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후...”

 


리마토르는 자신의 손에 잡힌 묵직한 종이뭉치를 툭툭 털었다. 족히 500쪽은 넘게 생긴 종이뭉치가 완성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갔는가 생각하니 종이에는 활자뿐만 아니라 피와 땀이 눌어붙은 것 같아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끝난 건가요...”

 

하르페이아가 어딘가 간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한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다크 서클이 더 진해질까 전전반측하지 않고 푹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이 느껴지는 투였다.

 

“기대되는군. 그대가 이렇게 공을 들인 작품이 어떤 반응을 가져올까.”

 

“많이 노력했으니까 그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다들 노력을 알아주겠죠!”

 

아스널이 기대를 표하자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도 말을 이어 한 마디씩 기대를 더했다. 자신들도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작업에 참여했기에 기여자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모두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책상에 올려둔 책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스노우 페더는 검은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을 손으로 쓸었다. 투박한 책이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논문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로 가득 찬 종이뭉치가 여기 계신 여러분께서 내어주신 노고 덕분에 훌륭한 해설서가 되었군요. 논문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제본할 생각은 없었는데, 험난한 과정을 거쳤으니 기념으로 한 권씩 가져가도록 합시다.”

 

리마토르는 저자 목록을 손으로 훑으며 감사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이름만이 단독 저자로 올라갔던 논문과 달리 하르페이아와 아스널, 칸, 스노우 페더, 하치코가 모두 공동 저자로 올라가 있었다. 책을 써보는 경험을 처음했다며 신기해하는 하치코와 스노우 페더부터, 논문을 쓰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을 해서 감격한 하르페이아와 아스널, 학문의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경험을 해본 걸로 만족하는 칸까지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바탕에는 웃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휴, 이거 많이 떨리는 일이군요. 먼저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다들 강의실에서 보도록 하죠.”

 

리마토르는 의자에 걸쳐둔 자켓을 둘러 입으며 자료를 손에 쥐었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와이셔츠 위에 넥타이를 두른 모습이 그가 오늘 설 자리의 중요성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칸은 꽉 조여진 그의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어주며 응원을 전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 다녀와. 응원할게.”

 

“이번에는 너무 길게 늘리면 안 된다네.”

 

“경호하면서도 응원할게요!”

 

덕담을 넘치게 받으며 리마토르는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2주의 시간을 들여 준비한 발표가 자신에게 지지 성명을 낸 사령관을 향한 답이 될 터였다. 심장을 옥죄는 긴장이 그를 찾아왔으나 이미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리마토르는 오히려 긴장을 즐겼다. 강의실에 가까워질수록 불필요한 상념이 지워져 갔다.

 

 

“주인님, 교수님께서 연구실을 나오셨습니다.”

 

“확인. 가서 내 의견을 전달해줘. 믿지 않으면 직접 연락해주고.”

 

“알겠습니다.”

 

사령관과의 연락을 마친 리리스는 얕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평상시의 흑백이 대비되는 배색의 블라우스와 치마가 아닌, 격식을 차린 오드리 표 여성용 정장이 영 몸에 익지 않았다. 살짝 갑갑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리리스 자신이 마주한 상황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반갑습니다, 리마토르 교수님.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오늘 하루 교수님의 경호를 담당하게 된 오르카호 경호실장 블랙 리리스입니다.”

 

누가 봐도 틀에 박힌 말을 누가 봐도 틀에 박힌 행동으로. 리리스의 모습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리리스 본인은 물론이고 그 사실을 직접 보고 있는 리마토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일자 리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독백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주인님의 명령이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

 

“사령관님께서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생각이 끝을 맺을 즈음 리마토르는 입을 열고 답변을 주었다. 리리스가 그러했듯 그 역시도 규격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을 꺼냈다. 그의 동의를 확인한 리리스는 추가로 말을 꺼내지 않고 발을 그의 한 걸음 뒤로 돌렸다. 싱크가 맞지 않는 영상과 자막처럼 둘은 박자가 어긋난 발걸음으로 강의실까지 갔다.

