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이전화


어느덧 해가 저문 산길 고속도로를 나아가던 도중,

엔진으로부터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인간,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


하지만 오래된 차라 어쩔 수 없었던걸까.

그리폰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차는 결국 터널 입구 앞에 멈춰섰다.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군.”

“하긴, 여태까지 기름이랑 전기가 남아있었다는 게 오히려 더 기적이었으니까."


아쉽지만 잠깐이나마 신세를 진 차와 작별인사를 나눠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거지?

철충이 이 근처에도 매복하고 있나?


"얼마나 더 가면 돼?"

"이 터널만 지나면 등대로 갈 수 있어요."


콘스탄챠 말대로, 정말로 등대가 꽤나 가깝게 보인다.

대략 한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거리.

만약 차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긴 커녕 지금도 철충이랑 한바탕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인간! 등대 아래에 있는 걸 보면 깜짝 놀랄테니까!"

"그렇게 대단한거야?"

"물론이지! ...하지만 미리 움직였다면 기지가 습격받을 일도 없었을 게 좀 아쉽긴 해."

"완성된지 얼마 안됐으니 어쩔 수 없잖니. 그래도 주인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저 등대가 안전하다고?"

"말했잖아, 쉘터는 등대 지하에 있다고. '그거'라면 철충도 우릴 공격해오지 못할거야."

"아니, 그게 뭐길래..."

"안 가르쳐 줄거거든? 저기 등대에...어? 등대가 깜빡깜빡 하는데?"


그리폰의 말대로, 등대가 깜빡거리고 있다.

전력이 부족해서 깜빡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

누군가가 직접 등대 불을 껐다켰다 하는걸까?


"누군진 모르겠지만 모스신호를 보내고 있어. 그리폰, 해석 가능해?"

"응, 잠깐만 기다려봐..."


그리폰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눈살을 찌뿌렸다.


"나는 깊고 깊은 심연, 어둠에서 태어난 자... 태고의 어둠 속에서 검은 고독과 싸우며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이거, 딱 봐도 그 녀석인데?"

"아...그 애구나."


그 애?

누가 등대로 장난을 치기라도 하는 건가?


모스 부호를 저렇게 능숙하게 보낼 정도면 꽤나 능력이 있을텐데…

그런데 고작 저런 신호나 보내며 장난을 치고 있다고?


"누군지 알아?"

"아, 주인님. 지금 이야기하는 아이는 LRL이라는 바이오로이드에요. 지금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네요."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저런 내용을 모스로 보내는거야?"

"개성 넘치고 당찬 아이일세, 후훗. 주군, 꽤나 재미있는 아이이니 직접 만나 보는 게 더 좋을걸세."

"그리폰, 요안나, 조금만 더 빨리 가죠. 주인님께 LRL을 소개시켜 드려야죠."


아무래도 기지에 있다는 ‘그것’처럼 말을 안 해줄 모양이다.

개성 넘치는 아이이니 직접 보는 게 더 좋다는 말만 하고 있으니.

특히 그리폰은 많이 투닥거리는 사이라 편견 가득한 말만 할지도 모른다며 요안나가 놀리는 건 덤이었고.


터널에 들어선지 어느덧 한 시간.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어둠 속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전등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기동하고 있었기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폐허와는 달랐다.

전방에 철충이 없다는 것과 더불어,

칠흑같은 밤이지만 밝은 곳을 걸을 수 있다는 것도 안심이 된다.


"인간, 전방에 철충 반응이 있어. 지시를 내려줘."


이런 젠장할.

분위기 파악 못하는 놈들 같으니.


"후방은?"

“후방엔 반응없어. 이 놈들,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속셈은 아닌 것 같아.”

“그럼 저 놈들만 잡으면 된다는 거군.”

“아직 좋아하긴 이른 것 같아. 저 녀석들, 목적이 뭐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리폰의 말대로다.

이 곳은 지원군을 보내기에 적합한 길목이 아니다.

또한 대군이 이동할만한 곳도 아니다.


