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이전화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눈을 뜨자 콘스탄챠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어..."


그제서야 다시 생각나는 어제 일.

폐허에서 눈을 뜨고, 철충을 피해 달아나, 등대에 도착해서, 이곳 오르카호에 탑승한 것까지.


'아쉽다. 바닷속 들어가는 거 못 봤네.'


기왕이면 보고 자려고 했는데 하루종일 뛰다시피 했다보니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인걸까.

아니면 침대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잠이 잘 온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눈을 뜨면 미소를 지어주면서 주인님이라 불러주는 미녀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다니...최고잖아?"

"주, 주인님도 참..."


가볍게 농담을 던졌는데 싫은 반응은 아니다.

오히려 기쁜 걸 숨기려는 것 같은데.

이런 요망한 것.


“……”

“……”


뭔가 좀 어색하다.

...화제를 돌리자.


"그러고보니까, 어제 한 말대로라면 내가 저항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된거야?"

"맞아요, 주인님."

"그럼 뭘 하면 돼?"

"일단 주인님이 가장 먼저 하셔야 할 건..."


그래, 비록 첫날부터 큰일은 못하지만!

그래도 난 사령관이잖아!

사명감을 가져야지!


"아침식사부터 하시러 가죠."

"...엥?"

"저희를 이끄시는 입장이시니만큼 해야하실 일이 많지만, 그걸 떠나서 건강이 가장 중요한 법이에요."

"적어도 그 전에 뭐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직종이든 건강을 챙기는 걸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법이에요. 하물며 주인님은 저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인간이신데 주인님의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야 되겠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콘스탄챠 말이 맞다.

반박할 여지없는, 완벽한 논리이지 않은가.


"늦었어, 인간!"

"간밤은 편하게 주무셨는가, 주군?"

"후, 후, 와, 왔군…짐은 유구의 세월을 기다렸도다!"


콘스탄챠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미리 와 있었던 그리폰, 요안나, LRL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있는 전투식량을 뜯으며 서로 화담을 나누던 그 시간…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식사를 끝마치자 콘스탄챠는 소화도 할 겸 시설을 안내해주겠다며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와…”


바닥, 방금 들어온 벽을 제외한 모든 곳이 투명한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닷속,

위에서부터 은은하게 내려오는 햇빛에 비춰지는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주인님. 여기가 <오르카 1호>의 콕핏이에요. 주인님이 사령관으로서 하실 수 있는, 거의 모든 행동이 가능한 곳이지요."

"그럼 앞으로 여기가 내 일터라는 거야?"


믿겨지지 않네.

매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일할 수 있다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또, 여긴 다른 시설에 작업 명령을 보낼 수 있으니 참고해두시는 게 좋아요."

"그럼 거기도 안내 좀 해줘."

"그럴 예정이었어요. 주인님, 절 따라와 주시겠어요?"


처음이니까 서류 작업 같은 걸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시설만 둘러 볼 예정인가보다.

나는 콘스탄챠 뒤를 따라...


"어머! 어머! 거기 당신! 인간님 아니니?!"


처음 듣는 목소리다.

누구지?


“어…”

“안녕, 인간님?”


이 사람은…기술자인 걸까?


분홍 머리,

자기 주장이 강해 보이는 흉부,

연상미가 느껴지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여태까지 만든 이들도 그랬지만, 이 사람도 꽤나 기억에 남는 인상이다.


"정말, 콘스탄챠도 너무해. 이 언니한텐 얘기도 안 해주고..."

"아, 포츈 언니? 미안해요, 제가 잠깐 잊고 있었어요."

"포츈?"

"네, 주인님. 이 함선을 개조한 포츈 언니에요. 인사드리세요, 언니. 저희가 인간님을 모시고 왔..."

"어머! 어머! 진짜 인간님? 누나 완전 흥분했거든! 인간은 처음 보는거라 완전 감동이야!"

"어...음..."


이 사람, 말투가 특이하다.

요안나랑 LRL만 그런 게 아니었어.


"언니, 기쁜 건 알겠는데 일단 주인님께 함선에 대해 설명을 해 드려야죠."

"설명하면 이 언니가 또 전문이지. 사령관님? 누나가 설명해줄까?"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니. 주인님, 아무래도 통신 장비를 확인해야 될 것 같아서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알았어."


콘스탄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곤, 콕핏 밖으로 사라졌다.


"콘스탄챠, 너무 착한 거 있지?"

"응?"

"언니랑 사령관님이랑 둘이 편히 있으라고 알아서 빠져준 것 같거든."