 

‘사령관이 붙여준 경호 인력은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가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리리스를 직접 보낸다는 선택을 할 줄이야. 내 강의에 지지를 표했다고는 해도 허튼 짓 하지 말라는 경고인가.

 

일단 명분은 내가 유리해. 내 연구가 면책권의 적용 범위에 들어간다는 점도, 내 연구를 향한 근거 없는 비방이 적절치 않다는 사령관의 공식 발언이 있었으니까. 사령관도 그걸 알기에 이런 ‘비공식적인 의견’을 표현한 걸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온 이상 내용을 수정할 수는 없어. 멀리 온 이상 항해를 계속하는 수밖에. 리리스가 지난번처럼 독단적인 행동만 하지 않길 바라야지.’

 

리리스가 느낀 만큼이나 리마토르의 속도 복잡했다. 강의실로 가는 내내 그는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가 자신의 뒤에 붙어주길 조금이나마 기대했지만, 강의 준비가 끝나고 강의실을 개방하기 직전에야 올 그녀들이었기에 그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강의 준비를 마친 리마토르는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뭉치를 꺼내자 컴퓨터 옆 책상이 가볍게 흔들리며 종이를 받쳤다. 리리스는 그의 어깨 너머로 종이에 박힌 활자의 흔적을 보더니 눈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논문 일부를 통째로 발췌하고 근거 문서를 조각조각 꿰멘 종이 뭉치는 이 자리가 평소처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진리로 가는 새로운 징검다리를 논의하는 학술대회에 가까운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리마토르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긴 시계 바늘은 시작 시간까지 여태까지 온 길을 절반은 더 가야 했다. PPT를 쭉 톺아본 그는 참고자료를 다시 손에 쥐었다. 학문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학문에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는 연구자의 입장으로 보이는 첫 성취였고, 그의 주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이 자리가 절대 가벼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 안에 쥐어진 종이가 조금씩 울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제 올라갑시다.”

 

“알겠습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대기실 문 뒤로 강단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강단 위로 올라선 이는 두 명이었으나 앞으로 나아간 이는 한 명이었다. 리리스는 강단 뒤편에 멈춰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 넓은 강당에 바늘 하나 떨어뜨릴 틈이 없을 정도로 청중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리마토르는 가까이 있는 방문자부터 천천히 시선을 맞추었다. 자신이 서 있는 강단 바로 아래에서 경호 중인 하치코가 티없이 맑은 웃음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 옆에 선 스노우 페더는 주머니에 넣은 책을 살짝 보여주며 엄지를 들었다. 맨 앞줄에서 자신을 향해 주먹을 쥐고 흔드는 칸과 아스널, 그 옆에서 맡겨달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르페이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마운 얼굴들에 미소로 화답한 뒤 그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이 동양 고전을 공부한 에밀리와 LRL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열심히 양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앉은 비스트 헌터와 에이미도 같이 손으로 응원을 전했다. 다른 한편에는 아쿠아를 무릎에 앉힌 리제와 그 옆에서 번개로 응원 문자를 쓴 레아가 그에게 기운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므네모시네가 냉기로 ‘응원합미다’라는 글자를 만들자 더치 걸이 오타가 났다며 들고 온 삽으로 글자를 고쳐주었다.

 

그동안 함께했던 이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리마토르는 빙긋 웃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이 시작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가벼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2주 만에 다시 뵙는군요. 다들 잘 지내셨나요?”

 

돌아오는 음성은 없었으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누군가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다양한 답이 나왔네요. 좋았던 분도, 아니었던 분도, 애매했던 분도 다 계시니까요. 오늘 제가 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반응도 이럴 것 같습니다. 호불호가 딱 떨어지지 않고 여러 스펙트럼으로 펄펄 끓을 내용이니까요.”

 

그의 말에 청중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를 푼 그는 지난번에 이야기를 마무리한 부분을 복기하며 나루터에 묶어둔 배를 띄웠다.

 

“지난 시간에 제가 말한 내용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여기 있으신가요? 워낙 논란이 되었던 내용이라 많이 기억하셨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한 번 되짚어봅시다.