예상대로라면 저 앞에 있는 개체들은 많아봤자 열을 넘기지 못한다.

그 정도 수론 우릴 절대 못 막는데?

무슨 꿍꿍이지?


…!


그 순간, 저 너머에서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격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뭐, 뭐야 이거?!"

"뭔가를 터트리는 것 같군! 대체 뭘 하려는거지?"


터트린다?


…설마?


"지금 빨리 가야 돼!"

"어, 네? 주인님?"

"그리폰, 창 밖으로 넘어가서 놈들을 저지해!"

"이, 인간? 왜 그래? 갑자기..."

"지금 놈들이 터널을 무너트리려고 한단 말야!"

"뭐?!"


곧바로 그리폰이 폭발음이 들리는 곳으로 날아간다.

그로부터 5초도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나이트 칙 둘, 런처 둘 발견! 이 자식들, 미사일로 터널을 부수고 있어! 최대한 시간 끌어볼테니까 어떻게 좀 해봐!"


건물 벽을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미사일을 지닌 런처가 무려 둘이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설마 앞에 철충들이 있었을 줄이야...면목없네, 주군!"

"신경쓰지 말고 달려! 늦기 전에 놈들을 뚫어야 해!"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자, 어느새 저 멀리 시커먼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환한 전등빛과는 대조되는, 검은 빛을 띈 철충들.


그리폰 말대로 런처 두 놈이 미사일을 날려대고 있다.

하나는 터널 천장에, 나머지 하나는 그리폰을 공격하고 있다.


그나마 한 마리라서 다행이다.

그리폰을 무시하고, 두 마리 다 터널을 집중공격했다면 여기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졌테니까.


…어?

그러고 보니 나이트 칙들은?


자세히 보니 런처를 도울 법도 한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는다.

그저 런처의 근처에 조용히 앉아있을 뿐, 안광의 불조차 켜지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나이트 칙에 대한 기억.


'나이트 칙은 평소엔 중거리에서 교전하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상대가 사정거리 밖에 있을 경우엔 정조준 시스템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잠시 대기하기도 한다.'


그랬구나.

소름이 몸 구석구석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늦기 전에…! 지시를…!


"요안나, 나이트 칙이 우릴 노리고 있어!"

"알겠네! 내 주는 강한 성이니, 나를 뚫을 순 없으리!"


요안나가 곧바로 방어막을 활성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가만히 앉아있던 나이트 칙 두 놈이 일어나 공격을 가한다.


"큭!"

"요안나! 괜찮아?!"

"문제없네, 주군!"


바이오로이드는 회복이 빠른 걸까?

분명 낮의 전투 때 손목에 부담이 갔을텐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낮에 나이트 칙의 공격을 막을 때와 다르게,

숨을 고르는 기색조차 없다.


"콘스탄챠! 쏴!"

"네, 주인님!"


콘스탄챠의 총이 세 번,

터널을 부수던 런처가 파괴된다.


제 아무리 나이트 칙의 사거리가 일시적으로 증가해봤자,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요안나를 뚫을 수도 없는 놈들이, 기본적으로 어지간한 철충보다 더 먼 거리에서 저격을 가하는 게 가능한 콘스탄챠를 막을 수 있을리가.


그리폰을 견제하던 런처가 공격을 중단했다.

재정비에 들어갈 겸 견제가 아니라 터널 파괴로 목적을 바꾼 모양이다.


이 기회, 놓칠 수 없지!


"지금이야, 끝장내버려! 그리폰!"

"알았어!"


나이트 칙의 조잡한 총알 세례를 이리저리 피하며 비집고 들어온다.

이어서 런처의 발사대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그리폰의 공격.

내장된 미사일은 연쇄폭발을 일으키고, 거기에 휘말린 런처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난다.


이제 남은 건 나이트 칙 두 마리.


주요 병력은 모조리 처치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열세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총알을 퍼부어댄다.

어쩌면 우릴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일지도 모른다.


