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이전화


“여기는 요정, 유령은 응답바란다.”

“여기는 유령, 신호 받았다.”

“여기는 요정, 상황은 어떤가?”

“여기는 유령, 내부에 철충 5마리를 확인했다.”

“5마리…알겠다! 놈들한테 들키지 않고 신속하게 복귀바란다!”

“라져”


곧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듯, 긴장감이 흐르는 브라우니와 팬텀.

대체 그녀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발단은 수색 작업이 종료된 시점부터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작전 수행을 요청하고 싶다고?”

“응! 아주 중요한 작전이거든!”


구조 신호가 보내진 곳 인근의 조사를 맡은 수색대가 출격할 무렵, 포츈이 나를 찾아왔다.

중요한 작전이라니, 혹시 설비나 연구에 희귀 부품이 필요한데 특정한 장소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그런 이유인걸까?


“사령관님…이건 그런 게임 아니거든? 애초에 현 상황에선 추가 설비나 연구를 할 여유는 없어.”

“그건 좀 아쉬운데…그럼 무슨 일이길래 일부러 출격 요청을 한 거야?”

“일전에 누나가 동생들 도움 받아서 등대에 신호를 설치한 거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나이트 칙 디텍터라는 강적이 두 놈이나 습격해온 것도 그렇지만, 지휘 대행 알고리즘 기능을 활성화하지 못했다면 작업조가 모조리 죽었거나 등대 지역을 신호기째로 넘겨줬어야 했을지도 몰랐을 노릇.

그걸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저번에 설치한 신호기는 대형이라 잘 잡아내기는 하지만, 신호를 방해하는 후미진 곳에는 전파가 잘 안 닿거든. 이 정도면 누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포츈이 말했던 게 있었다.


등대에 대형 신호기를 설치하면 다음날엔 소형 신호기를 설치할 거라고.


‘디텍터 신경쓰느라 세력 불리는 것에만 집중해서 잊고 있었네.’


젠장. 나 XXX, 일이 좋고, 일하고 싶고, 일과 하나되고 싶은 최후의 인간으로서 이런 스케줄이 있다는 걸 까먹다니, 반성하도록 하자.


“어째 사령관님 얼굴이 일하는 걸 깜빡 잊어 아쉽다는 얼굴인 것 같은데?”

”에이, 사람을 뭘로 보고. 기분 탓이야, 기분 탓.”

“흠…”


잠시 의심 반, 걱정 반의 눈길을 보내던 포츈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설치해야 할 곳이 여기 세 군데거든?”

“어디 보자…인근 기차역이랑 대학 병원…그리고 대학 컴퍼스?“

“이곳만큼 적합한 곳들도 없거든? 한때 사람이 많이 다니던 곳들이라 주차된 차들도 많아서 이동하는데 불편한 건 없을거야.”

“차는 왜?”

“사령관님 처음 올 때 콘스탄챠가 운전해줬잖아?”

“아.”


혹시나 해서 기록 보관소에 접속해보니 콘스탄챠가 차 문 따는 법을 업로드해둔 상태였다.

하긴, 이런 정보는 나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그럼 그 세 스쿼드의 인선 관련해서 혹시 생각해둔 거 있어? 소형이긴 해도 조립하려면 전문 지식이랄까 옮길 인원이라든가 필요할 거 아냐.”

“후훗, 그냥 적당한 위치에 두기면 하면 되니까 옮기는 사람이랑 호위 인력만 있으면 되거든. 여기 명단을 정리해왔으니 확인 좀 해줬으면 좋겠거든?”

“오우, 이렇게까지?”


명단까지 뽑아오다니, 포츈이 제대로 할 마음 먹은 모양이다.


어디 보자…


대학 병원 : 그렘린, 마이티R, 브라우니, 토모, 팬텀

기차역 : 실키, 워울프, 브라우니, 토모, 레프리콘

대학 컴퍼스 : 포츈, 익스프레스, 포티아, 아쿠아, 레프리콘


“음, 문제될 건 없네.”