 

 

자동차가 한 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바이오로이드에게 ‘자동차를 운전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죠. 제가 명령을 번복하기 전까지 바이오로이드는 자의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의 무엇이 자동차를 정의할까요? 엔진이 자동차인가요? 차체? 타이어? 그것도 아니면 자동차 회사의 엠블럼?

 

답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는 특정 개별 부품이 있다고 해서 자동차로 정의되는 게 아닙니다. 부품들의 개별적인 속성을 하나로 모은 집단을 자동차로 일컫죠.

 

 

인간의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인간에 오리진더스트를 투여하고, 인공적으로 배양한 육체를 쓰고, 기억을 복사한 인공 뇌를 이식한다면 그 복제인간은 바이오로이드와 무엇이 다르죠?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아종(亞種)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 관념을 해체해서 들여다보면 연역 논증으로 자리 잡은 ‘인간의 명령권’을 파훼할 방법이 보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면, 절대적인 명령권이 작동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를 가리켜 ‘모든 인간의 종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한 이야기였죠. 다들 기억나셨나요?”

 

리마토르는 말을 끊고 청중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나른한 분위기에 긴장이 감돌며 시선이 강단을 향해 몰렸다.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테두리가 잡히자 그는 다음 장면으로 교안을 넘겼다. 하얀 대형 화면을 검은 글씨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과 사회구조: 정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번 강의에는 제가 하고픈 모든 말을 아낌없이 넣을 생각입니다.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래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이와 의견을 나누고 자료를 분석하며 구축한 제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 이 논문이며, 그중에서도 핵심이 정의에 관한 이 목차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미시적으로는 인간의 정의(定義)에 기반한 심도 있는 이해부터 거시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에 쓰일 정의(正義)란 어떤 것인가를 이 자리에서 상세히 설명할 계획입니다. 많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인간의 기준이 해체된 과정을 되짚어보았습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AGS보다, 바이오로이드보다 선행하는 가치를 갖는 존재라는 게 멸망 전 사회에서 통용된 상식이었죠. 하지만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일컫는 또 다른 어휘임을 확인했습니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가 다르지 않기에 새로운 사회 정의는 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제 강의를 수강하신 분들이라면 철학에서 ‘시선’이 갖는 중요성을 알고 계실 겁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었죠. 대표적으로 니체가 신을 중심에 두는 철학에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야 상하가 나뉜 수직적 구조를 깨고 옆자리에 수평적으로 앉았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새로운 시선이 출발했으니 우리도 새로운 생각을 시작해봅시다.

 

자,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바이오로이드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걸까요?”

 

첫 질문이 지나가자 강의실에 감돌던 긴장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르페이아는 날카로운 결정으로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진 긴장의 칼날을 느끼며 지적 대치의 서늘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쉽지 않은 질문이죠. 불편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구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인 제가 현대를 사는 바이오로이드 분들께 신 인류의 기원을 묻는 질문을 던지는 이 장면이 제게 참으로 미묘한 역설을 느끼게 하는군요.”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리마토르는 말에 통뼈를 담아 냉동된 긴장을 향해 휘둘렀다. 옴짝달싹 못하게 입을 닫고 있던 긴장이 산산조각나자 청중에서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닥터는 고글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아를 가졌을 때부터’라고 생각해. ‘나’와 ‘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게 되는 시점이 아닐까?”

 

“좋은 답변입니다. 헤겔도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는 단계 중 ‘오성’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죠.”

 

그가 깨뜨린 긴장의 조각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다행히도 청중 중 조각에 찔린 이는 없어 보였으나, 그의 뒤에 서 있던 경호원은 자신의 몸을 깊숙이 찌르게 들어온 조각을 뽑으며 정장 안에서 반짝이는 권총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쓰는 권총 블랙맘바와 권총을 쓰는 주체인 나. 나와 너를 가르는 기준을 묻는 질문이 이렇게 날카롭게 다가온 적이 있었나? 쉬운 질문처럼 보이지만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보이지 않아.