하긴, 함 내를 안내해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있다고 빠진 게 이상하긴 했지.


"모처럼 배려도 해줬으니, 오붓한 시간 계속 보낼 거거든? 누나가 하나씩 안내해주고 싶은데...괜찮아? 사령관님?"


포츈이 그윽한 미소를 보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뭔가…이상야릇한 느낌이 든다.

마치 취한 듯한 즐거운 기분…?


"그럼, 안내해줘."

"역시, 사령관님도 누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구나?"

"응."

"좋아. 이제 누나만 따라오면 돼~♪"


포츈은 내 손을 잡아 이끌며 여러 시설을 안내했다.


[숙소]

"여기는 숙소야. 사령관님은 침실이 따로 있는 것처럼 우리 동생들은 여기서 지내는 거거든."

"방이 되게 많네. 지금 다 안에 있으려나?"

"완공된 지 얼마 안되서 어제 사령관님이 본 동생들 말곤 없어. 하지만 나중에 합류할 동생들은 전부 여기서 지내게 될거야."


[무기고]

"여기는 무기고, 긴급출격 같은 걸 대비해서 숙소랑 가까이 배치되어 있어."

"너무 넓은데? 여기서 무기를 찾는다고?"

"걱정 마. 기본적으로 동생들 무기는 부대별로 분류해두기도 했고, 입구의 패널에 개인용 디바이스를 인증하면 어디어디 있다고 알려주니까 문제없거든?"

"그래?"

"그럼. 그리고 무기고는 개인 휴대하기 힘든 중형이나 대형 장비 위주로 보관해, 간단한 무기같은 건 숙소에 무기보관함이 따로 있으니까 번거롭게 일일이 찾아갈 필요도 없어."


[창고]

"여기는 창고야. 필요한 물자 같은 건 다 여기다 분류해서 보관하는 거거든."

"정리가 잘되있네."

"누나가 힘 좀 썼거든. 물자 정리에 대해 잘 알진 못해도, 장비 관리 때문에 나름 아는 게 있어서."

"그렇구나."

"앗! LRL, 설마 또 몰래 참치 가져간거야? 나중에 따끔하게 주의를 줘야 되겠거든!"


[우편창고]

"여기는 우편창곤데...아직 우편이나 택배가 올 일은 없으니 그냥 이런 곳이 있다 정도로만 알아줘."


[수복실]

"여기는 수복실. 동생들 임무나갔다가 다치고 돌아오면 꼭 치료해야하는 거거든?"

"수복실이라니...병실이나 입원실도 아니고 왜 시설명을 그렇게 한거야?"

"바이오로이드는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금속 골격을 토대로 살을 입히니까 어지간한 부상도 그냥 살점이 좀 떨어지는 거에 불과하거든."

"그래서?"

"그런 부상들은 치료용액으로 빨리 회복시키는 게 가능하니까 그냥 수복실이라고 부르게 된 거야."

"...만약 그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입었다면?"

"그럴 때는 주로 골절상이나 외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여기선 그걸 치료할 기술 및 장비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단, 동생들이 다쳐서 돌아오면 누나도 슬프니까 가기 전에 몸조심하라는 말 정도는 해주면 좋겠거든?"


[연구실]

"여긴 뭔데 이렇게 넓어?"

"여긴 연구실...이긴 한데, 다른 시설들 우선 순위가 높아서 완성만 시킨 거거든? 어차피 활성화시키려면 함선 총 책임자의 권한이 필요하기도 해서 손대지 못한거지만."

"그럼 지금 활성화시킬까?"

"좋거든? 앞으로 필요해보이는 것들, 레포트로 작성해서 연구실 컴퓨터에 백업시켜뒀어. 함장실 패널로도 확인가능하니까 나중에 확인해줬으면 좋겠거든?"


[기지]

"여긴...아무것도 없네?"

"시간이랑 예산이 빠듯하기도 했고, 당장은 없어도 별 문제없는 곳이라 일부로 미완성 구역으로 남겨둔 거거든?"

"원래는 무슨 시설이 들어갈 예정이었데?"

"마침 최종본 리스트를 가지고 있으니까, 사령관님 한번 확인해보는 거거든?"

"생산소, 지원실, 바이오로이드 제작실, 장비 효율 연구실, 전투 결과 분석실, 제작 부품 핵심 생산소, 설비 부품 제작실, 카페테리아...이게 다 뭐야?"