비록 상세히 묘사하진 않았지만, 포츈이 명단에 올린 대다수의 인원들은 합류한 지 얼마 안된 신입들이다.

물론 당사자한테 신입이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가상 훈련을 통해 지휘 대행 알고리즘의 학습 과정을 막 끝냈거나 아직 끝내지 못한 이들을 편의 상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번처럼 내가 직접 지휘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해당 전투원의 전투 스타일을 시스템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같은 기종이라 해도 전투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번 작전은 시스템이 그녀들의 장점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느냐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돌아오면 나도 전투 데이터를 분석해 개선점이나 중요한 점을 잡아내야 하겠지만.


“하지만 그런 것보단 역시 별일 없이 돌아오는 게 최고지만.”

“사령관님?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거야?”


어.


“아, 아무것도 아냐. 그럼 잘 다녀와!”

“사령관님? 또 일 생각 한 거야? 정말! 중증이거든! 콘스탄챠한테 말해줘야겠어!”

“나, 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더 있다간 정말로 강제 휴식을 취하게 될지도 몰라 재빨리 도망쳤다.


포츈…요새 눈치가 너무 좋아졌는데…

한시라도 빨리 AGS 제조 기능을 활성화시켜 시선을 분산시켜야 할 것 같다.


“하아…어디 근사한 로봇 한 대 없나…?”


갈 곳 없는 한탄이 오르카호를 맴돌았다.


“…그래서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으흐흐, 이 자동차에 탑돌이의 AI를 연동하고 조금만 더 보강하면…”

“오! 나 이거 들어본 적 있어!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이동 포탑이란 거지!”

“스스로 움직이면서 적들을 몰살하는 자동차라니! 이게 바로 로망이지!”

“후훗, 이게 바로 탑돌이의 매력이라고요?”


대학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인근 구역에선 뭔가 심상치않은 음모(?)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기계를 위해서라면 악마한테 영혼도 팔 기세를 풍기는 그렘린.

순수하게 로망을 외치는 브라우니, 토모.


말로만 들으면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셋은 기이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신나게 자동차를 개조했다.


그리고, 그 대화에 끼지 않은 마이티R과 팬텀.

둘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변화하는 자동차를 보며 전율했다.


“저희…신호기 설치하러 온 거 맞죠?”

“네…저 셋이 철충들의 주의를 끄는 동안, 마이티R씨가 신호기를 설치하고 제가 호위하는 작전이었죠…”

“근데 왜 전 제가 작전을 잘못 들은건지 헷갈리는 걸까요?”

“……”


팬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병원 건물 앞에 어슬렁거리는 철충은 총 다섯 마리.

실더 하나, 런처 하나, 나이트 칙 셋.

누가 봐도 공격에 치중된 조합은 섬멸이 아니라 설치 작업을 하러 온 그녀들한테 있어 곤란하기 그지 없었다.


그렘린이 주변에 정차된 트럭 세 대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히히…탑돌아, 이제 넌 테크니컬이라는 최종병기로 다시 태어나는거야!”


마이티R과 팬텀은 할 말을 잃었다.

인류가 건재하던 시절, 코헤이 교단의 광신도조차 한 수 접을 수 밖에 없는 광기가, 그렘린의 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뭐…다치거나 할 일은 없겠네요. 저흰 저희 할 거나 잘하죠.”

“…네.”


마이티R이 소형 신호기를 들쳐매는 것과 동시에 팬텀도 은폐장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래도 철충을 만만하게 보다간 다치니까.’


은근슬쩍 교란용으로 홀로그램을 보내주는 건 덤이었다.


“아하하하하!! 전쟁이다! 이 꼴리는 것들아!!!!!”

“총알이나 먹어라 외계괴물아!!!!”

“이건 수류탄이야! 죽기 싫으면 까불지 말라고!!!!”