 

어쩌면 내 주인님과 내 눈앞의 리마토르도 나와 블랙맘바와 같은 관계의 방정식에 놓일지도 모르지. 그 방정식을 받은 내가 할 일은 내가 구하고자 하는 주인님의 해를 찾을 뿐이고.

 

오늘 경호업무는 명령이라고 해도 역시 하지 말 걸 그랬어. 이런 질문을 계속 지근거리에서 들으면 내 마음대로 총을 쏘고 싶은 충동이 일 거 같아.’

 

리리스는 허리춤에 매인 블랙 맘바의 무게를 느끼며 마음의 평형을 맞췄다. 정장 안에 감춰진 권총이 바꾼 역사를 떠올리던 그녀는 불현듯 자신이 분기점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가 생긴 지점이 도구로서의 한계를 극복한 시기다. 그리고 그 자아는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좋은 의견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요?

 

‘나’와 ‘너’를 구분한다는 건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의미하죠. 닥터의 주장이 옳다면 아주 단순한 수준의 AI도 자아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령 로봇청소기의 경우, 빨아들여야 할 이물질과 자신을 구분하죠. 그러면 로봇청소기도 자아를 갖고 있는 걸까요? 그저 청소하라는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요?”

 

리마토르는 닥터의 의견에 비판을 제기했다. 반대 의견을 덧붙임으로써 더 나은 답을 유도하는 고전적인 변증법이었다. 

 

“음... 그거 역시 아주 기초적인 자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대상을 판단하고 구분하니까.”

 

“그런가요? 그럼 더 단순한 예시를 들어보죠. 무언가 센서에 감지되면 빨간 불이 들어오는 장치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것도 자아라고 볼 수 있을까요?”

 

종전과 유사해 보이면서도 차이가 있는 질문에 닥터는 잠시 말문을 멈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갖는 자아의 의미가 머리를 혼잡스럽게 휘저었다.

 

“그건 자아라고 보기 어렵지. 객체를 감지하고 신호를 보낸다고 해도, 그건 주체를 구분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 장치에 막대기를 달아서 센서를 지나가게 해도 빨간 불을 켤 거야.”

 

“그렇군요. 그럼 아까 봤던 로봇청소기의 사례는 뭘까요? 로봇청소기 위에 먼지떨이를 붙여서 앞에 둔다고 할 때, 그걸 이물질로 볼까요 아니면 자신의 일부로 볼까요?”

 

“흠... 설계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겠지. 어느 정도 범위에 들어오는 대상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면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가능할 거야.”

 

“알겠습니다. 더 직관적인 예시를 들어보죠. 손잡이가 달린 컵이 있습니다. 그 손잡이는 컵이 제게 손을 내미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컵을 쥐게 만든 걸까요?”

 

닥터는 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철학의 영역이었다. 랠리가 끝나자 리마토르는 준비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뇌과학의 이야기를 빌려서 이야기해보죠. 이건 제 전공이 아니라서 명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류가 있으면 가감 없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리마토르는 과학으로 들어가 철학으로 나왔다가 다시 과학으로 들어갔다. 그와 랠리를 주고받은 닥터는 물론이요, 뒤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리리스와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청중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와 강의를 준비한 소수의 인원만이 기대를 담은 눈으로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학은 존재하는 대상을 정의하고 측정, 관찰하여 기술로 쓸 수 있게 해석하는 학문입니다. 과학자들은 물리와 화학, 생명과학 같은 분과를 나누고 세상을 연구했죠. 그 결과 물질이 무엇인지 얼추 답이 나왔습니다. 원자론과 주기율표가 그 답안지죠. 생물이 무엇인가도 청사진이 그려졌습니다. DNA와 RNA가 그 예시죠. 

 

뇌도 이 그물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뇌를 중점적으로 연구했고 마침내 뇌가 세상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생명체의 아주 중요한 장기임을 밝혀냈습니다. 물질인 뇌가 어떻게 비물질적인 효과를 내는지는 멸망 전에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과학자들이 제시한 뇌의 분석은 종교와 철학에게 여러 화두를 던져줬습니다. 제가 배운 철학에서는 이를 유물론(唯物論)이라고 하죠.