"원래는 그 시설들 다 완성시키려고 했는데 그랬다간 운행할 때랑 비상 시 필요한 자원들 다 끌어모아도 부족해서 그렇거든..."

"후...어쩔 수 없지. 지금 당장 꼭 필요한 시설이 뭐야?"

"생산소랑 지원실이랑 제작 부품 핵심 생산소, 설비 부품 제작실이야.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해서 원하는 곳에 지정하면 자동으로 완공이 되거든?"

"좋아, 뭐하는 시설들인데?"

"우선 생산소는..."


함내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나자 어느덧 마지막 시설에 도착했다.

얼핏 보면 일종의 공장이나 연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매우 청결하다.

무슨 시설이길래 이렇게 신경을 쓰는걸까.


"공방에 온 걸 환영해, 사령관님♪"

"공방? 장비나 부품 같은 거 만드는데 아냐? 위생 수준이 거의 수복실 급인데?"

"그거야 공방은 장비랑 부품 제작뿐만 아니라 동생들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거든."

"태어난다고?"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라는 건 어제 동생들한테 들었지?"

“응, 그게 뭔진 못 물어봤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들이 편의를 의해 창조한 인조인간 정도로 생각하면 되거든?”

“그렇구나.”


뭔가 가볍게 넘어갈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자세히 물어봐야지.


"여긴 그런 바이오로이드를 제조 및 강화시킬 수 있는 곳이야. 아무래도 말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나을 것 같거든?"


포츈은 사람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배양시설 앞에 달린 패널로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일단 전투원이 많이 부족하니까, 전투원을 제조하는 법부터 알려줄게."

"지금은 전투원이 가장 중요한거야?"

"맞아. 시설 배치나 장비 관리, 수복 등 많은 일에 자원을 써야하는데, 그 자원은 바로 철충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빼내야하거든."

"그 과정에서 전투는 필연적이라는 거구나."

“정답이야. 사실 원래 철충은 선제 공격을 가하지 않는 이상, 얌전하거든? 그런데 요즘 들어 동생들한테 시비를 건다는 소문이 나고 있어.”

“절대적이란 건 없으니까.”


어쩌면 내가 나타난 것처럼, 기존의 판에 변화가 생긴 결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철충을 몰아내고 인프라를 확보 또는 생성하려면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아무튼 바이오로이드를 만드는데 필요한 건 유전자 씨앗이랑 자원이야."

"각각 어떻게 쓰이는건데?"

"유전자 씨앗은 일종의 설계도같은 거라 그걸 기반으로 바이오로이드를 제조하는거야. 자원은 육체를 구축하는데 사용되는거고."

"뭐야, 쉽네."

"쉽긴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를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지시가 꼭 필요하니까, 명령권자인 사령관님은 알아두는 게 좋을거야."

"알았어. 그럼 뭘 하면 돼?"


포츈이 패널을 톡톡 건드리며 여길 보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패널엔 왠 여자 그림이랑 사용할 수 있는 자원량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 부품이랑, 영양, 전력을 원하는만큼 지정하고 나서 제조 버튼을 누르면 되거든?"

"만들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은 있어?"

"제조하는데 드는 자원이랑 유전자 씨앗 개수, 제조한 바이오로이드를 먹여살릴만한 기반같은 것만 신경쓰면 돼."


오호...그렇단 말이지.


"좋아, 지금 유전자 씨앗이 5개 있으니까 5명 정도 만들어도 큰 문젠없겠지."

"오~지금 사령관이 짠 거, 느낌 되게 좋거든? 뭐가 제대로 걸린 느낌이려나?"

"혹시 누구누구 나오는지 알 수 있어?"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유전자 씨앗 내부를 분석할 순 없어서..."

"...이거 설마 꽝도 있는 건 아니지?"


갑자기 뭔가 쎄한 느낌이 든다.

포츈이…조금 화난 모양이다.

곧바로 날 조근조근 다그치기 시작했다.


"사령관님도 참, 인간들이 편의를 위해 만든 게 바이오로이든데 꽝이 있을리가 없잖아."

"어? 어...그렇지..."

"지금 상황에 그다지 맞지 않는 직종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꽝이라고 단정짓는건 새로 태어날 동생들한테 실례거든?"

"미안...내가 말실수했어..."


확실히, 사람으로서 하면 안되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꽝이니 뭐니 하다니.

…반성하자.


포츈도 그제서야 날 용서해주고 다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자, 사령관님 느낌 가는대로 고고고!"


패널을 조작해 제작버튼을 누르자 제조기가 조금씩 기동하기 시작한다.