예상치못한 적의 기습에 철충들은 크게 놀라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 트럭 두 대, 화물칸에 고정된 포대의 맹공.

뒤이어 나타난 차량 안에선 적군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내던진다.


실더가 방패로 내려찍으려 하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버리고,

나이트 칙과 런처가 공격하려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환영이 시야를 가리거나, 갑자기 발 밑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약 20분 가량 지났을 무렵, 다섯 마리의 철충 중 한 개체만 홀로 서서 꿋꿋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실더라고 했지? 저 녀석 생긴 건 덩치만 커서 원딜 맞고 윽억거리기만 하다 죽는 격투게임 캐릭터 같은데 맷집이 상당히 좋네.”

“저래뵈도 성가신 녀석이라 왠만하면 분대가 다 같이 달려들어야 하는 녀석이야. 단신으로 잡으려면 최소 진심모드가 된 이프리트 병장님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에헤헤, 저 방패를 떼어내 붙이면 범퍼 역할은 잘 해내겠죠?”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도망치려 한 걸까.

아니면 침까지 뚝뚝 흘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렘린이 무서웠던 걸까.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실더는 몸에 뚫린 총구멍 속으로 어떤 이물질이 침투하는 걸 감지했다.


그리고…


콰앙!!


방패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던 실더의 기체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터져나갔다.


“어…?”

“그…설치 작업 끝났고, 주변에 철충도 더 없어서…”


알고보니 팬텀이 은폐장을 킨 채 접근해, 철충 내부에 점착 폭탄을 넣고 터트려 막타를 친 것이었다.

본인도 이를 불쾌하게 여길 거라 생각해 무안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지만…


“와! 그 투명 망토 나도 한번 입어봐도 돼?”

“역시 팬텀! 보급병 아니랄까봐 승리도 보급해주는 우리의 친구!”

“고마워요! 덕분에 내부 부품을 더 수월하게 챙길 수 있겠네요! 혹시 괜찮다면 우리 탑돌이 방패 달아주게 저 팔도 좀 잘라주실 수 있나요?”

“……”


예상치 못한 반응에 팬텀은 어정쩡하게 고개만 끄덕였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마이티R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설픈 기계 따위에 의존하다보니 마음에 병이 든 모양이니, 조만간 체력단련실로 모조리 끌고 와야겠다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듯이 저들도 운동을 하다보면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말이다.


“가라, 워울프! 저 디텍터 두 녀석을 멋지게 베어버리는 거야! 수색대로 간 녀석은 한 마리만 잡았다고 하니까 너는 두 마리 잡아야지!”

“하? 싫어. 머리에 든 게 돌진 밖에 없어서 장비도 돌격형 전투 시스템 같은 이상한 걸 받은 그 멍청이랑 날 똑같이 취급하지 마. 난 적들 사이를 현란하게 누비며, 총으로 녀석들을 교란시키는 게 좋다고.”

“그, 그럼 니가 교란시켜주면 되잖아! 놈들 시선을 끌다보면 우리 레프리콘 상병님이 멋지게 놈들을 쓸어버리면 되고!”

“…라고 말하는데? 댁 생각은 어때? 선임 아가씨?”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레프리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옆에선 실키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령관님…대체 왜…”


인류가 자취를 감춘 후 몇십 년만에 다시 나타난 사령관.

능력 있고 친절하기까지 해 호감이 갈 수 밖에 없고, 때로는 자신들한테 욕정을 느끼는 건지 은근슬쩍 가슴을 쳐다보다 들키면 아닌 척 하는, 귀여운 면모도 보여주는 인간.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령관의 결정이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부대원의 대다수가 워울프와 토모, 브라우니였으니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그 셋 모두랑 같은 스쿼드로 묶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휴... 혹시 바보가 섞여있다면, 제 말을 잘 들으라고 말해 주세요.’


자신이 작업반 2조의 리더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때만 하더라도 인선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하필 그 바보가 전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자신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브라우니의 선임 역을 맡은 이로서, 이들을 그나마 통제가능한 건 실키 상병보단 자신이 더 나을테니.