"요안나."

"맡겨주게나, 주군."


황금빛 궤적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두 철충을 깔끔히 베어낸다.


"전방에 철충 확인. 런처 둘이랑 나이트 칙 하나. 그리고 실더 하나야. 지금 당장은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진 않은데 나를 경계하는 걸 보면 인간을 죽이려고 대기하는 게 분명해."

"그 외에 다른 철충은?"

"없어. 이 근방에 있는 철충은 저 놈들이 마지막이야."

"좋아. 아직 우릴 눈치 못 챈 것 같으니까 잠시 숨 좀 돌리고 가자."


철충의 목적은 인간인 나를 죽이거나,

아니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내 발목을 붙잡으려는 게 분명하다.

터널을 파괴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실더가 여기 대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거다.

그리폰의 미사일로도 쉽게 잡을 수 없는 녀석이 시간을 끈다면…


으음…


"그리폰, 놈들의 배치는 어땠어?"

"배치? 전방엔 실더 양 옆에 런처가 서 있었고, 나이트 칙은 중간이랑 후방에 각각 하나씩 나란히 서 있던데."

"뭐?"


뭔가 이상하다.

터널을 무너트리려면 런처가 실더 뒤에 자리잡는 게 보다 나을텐데?

놈들은 비교적 하급 개체일 뿐이지, 전술도 못 짜는 머저리가 아니다.


그런데 터널을 안 무너트리는데다가 포지션도 엉망으로 짜 놓은 걸 대놓고 보여준다는 건…


“대놓고 무시하는 거네. 뭔 짓을 해봤자 니들은 우릴 못 지나간다고 몸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게 정말인가?”

“놈들이 작정했으면 실더 뒤에 런처를, 옆에 나이트 칙을 배치했을 거야. 실더와 나이트 칙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런처로 터널을 파괴하면 되니까.”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실더만 믿고 버티는 거지. 체력도 체력이지만, 탄약도 얼마 남은 건 사실이니까.”

“……”


그리폰과 콘스탄챠는 둘 다 보급을 제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곧 있으면 무기가 동난다고 말했다.

냉병기로 싸우는 요안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지만, 그녀한테만 의존할 수도 없다.

그러니 다른 개체들을 최대한 빨리 배제하고 실더한테 공격을 몰아가야 하는데…


…쉽지 않지만.

가능성은…있다!


쉴만큼 쉬었으니 다시 출발해야겠다.

언제 철충이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요안나는 대체 뭘 하는 거지?


"요안나? 안 쉬고 뭐해?"

"이것 말인가? 마침 시간이 남았으니 본체를 처리하고 있었다네."

"본체?"

"이것 말일세."


요안나가 칼로 무언가를 찍어 들어올렸다.


“…!”


이게 철충의 본체라고?

뱀처럼 길쭉하게 생긴 시커먼 물체가 검에 걸린 채 덜렁거린다.


미묘하게 사람의 두개골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벌레를 연상케하는 기이한 생김새…

보기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런 느낌.

뭔가, 보고 있자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지금 이 감정은 뭐지?

좌절감, 분노, 죄책감, 무력감, 그리고...사명?

마치...누군가가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박아놓은 듯한 여러 감정들이,

심연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만 같다.


“…! …군…! …주…군…!”

“…어?”

"주군, 괜찮나?"

"어? 어어...! 괜찮아, 괜찮아!"


요안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짐은."

"응?"

"짐은 지금껏 여러 자매들을 봐 왔다네. 그리고 개중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 자매들도 있었지."

"......"


요안나의 눈이…두렵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요안나는…날 꿰뚫어보는 것 같다.


"두려워할 필요없네, 주군."

"두려워...하다니?"

"기억나지 않는 게 있다고, 모르는 게 있다고 두려워 할 필요 없단 말일세"


요안나가 격려하듯, 양손으로 내 어깨를 살며시 잡는다.


"우리가 그랬듯 주군 또한 앞으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겠지."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냥 자기 자신을 잃지만 말게나. 주군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새겨나갈 테니까."