여러 부품을 보아 뼈대를 조립하고, 세포조직들을 연결해 육체를 구성해나간다.

아직 누군가라고 특정할만한 모양새는 갖추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끝?


"끝난거야?"

"아니, 바이오로이드를 제조할 땐 우선 기본적인 육체부터 간략하게 구성한 다음, 일종의 안정기를 거치는거거든? 저기 각 제조기에 달린 타이머, 보여?"

"타이머?"


자세히 보니 제조기에 각각 타이머가 부착된 채 조금씩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03:45'라고 표시되어 있네.


"그럼 다 될때까지 기다려야 되는거야? 이래선 병력이 많이 필요할 때 되게 까다로울 것 같은데."

"당연하지. 생명을 창조하는 작업이니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거든! 그래서 이게 나설 차례인거야."


포츈이 꺼내든 것은 계량기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물체.

커넥터로 보이는 곳에 그걸 꽂자 제조기가 우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업이 빨리 진행되기 시작했다.


"뭐한거야?"

"제조는 섬세한 작업이라 무작정 빨리 끝내려고 하면 기계가 과부하를 일으키거든?"

"그럼 이건 과부하를 방지해주는 장치라는거야?"

"정답이야, 사령관님♪ 이 급속 완성 회로는 제조기의 연산을 보조함으로서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제조하는 걸 도와줘."


[제조가 종료되었습니다. 급속 완성 회로를 제거해주십시오.]


"저거 일회용이었어?"

"...원래는 기본 기능이었는데, 제조를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기계가 자주 고장나서 저런 식으로 바꿨다는 얘길 들었거든."

"......"


그런 뒷사정이 있었을줄이야.

잠시 멍하니 제조기를 바라보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조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사령관님! 언니, 동생 씻기고 옷 좀 입힐테니 잠시 기다리는 거거든?"


포츈은 뿌연 연기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데리고 샤워장으로 데려갔다.

잠시 후…


"당신이 제 마스터입니까?"

"응?"


새로 제조된 바이오로이드는 꽤나 개성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강렬한 붉은 빛을 띈 눈, 길게 늘어트린 트윈테일, 왼눈을 가린 안대...


얼핏 보면 LRL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말투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활발한 어린 소녀로서의 면모를 지닌 LRL,

그에 비해, 눈 앞의 소녀는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수행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사드려, 동생. 이 분이 바로 우리 사령관이야. 동생이 말한대로, 앞으로 동생의 마스터가 될 분이시기도 해."

"반갑습니다, 마스터. 타치라고 합니다. 마스터의 검으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어, 응...반가워."


뭔가 요안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앳되고 조용한 분위기.


'LRL이랑 요안나랑 함께 붙여두면 될까.'


둘 다 붙임성이 좋으니 친하게 지낼 수 있겠지.


"타치, 혹시 지금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니?"

"그렇습니다, 마스터. 제 힘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언제든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니다, 마스터."


타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패널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유전자 씨앗은 넷이나 다 남아있으니.


"사령관님, 계속 하려고?"

"지금 인원이 모자라니까 보충해야지. 혹시 식량이 부족해서 그래?"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식량이나 생필품 같은 건 가득 쌓아둬서 30명 정도는 문제없거든?"

"함은 큰데 30명 정도면...앞으로 많이 쌓아둬야겠네."

"그래서 더욱 인원을 늘려야하는 거거든? 옛날 도시같은 곳에서 식량이랑 필요한 물품들을 찾을 수 있으니까."

"일종의 탐색대같은 거네. 그런 걸 위해서도 인력을 채워야할 필요가 있는거고."


다시 제조를 돌렸다.


'01:05'

'03:12'

'04:10'


급속 완성 회로 기동...옳지, 됐다.


"안녕, 주인님? 해충처리는 아쿠아한테 맡겨줘!"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령관님. 실키라고 해요."

"익스프레스에요! 제대로 찾아온 거 맞죠?"


정원을 관리하는 아쿠아,

보급을 담당하는 실키,

배달을 수행하는 익스프레스.


그리고…


'03:32'


"반갑습니다, 사령관님. 잘 부탁드릴게요."


암살의 귀재, 팬텀까지.

아쿠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자원탐색에 유용해보이는 인재들이다.


추후에 이 멤버로 탐색조를 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면 사령관님? 동생들 보조도구 만드는 김에 군용장비도 만들어볼까?"

"보조도구랑 군용장비라면..."

