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한때는 인류가 이륙했던 문명을 바라보며.

그 문명을 스스럼 없이 도륙해가는 철충들을 바라보며.

그 도륙의 흔적을 메워가듯, 천천히 채워가는 수목들을 바라보며.


문명이 쇠락했기에 볼 수 있는 이토록 맑고 푸르른 밤하늘을 바라보며.

태양과 달이 자리를 비웠기에 더욱 더 밝게 빛을 내어주는 수 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홀로그램과 가상현실에서는 느낄수 없는, 우주와 자연의 맥동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별들의 노래를 바라보며.


오르카호의 패널 넘어로 밖에 바라 볼 수밖에 없음에도, 하늘은 그토록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철충들은 철의 왕자를 필두로 철의탑에 모여 소강상태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상태.

저 하늘의 별 어딘가에 숨어있을 '별의 아이'도 그 사건 이후로는 에이다마저 족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당장 오르카에 큰 위협인, 휩노스 병의 치유 방법을 나의 뇌에서 찾으려고 혈안인 레모네이드 시리즈의 위협을 그 어느 것 하나 먼저 막아내지 못하고 뒷수습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철의 왕자와 별의 아이는 유일한 지휘책인 나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레모네이드들은 내 뇌를 노리고 있다.


모두가 나를 노리고 있다.

나는 저항할 힘이 없다.

그리고 나는 저항해야 한다.


'중과부적' 이라는 말도 모자라지만, 그나마 유일한 대피책 정도는 있다.

나를 죽이거나, 사로잡는것이 목적이라면.

나를 죽이지 못하게끔 만들면 된다.


시작은 닥터와 에이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비밀의 방도 도촬하고 온갖곳에 녹음기가 있는 이곳에 비밀이 어디있겠는가.

의외로 먼저 눈치를 챈건 탈론페더가 아닌, 정비공 포츈과 아자즈였다.

"아무리 봐도 이건 형벌용 관이 아닌거 같거든?"
포츈의 볼멘소리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넘겼다.

금속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전문가보다 전문적이던, 에키드나와 더치걸에게는 휴식과 먹을것으로 입을 막았다.

"으음~ 이것이 지고의 쾌락!"

"너무 어른스러운 해결책 아냐?"

괜찮을줄 알았다.

이대로 넘기고 조용히 나만 사라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나머지는 닥터를 필두로 모두가 해결해 줄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이 이정도 금속량이면 대피용 코핀 하나 만드는거 아닙니까? 수틀리면 도망치려고."

쓸데없이 이럴때만 감이 좋았던 브라우니의 한마디에.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이 함장실과 브릿지에 망설임 없이 실탄을 포함한 공성전을 펼쳤던건 이제는 추억... 인가?

불과 일주일 전인데.


그 누구보다 냉철한 판단을 우선시 하던 마리가 레이저로 브릿지의 문을 문짝째로 지져버리고, 망설임 없이 리볼버 캐논을 갈겨버린 칸과 경첩을 정확히 저격한 레오나의 얼굴에는 그 누구보다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상황의 설명을 위해 함장실에 들어왔으나, 무적의 용이 잠금쇠를 잘라버리고, 감마가 문짝을 통째로 우그러뜨려버린 뒤였다.


...뭐야 나 없이도 협력 엄청 잘 하잖아.


하여튼, 그 소란이 있고 난 뒤, 전 부대원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느라 진땀을 좀 뺐다.

"죽음이 탈출구는 아니겠지만, 미봉책 정도는 되겠지." 라며 나를 응원해주었던 우로보로스.

고고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날 버리고 가지 말라며 울던 메이.

"나는 내가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네! 도와줘야 겠네!" 라며, 이 참에 사랑의 결실을 확실히 맺자고 나를 덮치려 시도했던 로열 아스널.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바르그.

"언니, 사령관님 좀 말려봐요!" 라는 콘스탄챠의 말에도.

의외로 아무말도 하지 않던, 그 누구보다 인간의 방식을 잘 알고 있던 라비아타.

한참을 울고는, "홀로 억겁의 세월을 견뎌야 함은 슬픈것임에 틀림 없네."며, 표지가 다 해져버린 자신의 보물, 만화책을 넘겨주던 LRL.

"도망치기라니, 어른다운 선택이야."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지워지지 않는 씁쓸한 미소를 짓던 더치걸.

"정말이지, 모두가 기껏 찾아줬는데, 도망치려고?" 눈물을 흘리며 툴툴대는 그리폰.


그 뒤로도,

다시는 그딴 소리 못하도록 가상현실로 보내버리겠다던 마키나.

같이 음독자살을 하겠다는 소완.

다 같이 불에 타버리자는 소리를 하던 브륀힐드.

"이럴때는 제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군요." 웃으면서 무서운 소리를 하던 엘리를 어떻게든 달래주었다. 

이 참에 모두가 죽고 낙원으로 가자고 선언하며 검은옷을 입고 온 아자젤과 '자살은 천국에 닿지 못하는 중죄가 되었으니 내 손으로 모두 죽이고 내가 모든 죄를 짊어지겠노라' 선언하던 사라카엘을 엔젤이 어떻게든 수습해서 데려갔던건 지금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 뒤로 기관총을 단발로 난사하며 '사랑의 도피를 시작해요!' 라며 날 관에 넣어버리려 했던 이터니티가 와서 문제였지.

이후에도.

"세상을 모두 얼려버릴거에요. 얼음낙원에서 저와 사령관님의 낙원을 만들어요."