“……”


…그런가.


…그렇다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철충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허, 적을 앞에 둔 태도가 실로 예술이군 그래."


그리폰은 한참 전에 보고했는데도 자세는 변함없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얕보인걸까.

그렇다면 이쪽도 '정중하게' 인사를 보내줘야지.


"콘스탄챠."

"네."


콘스탄챠 특제 인사.

통칭, 열화우라늄 탄이 철충들을 향해 날아든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탄이 박히는 소리가 아니라, 튕겨져 나오는 소리.


"당연하긴 하지만…대비를 해 두고 있었네."


맨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실더가 방어막을 펼쳐 공격을 막아냈다.

그에 맞추듯 다른 철충들도 하나둘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폰! 쏴!"

"오케이~!"


이럴 줄 알고 그리폰을 미리 놈들 뒤쪽에 배치해뒀다.

앞에서 날아드는 공격이라면 모를까, 실더는 후방의 공격을 잘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니 비록 다른 철충에 비해 강하다고 한들, 하급 철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지만.


미사일 폭격, 그리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길.


나이트 칙의 총구가 녹아내린다.

런처는 내장된 미사일의 폭발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실더는…


…!


"주군! 어서 피하게나! …윽!"

"요안나!"

"요안나씨!"

"요안나!"


후방의 철충이 박살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던 실더.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요안나가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죽을 뻔 했다.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지만, 그것보다 요안나가 우선이다.

요안나는…요안나는…!


"짐은 괜찮네! 주군을 보호하게나!"


나 대신 실더를 몸으로 받아낸 그녀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랜스 차지도 아닌, 전차의 돌진을 방패와 맨 몸으로 막아냈으니.


하지만 요안나의 말대로, 지금 그녀를 걱정할 상태가 아니다.

어느새 실더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저리 안 꺼져!!


그리폰이 다시 한번 미사일을 날려본다.

실더는 처음 공격을 막아냈을 때처럼, 가볍게 방어막을 활성화시켜 막아낸다.


그렇다면…!


“콘스탄챠! 붙잡아!”

"보리야!"


우선 보리로 실더를 붙잡아둔다.


지금 우리 상태, 무장으로 저 놈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터널은 산 안쪽이 아니라 바깥 쪽에 위치해 있기에 한쪽 벽이 뻥 뚫려있다.


그리고 놈과 똑바로 대치하고 있는 난, 지금 그 뚫린 벽을, 절벽을 등지고 있다.



"콘스탄챠! 신호를 주면 실더를 놔!"

"주인님?!"

"셋 셀게!"


이 방법밖에 없다.

아니면 그리폰을 제외한 나머진 무조건 여기서 다 죽는다.


"셋! 둘! 하나! 지금!"

"보리야, 놔!"


신호에 맞춰 콘스탄챠가 보리한테 지시를 내린다.

곧바로 실더가 나를 향해 질주한다.


최대한 기다렸다가…!


“……!”


살았다.

놈을 코앞까지 끌어들이고, 공격을 피했다.


우리가, 이겼다.


최후의 일격이 허무하게 빗나간 실더는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못한 채 그대로 절벽으로 미끄러졌다.

절벽 아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후우...후우...이겼...다..."


이기긴 했다.

하지만…이걸론 안된다.

고작 세 명만으론 그 한계가 명확하다.


아, 등대에 한 명 더 있댔지.

아무튼.


콘스탄챠는 내 이름을 물을 때, 비상시 ‘사령관 등록 절차’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일종의 군사 조직 소속일테고, 난 지시를 내리는 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사령관으로서 의무를 수행하는게 쉽진 않겠지.


그러니 인원을 늘리고,

인프라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세력을 늘려나가야 한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언젠가, 철충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테고.


“…인간.”


…그 전에 일단 싹싹 빌어야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무모하긴 했어.


잠깐 참회 시간을 가지고 나서, 우린 마침내 등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 등대 앞에 누가 서 있는데?"