"동생들이 여러 직종에 종사하긴 하지만, 대체로 힘쓰는 일이니만큼 보조도구가 필요하거든. 그리고 군용장비가 있으면 앞으로 있을 전투가 조금 더 수월해질거야."

"오래 걸려?"

"군용장비는 그리 많이 안 걸리는데 보조도구는 좀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리는게 낫거든? 아! 그리고 콘스탄챠랑 그리폰 동생들 무기도 보강하는 게 좋을거야!"

"음..."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뭔가 중요한 걸 잊었다는 느낌이 든다.

뭐더라?


...아!


"지금 점심 때 다 됐는데 같이 식사하러 갈까?"

"사령관님도 콘스탄챠랑 똑같은 말 하는 거야?"


그야…식사는 중요하니까.

내친 김에 공방 기기로 도구 제조 및 보강작업을 예약한 다음, 다같이 안면이라도 틔울 겸 식당으로 데려가서 기존의 인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감히 무기가 마스터와 겸상이라니…"

"으으...잘 지낼 수 있을까..."


타치는 같이 식사하는 걸 어색해했고, 팬텀은 다소 낯을 가렸다.

하지만 별 문제 없이 다른 이들과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공방으로 돌아와 제조실을 확인한다.

다행히 불량품은 아니었는지 아쿠아랑 익스프레스는 부드럽게 날아다녔고, 타치의 쌍검과 팬텀의 광학미채장비도 이상 무.

실키의 강화외골격도 문제 없고, 기타 장비 또한 별다른 하자는 없다.


"이런 게 있었구나."


제조된 장비는 총 세 개.

[내 충격 회로], [전황 분석 시스템], 그리고 [더미 홀로그램].

칩은 요안나, OS는 그리폰, 보조장비는 팬텀한테 쓰라고 줬다.


"벌써 하루가 다 갔네."


공방을 나서자 어느덧 해가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오늘은 함 내 시설을 둘러보는 걸로 끝났지만 내일은 뭘 하면 좋을까.

새로 제조된 인원들도 있으니 뭔가를 해야 하긴 할텐데...


"아, 주인님. 오늘 하루 잘 보내셨나요?"

"응. 덕분에. 포츈이 고마워하더라."

"언니도 참..."


슬슬 자러 침실로 돌아가던 길에 콘스탄챠와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까 전투원이나 엔지니어, 물자 관리 담당자, 민간인(?)은 다 있는데 정작 행정 업무 담당자는 못 만났네.

콘스탄챠라면 알고 있으려나?


"콘스탄챠, 누가 여기 행정을 담당하는지 알아?"

"일단...당장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저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없고?"

"네, 추후에 실무가 가능한 자매가 합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제가 행정 담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다면 콘스탄챠를 당분간 내 부관으로 일임하는 게 좋을까.

아직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잘 모르니만큼 콘스탄챠한테 배우는 게 나을 것 같다.

콘스탄챠도 사정을 설명하자 맡겨 달라고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내가 직접 판단해야 해서 보고할 일이 아니면 자기 재량으로 처리해도 되냐고 묻더라.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왠만한 일들을 대신 해주겠다면 나야 고맙지만.


"내일은 무슨 일을 해야하나..."


기대가 반, 걱정이 반. 심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며 편하게 잠을 청한다.

...내일도 별 일 없기를.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울창한 숲 어딘가.


쾅!!


단단한 무언가가 우그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숲 안을 가득 메운다.

하급 철충이긴 해도, 나름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실더가 발길질 한 번에 절명해버린 것이다.


동료가 순식간에 고철덩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철충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철의 부대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 순간,


…!…!!…


밤하늘조차 무색하게 할 정도로 밝디밝은 푸른 빛이 철충들을 덮친다.


잠시동안의 소란,

이윽고 남은 건 그을리고 타버린 나무와 곳곳에 뿌려진 쇳조각들 뿐.


무자비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았음에도 철충들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의 붉은 눈은 일제히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에 자리잡은 건 어느 산 정상에 자리잡은 등대.

이 근방에서 밤이 되면 유일하게 불이 켜지는 터널 위에 있는 곳이자,

이상하게도 어젯밤에만 불이 들어왔던 그 곳.


그리고…전우들이 인간과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곳 근처.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 철충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그들 뒤 해안가에 드리워지는, 선명한 달빛 아래 거대한 그림자.

커다란 몸집에서 쏘아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저 멀리 어두운 수평선 너머로 삼켜진다.


보는 이를 태워버릴 것처럼 타오르던 안광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도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