“기각입니다, 브라우니.”

“에엑?! 어째서 말입니까?!”

“나이트 칙 디텍터는 애초부터 빠르게 이동하는 적을 잘 잡아내는 데다가, 잡아내지 못하고 데미지만 주면 전황 정보를 분석 및 공유해서 다른 철충들의 명중률도 올리는 까다로운 적입니다. 그런 적을 하나도 아닌 둘을 상대로 시간을 벌라고 하는 지시는 워울프보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돼요.”

“헉! 그렇습니까?”

“마지막으로…워울프가 시간을 벌면 제가 마무리를 짓는다? 워울프가 조연 역할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나요?”

“이야~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감동적인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감동한 모양인지, 워울프의 눈엔 선망이 가득하다.

브라우니와 토모 역시 질서정연한데다 이해하기 쉬운 논리에 박수를 쳐댄다.


‘시작은 좋네요. 이대로 진행 부탁드려요.’

‘네, 실키 상병님.’


실키와 짧은 아이컨텍을 한 레프리콘은 작전을 짜자며 작업조 인원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현재 적 구성은 런처 둘, 나이트 칙 하나, 실더 하나, 디텍터 둘이에요. 주변에 엄폐물도 없으니 최대한 신속…”


브리핑을 하던 그 순간, 어딘가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온다.

살면서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마치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듯한 그런 소리가.


“가라! 무빙 탑돌이! 모든 철충들을 네 총으로 죽여버리렴!”


이어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큼지막한 터렛을 실은 트럭 두 대가 운전자 없이 철충으로 돌진하고,

그 뒤로 또 다른 브라우니와 토모가, 그렘린이 운전하는 차에 탄 채 총을 미친듯이 갈겨대는 광경을.


“어! 야, 그거 뭐야! 뭘 또 니들끼리만 재밌는 걸 하고 있어!”


낭만 주의자인 워울프가 작전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겨친 채 도로를 미끄러져가는 것은 물론,

우리 쪽 브라우니와 토모 또한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


톡, 톡, 톡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포기하면 편하다는 얼굴을 한 팬텀이, 마이티R의 차를 가리켰다.


“…타요.”


레프리콘과 실키는 아무 말 없이 차에 탑승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흰 말렸어요.”


이 한마디 빼고.


“네? 다른 작업조를 도우러 가겠다고요?”

“그래요! 모처럼 탑돌이 테크니컬 풀세트를 하나 장만했으니 시범 운용을 해봐야죠!”

“갔는데 철충은 없고 작업조 인원들만 있으면 민폐 아닐까요?”

“아뇨! 절~대 그럴리가 없어요! 철충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때나 있는, 그런 존재라 당연히 있을 거에요! 아니, 있어야만 해요!”

“……”


시범 운용을 해보고 싶다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겠는데 철충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은 또 뭐란 말인가.

마이티R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문질렀다.


“그러니까, 각자 맡은 임무가 있지 않나요. 저희 할 일 다 했으면 돌아갑시다. 괜히 가봤자 폐만 끼칠지도 모르…”

“으히히, 거기도 실더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완전체를 둘이나 만들 수 있을텐데…”

“이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빨리 가서 우리 위대한 탑돌이 캐논의 맛을 보여줘야지!”

“앗! 내 정신 좀 봐! 그럼 저흰 먼저 가볼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여기까지가 사건의 전말이에요. 음…뭐라 할 말이 없네요.”

“아니에요. 두 분은 정말…최선을 다하신 거에요.”

“마, 맞아요! 팬텀씨도 그렇게 기 죽어있을 필요 없어요!”


스틸라인 최고의 사고뭉치로 알려진 브라우니,

심성은 착하지만 상식이 많이 모자란 토모.