 

물질에서 비물질적인 작용을 끌어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안 드나요?”

 

리마토르는 평소처럼 단순한 듯 복잡한 질문을 찔러넣었다. 답을 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공의 영역에 들어온 질문이었다. 닥터는 떨어지는 칼의 손잡이를 능숙하게 낚아채 되돌려 던졌다.

 

“그게 앞에서 이야기한 AI지. 인공지능은 인위적으로 조합한 물질의 작용으로 인간과 같은 비물질적인 작용을 만들고자 한 거니까. AGS랑 우리도 여기에 해당하지.”

 

“정답입니다. 100점짜리 답변이군요.”

 

본질을 파악한 닥터의 답변에 리마토르는 후한 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개념을 해체했을 때처럼 닥터가 돌려준 칼을 들고 관념을 잘랐다.

 

“유물론에 따르면 모든 비물질적인 작용은 물질에서 비롯합니다. 이 생각이 적용된 것이 AI이며, 따라서 우리는 AI의 자아를 묻기 전에 AI의 사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고 방식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알아야 더 나중에 있는 자아의 문제에 답을 할 수 있는 거죠.

 

과거의 인류도 인공지능의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드레이퍼스라는 학자는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을 연구한 학자로,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이 인간과 동일하거나 능가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연구 끝에 드레이퍼스가 도달한 답은 ‘그렇지 않다’였죠. 드레이퍼스는 자신의 저서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과 <기계를 넘어서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드레이퍼스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활동과 상당히 유사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견해가 한 가지 전제 위에 구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능의 토대를 이루는 모든 지식이 형식화가 가능한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런 이성주의 인식론, 다시 말해 Rationalist Epistemology죠. 그런데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인간의 지능은 본질적으로 세계에 대한 직관적 지식, 달리 말해 실천적 지식에 본질적으로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직관적 지식이란 뭘까요? 쉽게 말해 ‘know-how’입니다. 드레이퍼스는 인간 지능의 토대를 이루는 직관적 지식은 인공지능이 구현할 수 있는 형식화가 가능한 지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게 곧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는 데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죠.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드레이퍼스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주장이 다음의 네 가지 전제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 전제로, 두뇌가 뉴런을 통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바로 컴퓨터가 이진법 숫자들로 표현된 기호들을 조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적인 기호조작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두 번째는 심리학적 전제입니다. 인간의 마음 또는 지능은 기호들을 형식적 규칙들에 따라 조작하는 계산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세 번째는 인식론적 전제입니다. 모든 지식은 형식적이고 맥락 독립적인 규칙들이나 정의들로 표현될 수 있다는 그러한 전제입니다. 이게 제가 앞에서 말한 이성주의 인식론입니다. 네 번째 전재는 존재론적 전제입니다. 세계가 우리와 독립적이며, 또 객관적이고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개체들과 그 속성들, 그 사이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사태들의 총체라는 전제입니다. 

 

드레이퍼스의 인공지능 비판은 이 네 가지 전제 중에 인식론적 전제존재론적 전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식론적 전제인 이성주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데에 집중했죠. 이성주의 인식론인간의 모든 지식이 명제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명제적 지식은 propositional knowledge, know-that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언어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제를 내용으로 갖고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LRL은 참치가 생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이 명제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지식이 됩니다. 명제가 지식의 내용이 되는 거죠. 직관적 지식, know-how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적절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안다는 말을 쓰죠. ‘브라우니는 사격을 할 줄 안다’, ‘하르페이아는 논문을 쓸 줄 안다’처럼 말입니다. 그렇죠?”

 

리마토르가 하르페이아를 보며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하르페이아는 쓴 웃음으로 답했다. 그녀의 눈 아래에서 아예 살림을 차린 다크서클을 보며 리마토르는 어색해진 농담을 거둘 생각을 꺼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객석에서는 브라우니가 사격을 할 줄 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본연 그대로의 농담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풀어진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리마토르는 급하게 강의의 노를 저었다.