등대 입구 앞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실루엣.

아리따운 청발이 시원한 산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휘날린다.


용사를 맞이하는 공주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체모를 누군가…

이 사람은…대체…?


"나는 깊고 깊은 심연, 어두운 어비스에서 태어난 자..."

“…?”


놀랍게도 아직 앳되보이는 여린 소녀가 당찬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게 아닌가.


"태고의 어둠 속에서 검은 고독과 싸우며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쪽 눈엔 안대,

등에는 곰인형,

옷은 성한 데가 없는,

그러나 눈빛만큼은 살아있는,

한 소녀.


겉보기엔 단순한 어린애같지만…글쎄?

철충이 근처에 도사리는 이곳을 살아가는 아이다.


봐라.

입에서 흘러나오는 의미심장한 말,

오래된 소방 도끼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

소녀가 발산해대는 분위기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보일만한 게 아니다.


"오랜만이네. LRL, 잘 지냈어? 여기에서 만나서 다행이야."

"LRL? 이씨! 내 세속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이 몸의 진명은 싸이클롭스 프린세스...황금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뭐라는거야? 너 그냥 등대 근무 바이오로이드거든? 그보다도 용케 본부에서 도망쳐 나왔네?"


역시 아는 사이가 맞았구나.

뭐, 소속이 같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말하는 데 분위기가 불편하거나 하지 않은 걸 보니 나름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윽, 넌 전생, 내가 진정한 진명에 눈뜨기 전의 나를 괴롭히던 악당이 아니더냐? 도망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 이 몸은..."

"...언제 여기 왔는지 똑바로 말 안하면 혼난다."

"크으..."

"빨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차고 씩씩해보이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위협은커녕 별다른 압박도 하지 않았는데 쭈그러드는 걸 보니 아직 애는 앤가 보다.


"히잉...라비아타가 난 걸음이 느리니까 미리 여기서 숨어 있으랬어. 좀 있으면 콘스탄챠랑 저 나쁜 놈이 구해줄 거라고..."

"그래서 예전에 있던 등대에 숨어 있었구나. 잘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신호를 보낸 건 좋은 생각이었어. 내용은 좀...그랬지만..."

"후. 후. 후. 수천 년을 살아온 이 몸의 지성을 너희 우민들이 짐작하긴 힘들겠지. 그것보다 나의 아카식 시그널을 해석하다니 제법이구나."


신호라는 말에 기운을 차린 건지, 눈을 반짝이는 LRL.

…애는 앤데, 크게 될 애네.


"하하, 재밌는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아, 혹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주의를 주겠네. 주군."

"아니야, 좋은거지. 이런 세상인데도 저렇게 씩씩하게 살아가는 거잖아."


비단 나만 이 험난한 시기에 씩씩한 모습을 대견하게 여기는 건 아닌가 보다.

콘스탄챠와 요안나도 LRL을 보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아카식? 그거 그냥 모스 부호거든? 너 요즘도 혼자서 이상한 옛날 책이나 만화 읽고 그러냐?"

"이씨! 이상한 책 아니거든?! 옛날엔 완전 인기 있었던 책이거든?! 넌 무식해서 책도 안 읽지?!"

"이게?! 콱 그냥!"

"자자, 이제 그만 하렴. 주인님도 계시잖니. 일단 인사부터 드리자."


이제야 나를 눈치챈 걸까. 좀 서운하다.


…많이는 아니고.


그런 내 속도 모르는지, LRL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주인님, 이 아이는 등대 근무용 바이오로이드 LRL이에요."

"그 이름 싫거든? 싸이클롭스 프린세스라고 불러."


…이름까지 생각해뒀어?


"그런데 주인님? 응? 그러고보니...좀 다르게 생겼네? 어? 이게...아니 이분이 혹시 그 '인간'이야?"

"그래. 네가 말한대로, 난 인간이야! 만나서 반가워!"

"우와! 처음 봐!"


LRL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듯한 얼굴이다.


...응?