그러나 그 둘조차 폭주한 그렘린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음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팬텀과 마이티R은 저들을 복귀하라고 설득하긴커녕 물리적으로 데려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따라 나선 것이었다.


“핫하~! 죽어랏!!!죽어서 우리 탑돌이의 양분이 되라!!!!!!!!”


벌써 싸움을 시작한 걸까.

여차하면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 가까이 접근하던 레프리콘들은 또 한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실더의 방패를 떼어서 범퍼로 달아둔 테크니컬이 디텍터 한 놈의 다리에 달려들어 부셔버리고, 화물칸의 터렛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한다.

또 다른 디텍터가 자신을 공격하는 2번째 테크니컬한테 방해전파를 쏴서 움직임을 잠깐이나마 봉쇄한다.

허나, 디텍터를 파괴한 범퍼 테크니컬의 공격을 맞아 한 쪽 다리가 박살난 채, 두 테크니컬의 협공으로 순식간에 파괴된다.

디텍터들이 파괴된 여파로 인해 일시적으로 센서 오류를 일으킨 런처와 실더들은 워울프의 총격으로 혼란스러워 한다.

유일하게 무사할 수 있었던 나이트 칙을 다구리(?)로 때려잡은 그렘린들은 워울프와 합세해 남은 철충들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려 한 마리 만으로 스틸라인 분대 하나(레프리콘 하나와 브라우니 셋) 이상 가는 나이트 칙 계열 개체 여섯 마리를 고작 저 정도 전력으로 말살하다니.

여지껏 철충과 벌였던 교전…아니, 바이오로이드가 투입된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런 정신나간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렘린이 저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는 타입은 아닌데…설마 사령관님이 뭔가 귀뜸이라도 하신 걸까요?’


실더의 방패를 떼어달라는 요구에 눈물을 머금고 그렘린들을 향해 걸어가는 팬텀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신호기를 들고 가면서,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뿌리쳤다.

진실은, 때로는 숨겨지는 게 더 낫는 것도 있다며 말이다.


“그래서 사령관님 말씀대로 트럭에 터렛을 싣고, 내친김에 AI 연동까지 해두니까 정말 잘 잡더라고요. 언니! 덕분에 이 두 군데는 금방 끝났어요!”

“그, 그래? 언니도 정말 자랑스럽거든?”


그러고 보니 분명 저번 훈련이 끝나고 나서 사령관이 그렘린한테 탑돌이를 트럭같은 차량에 둬서 기동성을 추가하는 건 어떻냐고 했던 게 기억난다.


‘하아…우리 사령관님, 진짜 이러다간 큰일날 것 같거든? 오늘은 꼭 콘스탄챠한테 말해줘야겠어…’


자나께나 일 생각 밖에 없는 인간이 기어코 그렘린한테 독을 푼 모양이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엔지니어로서도, 바이오로이드 대 바이오로이드로서도 소중한 동생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불법 개조하려 들지도 모른다.


‘일단 군인으로서도, 작전 수행을 끝마쳤음에도 멋대로 다른 작전 구역에 들어간 건 지휘 체계에 혼란을 줄 수 있을테니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보고해야겠어.’


사랑하는 동생을 고발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내버려두면 군법 회의에 끌려갈 대형 사고를 칠지도 모르게 될테니 자신이 희생(?)하는 수 밖에.


포츈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렘린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무전이 길어지면 괜히 또 이곳으로 온다고 할 것 같으니 슬슬 끊어야…


“우리 동생, 고생했거든? 이제 오르카호…”

“마침 여기 실더 범퍼로 개조해서 이제 무빙 탑돌이들은 모두 완전체가 됐거든요! 언니 쪽도 빨리 끝나면 좋을테니 지금 거기로 갈게요!”

“뭐라고?! 그렘린? 그렘린???”


순간, 소름끼치는 말에 화들짝 놀란 포츈이었지만 무전은 이미 끊겨 있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무전기를 꺼버린 게 분명하다.