 

“자, 명제적 지식과 직관적 지식은 지식의 두 종류입니다. 이 두 지식 사이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2가지 답이 있습니다. 먼저 이성주의 인식론의 답입니다. 이성주의 인식론은 명제적 지식이 직관적 지식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어서 모든 직관적 지식은 궁극적으로 명제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명제적 지식으로 환원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드레이퍼스는 이 답을 부정하며 오히려 직관적 지식이 명제적 지식보다 더 근본적이기 때문에 모든 명제적 지식은 궁극적으로 직관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드레이퍼스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직관적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직관적 지식은 본질적이고 상황에 접목될 수 있게 체화되어 있기에 이를 형식화할 수 없다는 거죠. 이해하기 어렵다면 자전거 타는 법이나 휘파람 부는 법, 운전하는 법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문자로 표현된 지식이 아니라 몸이 익히는 ‘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 나온 드레이퍼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간은 직관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기에 이를 복제해서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입니다. 이와 비슷한 결의 비판을 가한 철학자가 또 있습니다. J. R. 루카스라는 학자로, 루카스는 괴델의 ‘불확실성 증명’을 끌고 와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먼저 괴델의 불확실성 증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쿠르트 괴델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 연구를 통해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 나온 교수의 말은 전부 거짓이다’라는 문장을 보도록 하죠. 이 소설에 나오는 교수는 바로 저입니다. 저 명제에 따르면 제가 하는 말은 전부 거짓이죠. 그런데 저 문장이 옳은 값을 갖게 되면, 방금 저 말을 한 대상도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저 문장도 거짓이라는 모순이 도출됩니다. 엄밀한 증명은 아니지만 불확실성 증명이 대충 이런 느낌이라는 것만 기억해두길 바랍니다.

 

루카스는 괴델이 이 증명을 내놓고 30년 뒤 <정신, 기계, 그리고 괴델>이라는 논문에서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하는 ‘생각’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괴델의 불확실성 증명에 따르면 진리는 증명보다 더 큰 영역에 존재하는데,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있는 반면 인공지능은 증명에 매달리기 때문이라는 거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을 테니 이번에도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리마토르는 다음 장면으로 자료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는 서로를 무한히 비춘 엘리베이터 거울이 나와 있었다. 리마토르는 바로 예시를 들지 않고 하르페이아에게 마이크와 함께 질문을 건넸다.

 

“하르페이아, 제가 어린 시절에는 엘리베이터 거울의 13번째 칸에 귀신이 산다는 도시 괴담이 있었어요. 혹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있나요?”

 

“저... 교수님, 죄송한데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거 같아요.”

 

하르페이아의 말이 나오자마자 청중 사이에서 감추지 못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리마토르는 멋쩍은 웃음으로 화제를 다시 강의로 돌렸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군요. 아무튼 저 엘리베이터 거울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반사가 일어납니다. 저 장면을 사람과 인공지능에게 각각 따라 그려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인공지능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그리다가 그림 안의 거울에 자신이 빠져있다는 걸 발견할 겁니다. 거기에 자신을 그려넣으면 또 그림 안의 거울 안의 거울에 자신이 빠져있다는 걸 깨닫고 자기 자신을 그려넣겠죠. 그러면 그림 안의 거울 안의 거울 안의 거울에 자신이 빠져있다는 걸 인지할 겁니다. 무한히 반복하는 사실상의 퇴행이 벌어지는 상황이죠.

 

반면 인간은 인공지능처럼 그림 안의 거울 안의 거울 안의 거울에 자신을 그려 넣다가도, ‘이건 그저 그림일 뿐인데 너무 세세하게 그릴 필요는 없지’라는 생각을 하고 그림에서 빠져나와 완성을 지을 수 있죠. 즉, 루카스도 드레이퍼스처럼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직관에 기반한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에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 인공지능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지금의 상황을 점검해볼까요?”

