내가 죽였던 아이가, 그 아이만이 아니라는 걸.

 

장화를, 붉은 장화를 만든 날이 그 날이었다는 걸.

 

그걸 보는 것이, 너무 아팠어.

 

아. 파서.

 

울고. 싶. 어서.

 

.

 

.

 

...

 

.

 

 

마침내, 마지막 책장을 넘겼던 날.

 

.

 

.

 

.

 

기어코 나는 흐려졌다.

 

햇빛이 흐려졌다. 

 

달빛이 흐려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향취가 흐려졌다. 귓가가 흐려졌다. 혓바늘이 흐려졌다. 촉감이 흐려졌다.

 

몇 날 며칠을 흐려진 채, 초원 위에서 책을 품고 아이처럼 울었다. 

 

따스함에. 양심에. 힘줄이. 목청이. 손톱이. 피냄새가. 마음이.

 

둔해져서, 무심해져서, 약해져서, 잠기어서, 부러져서, 흩어져서, 떠올라서,

 

그렇게 또다시.

 

피어올라서. 치솟아올라서. 번져올라서. 넘쳐올라서. 밀려올라서. 벅차올라서. 타올라서. 쌓여올라서. 퍼져올라서.

 

그리도 마음이, 

 

먹먹해져서,

 

.

 

.

 

.

 

내 초원 위에서.

 

내가 죽인 영혼이 느껴지던 날.

 

흐리고, 흐리어, 붉디 붉은 피마저도 흐리어져,

 

쌓이고 쌓인 눈들이 마지막으로 붉은 꽃잎까지 덮어버려서,

 

마침내,

 

하얀 장미로.

 

기어코.

 

기어코.

 

.

 

.

 

.

 

.

 

.

 

.

 

 

「장화야.」

 

「장미는 5월이 되면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운데.」

 

「따스한 계절이 와서 꽃샘추위가 사라지고, 온 땅에 이미 수천 송이 꽃이 두 팔 가득 벌려도 담지 못할 만큼 활짝 피는 계절에라야 꽃을 피운단다.」

 

「그러니 장화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할 테니,」

 

「부디 부탁 하건데,」

 

.

 

.

 

원작이라면 없었을, 볼펜으로 쓰여진 필사.

 

나의 소설의 끝은,

 

이 문장으로 맺어졌다.

 

.

 

「내가 너의 5월이 되길.」

 

 

.

 

.

 

.사락

 

 

네.

 

 

.

 

 

그렇게 할게요.

 

.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네요.

 

보세요.

 

장미가 피었어요.

 

때를 놓치고 내린, 싸락눈을 맞고 하얘진.

 

.

 

.

 

하얀 장미가.

 

.

 

하얀


장화가

 

 

 

*




외전 - [하얀 장미] 完



지금까지 이 소설을 사랑해준 라붕이들에게, 외전을 쓰며 가장 쓰고 싶었던 장면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