“하아…원래는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명령을 받지 않고, 기계만 만지다, 이상한 친구들만 만나서 그런걸까.

사령관한테 보고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도 혼을 내야겠다고 다짐한 포츈은 몸을 일으켜 자신과 함께 온 작업조 대원들을 바라본다.


“……”


안 그래도 런처 하나, 나이트 칙 둘, 디텍터 셋이라는 기가 막힌 조합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 대원들이 경악에 찬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유일하게 한명, 레프리콘만이 기차역으로 향한 작업조의 리더이자, 말썽꾸러기들한테 현재 진행형으로 휘둘리고 있을 자신의 동형기를 속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자, 다들 들었지? 마침 동생들이 도우러 온다니까 힘을 내는 거거든?”


실더는 없어도 디텍터가 셋이나 있으니 기습이나 속전속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전투와 각종 훈련, 그리고 전투 결과 분석실 등 전투와 관련한 사령관의 정수가 담긴 지휘 대행 알고리즘이 포츈한테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로, 정석적으로 조금씩 밀어붙이는 방법을.


오늘은 여느 때처럼 정말 아름다운 날이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는 평화로운 날.

이런 날에, 주변을 무심히 경계하던 디텍터는…


자동차가 하늘에서 날아오는 광경을 목격한다.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디텍터가 땅을 구른다.

예상치못한 기습에 당황한 다른 디텍터들이 자동차를 내던진 익스프레스를 향해 안테나를 겨누지만, 이미 아쿠아가 뿌린 소독액은 공기 중에 퍼져 유해 전파를 차단한다.


곧이어, 세 개의 불덩이가 각각 런처와 나이트 칙들을 향해 날아든다.

강력한 불길이 순식간에 철충들의 표피를 녹여내고 내부 부품들을 일그러트린다.


“…!!…!”


그제서야 포티아의 존재를 눈치챈 런처와 나이트 칙들은 관절 프레임을 향해 날아드는 못을 맞고 그 자리 그대로 쓰러진다.


“모두 고개 숙이세요!”


마지막으로 레프리콘이 후방의 디텍터들을 향해 총을 겨눈다.


“여기 받아요!”

“고맙습니다! 모두 고개 숙이세요!”


재빨리 익스프레스가 준 특제 탄환으로 재장전을 마친 레프리콘.

포츈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의 총이 불을 내뿜는다.

대 경장 전투 시스템의 기능까지 힘입어, 레프리콘의 맹공 앞에선 실더보다도 견고한 디텍터의 장갑조차 버티지 못한다.


“…젠장.”


레프리콘은 과열된 총기를 식히기 위해 공격을 멈췄다.

그러나 익스프레스의 공격을 받은 개체를 제외한 디텍터들은 방금 행해진 무시무시한 공격조차 버텨냈다.

이제 놈들은 이쪽이 공격할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동생들 건드릴 생각은 꿈도 꾸지마!”


분노한 디텍터들이 공격을 가하기 전에, 포츈이 선수를 쳐 래빗 D 필드를 전개해 유해 전파를 막아낸다.


“됐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젠 동생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거든?”


포츈은 애초에 디텍터 셋 + @ 라는 조합을 상대로 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 겸, 약한 개체들을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교전에 임한 것이었기에.

그러다 보면, 지원군이 도착할테니까.


“우와아아아아!!!! 달려라 달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굉음과 그 못지않게 울려퍼지는 누군가의 괴성.

벌써 도착한 걸 보면 분명 실키를 닦달해서 얻어낸 일회용 부스터들을 아낌없이 써버린 모양이다.


“하아…정말이지, 누굴 닮아 저러는 건지 원…”


포츈은 못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을 지나쳐 디텍터들을 향해 돌진하는 두 대의 테크니컬,

그 뒤를 따르는 광기의 그렘린 파티,

그리고 저 멀리서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얼굴로 천천히 오고 있는 이들까지.


“다들 고생이 많네요.”


달관한 듯한 레프리콘의 말에 포츈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다들 고마워~덕분에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거든?”