"응, 우리 모두 함께라면, 너도 도망치지 않아도 돼."

어쩐지 성격이 서로 바뀌어버린 레아와 티타니아.

겸사겸사 끌려왔던 글라시아스와 함께 돌려보내고.

"사령관님이 도망질지 말지는 듀얼로 승부에요!" 라고 말하던 엘라를 격전의 승부끝에 돌려보냈다.

"사령관, 나 사실 뱀파이어가 아니야..." 이제와서 새삼스레 충격고백을 하는 드라큐리나를 넘어.

"니 지금 뭐라카노? 내랑 같이 우주로 도망치는게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아이가?"

문짝을 수리하면서도 해야될 말을 하던 후사르.

"어딜 도망치려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

얼굴이 빨개진채 말 하다가 도망치는 장화.

"이제 누가 내 몸을 데워주나..."

볼멘소리 하나와 함께, 손난로를 건네주던 천아를 마지막으로, 어느정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사령관님!!! 일이 이렇게 커질줄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시지 말입니다!!!"

사죄의 의미로 알몸도게자를 하려는 브라우니를 뜯어말리고, 상담후에 알몸으로 나가려다 마리에게 직접 잡혀 군기교육대에 끌려가는 모습을(사유가 성 군기 위반이랬나) 보면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이 평소의 오르카일 것임을 실감했다.


원안을 제공했던 탈론페더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AI로 내 이미지를 만들려고 시도하는중임이 발각되서 다시 한번 설교한 뒤.


브릿지로 올라갔다.

원래라면 최소인원이 대기하고 있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자신들의 동료과 내 추억들을 공유하고 있을것이다.

교단에 모여서 내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녀석들도 물론 있겠지.


브릿지의 패널을 만져, 지나간 사건 보고서들을 열람해보았다.

기억도 못하는 곳에서 깨어나 갑자기 철충에게 공격받은 이야기.

라비아타가 대검으로 날 죽일뻔한 이야기. 지금 와서는 그것때문에 어떻게든 살아있는것 같지만.

테마파크에서 있었던 인류가 저질렀던 비극과, 더 이상 나와서는 안될 환상의 에피소드를 찾던 이야기.

추억속에 갖혀 조용한 죽음을 맞던 존재들의 이야기.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해결하던 우당탕탕 수사극 이야기.

천국을 찾아나서 현재를 저버렸던 사람들의 이야기.

행사 뒤풀이로 9명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이건 누가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해둔거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속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많은 추억이 있었다.


"오빠 지금 시간 돼?"

닥터였다.

브릿지에서 내려와, 창고로 들어왔다.

알비스와 LRL도 들어오지 못할곳, 히루메 마저도 이곳의 존재는 모를 으슥한 창고.

심지어는 탈론페더와 아르망도 이곳은 모를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좋은소식과 나쁜소식 하나씩 있어, 오빠는 뭐 먼저 들을래?"

여기서 더 나빠질 이야기가 있을까.

좋은 소식 먼저 듣기로 했다.

"지휘권에 대한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쁜 소식은?"

"그게 오빠의 복제체야."

"그렇군. 함 내 전력과 자원이 어디로 사라지고 있나 했더니."

저번에 리앤을 복구할때 사용했던 기술을 응용했다고 당당하게 설명하며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자 어딘가 이상했다.

"뭐, 최소한 그녀들이 외로울 일은 없겠군."

"오빠는 지금 자신이 대체된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받아들이는거야?"

예상정도는 하고 있었지.

"왓슨."

벌컥.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창고의 문이 열렸다.

"너라면 찾아올거라 생각했지."

슬픔의 감정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키무라도 그렇고, 왓슨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말없이 떠나가려고 하는거야? 이 전지전능한 리앤을 두고?"

"얘가 있잖아."

나는 시험관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왓슨, 예전의 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 기억나?"

VR 기기에서 했던 마지막 질문.

"로그아웃 하기 전에 마지막 질문? 그렇게 해서 복원된 너는 진짜 너냐고?"

"그래,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야. 왓슨.

그렇게 네가 사라지고 대체되는 너를, 내가 너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복원된 너를 이전의 너로 느끼고, 실제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어. 결국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른거지."

"너무해."

퍽.

가슴에 약하게 주먹이 닿는다.

"진실을 모르는게 좋았을텐데."

"모르는게 좋았을 진실이라는건 없어. 왓슨."

"너도 알고 있잖아. 어쩔 수 없다는걸."

"그렇지만."

리앤을 안아주었다.

"미안해. 이게 마지막 인류로써의 마지막 방법이야."

마지막 키스에서는, 조금 씁쓸한 맛이 났다.

"비겁해, 왓슨."

"마지막까지 대단해, 오빠는."


"그럼, 비밀 유지 부탁해."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일을 맏겼어, 오빠/왓슨."


"미안해."

이틀 뒤면, 저 시험관 안의 '내가'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지독한 만우절 장난이라 말하겠지.

그 후일담에 일어날 이야기는, 내가 들을 수 없다.


격납고로 들어가, 코핀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조용히, 천천히 가라앉는다.


오르카호의 패널과 연동된 하늘을 보며.


죽지 않은 채로 영원토록 마리아나 해구 아래로 가라앉아 가는 나는.

아주 조용히, 천천히 잠들어갔다.


안녕 오르카.


안녕.

모두들.


만물의 어머니인 바다여.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에 내 몸을 뉘이노니.

마지막 남은 인간을, 우리들이 지켜나갈 마지막 비밀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