"...크크크...이제야 인간의 권속을 얻게 되겠군."

"인사 똑바로 해야지."

"...안녕하세요. 싸이클롭스 프린세스입니다."


자유분방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예의는 바르네.

성품이 나쁜 것 같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랑 사이도 나쁜 것 같진 않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겠지.


"씨잉...됐어?"


...아마도.


"씨잉은 빼고. 그리고 이름 LRL이잖아. 어디서 거짓말이야?"

"거짓말 아니거든? 진명이거든? 후후후...하긴...하등한 네게 진명은 아무 의미도 없겠지."

"이걸 그냥...후...어쨌든 얘도 합류했으니 어두운 길 가기는 좀 쉬울거야. 원래 이 근처에서 감시원으로 일했으니까 이쪽 지형도 잘 알테고...야, 요즘도 지하로 내려가는 열쇠 네가 관리하냐? 지하에 '그거' 있지?"

"'그거'라면 레비아탄?"

"레비아탄? 또 이상한 설정 붙이고 있냐? 그래...그거."

"설정 아니고 진명이거든? 어쨌든 내가 가지고 있긴 한데...거기로 가려고? 본격적으로 가동하는거야?"

"그래. 이제 앞으로 '그거'에서 지낼거야."

"그래? ...그럼 따라와. 지하 엘리베이터 문은 열려져 있으니까. 혼자 내려 가기 무서...아니, 심심할까봐 기다렸으니 잘된 거네 뭐."


...무슨 일 있나?

앞장서겠다는 말과는 다르게, LRL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다.


"뭐해? 안 들어가?"

"기, 기다리거라...짐이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뭔지 생각을 좀..."


혹시...어두운 게 무서운걸까?


“……”

“……!”


조용히 옆으로 가서 손을 잡아준다.

LRL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여기선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주자.


“……”

“……”


안심이 된 모양이다.

LRL이 내 손을 꼭 잡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역시 애는 앤가 보다.


"이...이게 뭐야?"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내 시야를 가득 메운 '그것'.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그것’의 정체는…!


"어때, 인간? 헤헤...끝내주지? 이게 바로 거주형 잠수함 오르카 1호라고."

"이 잠수함이...'그거'야?"

"응, 원래는 라비아타가 바이오로이드 기지로 만든 거거든. 잘됐네, 인간. 이렇게 큰 집을 얻게 돼서?"

"어...잠깐, 이거 1호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2호나 3호도 있는거야?"

"휘우~! 예리한데! 안타깝게도 완성한 건 아직 이게 전부야. 다른 것들도 구상해두긴 했는데 시간이랑 자원이 그리 충분치 못한 관계로 완성은 이것밖에 못했다 하더라고."

"그건 좀 아쉽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오래전부터 구상한 계획도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제 이걸 타고 바다로 나가는 거구나."

"아직 시험 항해는 못했지만, 시뮬레이션은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거에요."


오, 그 말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가동시키고 싶다.

잠수하는 걸 창문으로 볼 수 있다니.

이걸 어떻게 참냐고.


"다행이에요. 이제 철충은 우릴 못 쫓아올테니까."

"응? 바다에 들어가면 되는거였어?"

"몰랐어? 철충은 바다를 워낙 싫어해서, 바닷물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왜 그 많은 것들 중에 하필 바다지...?"

"글쎄, 그건 우리도 잘 몰라. 뭐, 중요한 건 이제 쉴 수 있다는거 아니겠어?"

"그건 그래...지금 들어가서 쉬어도 되지?"

"네, 주인님. 그리폰 말대로 모두 지쳤으니 조금이라도 쉬는 게 좋을 거에요."

"드디어..."


잠수함으로 들어가서 씻고 침대에 눕자 오르카호가 기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있으면 창문을 통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겠지.


"......"


하루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걷고 달리기만 해서 그런지 눈이 점점...감...겨 온...다...

그래도...들어가는 건...보고...싶...은...데...


...쿨...


To be continued...


다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