“에헤헤, 이번 작전엔 우리 탑돌이가 큰 일을 해줬지 뭐에요? 다들, 탑돌이를 축하해 주세요!”


브라우니, 토모, 워울프들은 그렘린의 말에 호응해 열정적으로 박수를 쳐줬고, 다른 이들 역시 내키진  않았지만 예의상 어울려 주었다.

실제로, 그렘린이 트럭과 탑돌이를 개조해 만든 테크니컬이 큰 역할을 해준 것도 사실이긴 했기에.


‘아쿠아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광기의 그렘린 파티를 제외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쿠아는 갑작스런 전투가 벌어졌을 것을 대비해 종종 작전에 투입되곤 하지만, 과도한 업무로 인해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익스프레스와 함께 오르카호로 먼저 복귀했기 때문이다.


“자, 자. 그럼 이제 우리 명예대원이 된 무빙 탑돌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이거든?”

“네?! 언니, 작별인사라니요! 탑돌이도…탑돌이들도 보리처럼 함께 가면 안되는 건가요?!”

“……”


절규하듯 애원하는 그렘린, 이건 아니라는 얼굴을 한 브라우니와 토모, 워울프들을 바라본 포츈은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면 얘네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데…


“…!”


그 순간, 무빙 탑돌이들이 머리를 돌려 캠퍼스 바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마치, 새로운 적의 등장을 눈치챈 것처럼.


“어?! 타, 탑돌아! 어딜 가는 거니?! 돌아와!!”


그렘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 저편으로 사라진 탑돌이들.

잠시 후…


…!!!…!…!!…!!!…!!…


탑돌이들이 무언가와 교전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작업조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허공을 날아 건물에 쳐박히는 방식으로 말이다.



“…!”


저 육중한 테크니컬들을, 디텍터같이 강력한 철충들도 고전시키다 끝내 몰살한 병기들을 순식간에 압도하다니.

철충이건 바이오로이드건 AGS건, 어지간한 존재는 쉽사리 할 수 없는 텐데.


…!…!…!…


그녀들의 의문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 주려는 듯,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작업조는 적이 엄청난 체급을 지닌 존재라고 확신한다.


“…숨어!”


포츈의 경고에, 모두가 신속하게 근처의 건물 내부 깊숙히 숨는다.


진동은 점점 커지더니, 무언가의 발소리가 되고, 발소리는 가까워질수록 그녀들을 무겁게 압박했다.


쿵…


그것이 철충 사체들이 있는 곳 앞에서 멈춰선다.

형태도 갖추지 않고, 소리조차 나지 않을텐데, 그녀들은 그것이 분노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쿵! 쿵! 쿵! 쿵!


이윽고, 그것은 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캠퍼스를 빠져나간다.

적이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을 걸 경계한 건지, 아니면 부품이 다 빠진 시체들을 보고 적들이 테크니컬을 버려둔 채 이곳을 진작에 떠났을 거라 판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작업조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방금 그 놈…뭐야?”

“몰라…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려다가 눈 마주칠까봐 나오지도 못했어.”


테크니컬 완전체 둘을 순식간에 파괴한 것만으로 그녀들은 확신했던 것이다.

15명에 달하는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것은 이길 수 없다고.


“설마 저렇게 강력한 개체가 이 부근에 있었을 줄이야…일단 임무는 달성했으니 빨리 복귀하는 게 나을 것 같거든?”


포츈이 함장실에 연락하러 패널을 꺼내든 순간, 사령관의 얼굴이 표시되었다.


“사령관님! 여기…”

“포츈! 지금 어디야!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작업은 나중에 하고 빨리 돌아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한 얼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포츈은 잔뜩 굳은 얼굴로 작업조 대원들을 신속히 통솔해 오르카호를 향해 출발했다.


그렘린 일러 고려하면 2스 토템 크기가 고증에 맞지 않지만 재미를 위해 키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