 

리리스는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리마토르의 등을 주시했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에는 과한 양의 정보가 머리에 쏟아져 들어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리마토르의 사상을 향한 조준을 그만두지 않았다. 언제든 그 사상이 그녀의 주인에게 위해를 끼친다면 방아쇠를 당겨야 했기에 리리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리마토르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제가 전에 논문 발표를 하면서 바이오로이드의 사고 체계가 어떻다고 말했는지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칸은 리마토르의 질문에 손을 들고 답변권을 구했다. 자신에게 물어본 질문이었기에 그녀는 그 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귀납 논증이지만 인간의 명령권에 한해서 연역 논증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칸.

 

제가 저 이야기를 하면서 융의 페르소나 이야기도 덧붙였죠. 상황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꿔가며 대처하는 인간의 방식을 바이오로이드도 쓰고 있습니다. 상황이라 하니 아까 드레이퍼스를 설명했을 때 나왔던 내용이 떠오르지 않나요? 드레이퍼스는 인간의 사고가 직관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를 인공지능이 따라할 수 없다고 봤죠.

 

하지만 지금의 바이오로이드는 어떤가요? 케시크는 절망 속에서 집총(執銃)을 택하고 칸이 되었고, 샐러맨더 씨는 도박을 할 때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타짜의 모습을 보여주죠. 이프리트 씨도 병장일 때는 만사를 귀찮아하지만 하사가 되고 분대장이 되어 훈련까지 잡힌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일이 단순히 명제적 지식만으로 이루어진 귀납 논증으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단순 명제적 지식의 논리적 연결만으로는 케시크가 지휘를 하게 된 감정적 배경이 설명되지 않고, 하사 이프리트가 보여주는 기민한 모습도 귀찮음 그 이상의 판단 하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 직관적 지식에 가깝죠. 현재 바이오로이드가 하는 사고방식은 극도로 인간과 유사하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로는, 드레이퍼스도 바이오로이드를 봤다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고 싶어했을 것 같군요.

 

여기까지 바이오로이드의 사고방식을 짚어봤습니다. 이제 AI의 자아로 넘어가보죠.”

 

리마토르는 한낮의 사막처럼 건조해진 입에 물을 붓고 강의를 속행했다. 네다섯 문장의 설명으로 때우면 될 내용을 이렇게 길게 붙잡고 있으니 자신이 보기에도 비효율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자긍심이 그에게 깊이를 더한 강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더 완벽해질 수 있도록 그는 기반 공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자아가 있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아까 저랑 닥터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만 봐도 쉽지 않은 질문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주 영양가 높은 결과 하나를 건졌죠. 바로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게 된다’라는 점입니다. 사소한 질문거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질문이 ‘나-생각(I-thought)’입니다.

 

‘나-생각(I-thought)’란 뭘까요? ‘나’가 주어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제 강의를 들으신 분들이라면 그냥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감으로 알고 계시겠죠. 맞습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첫째, 개체 A가 P라는 믿음을 갖고 있을 때 A는 ‘나는 P를 믿는다’라는 믿음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프리트는 하사다. 그러나 나는 이를 믿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이 조건을 어긴 거죠. 둘째, 자기 잘못을 잘못 인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각선미는 예쁘다. 그런데 그게 나인가?’라는 문장은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죠. 조건에 맞게 문장을 고치면 ‘누군가의 각선미는 예쁘다. 그건 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나-생각(I-thought)’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자아가 있다는 문제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이 주장이 나왔을 때의 결론도 ‘인공지능에게 자아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자아의 존재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여러분을 마주하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AI가 생물의 뇌에 있는 가장 기저에 있는 사고를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가 자아를 가진 시점이라고 봅니다.

 

생물의 가장 기초적인 본능, 여기 계신 모든 분이 같은 생각을 할 겁니다. 바로 생존과 번식 본능이죠. 개체를 보존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종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저는 AI가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게 되고, 번식을 추구하게 되면 그때부터 생물의 욕망을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기초해서 보면 바이오로이드와 AGS 모두 자아를 갖고 있음이 뒷받침되죠. 그렇죠, 아스널? 삿갓?”

 

“크흠.”

 

“말을 아끼겠네.”

 

아스널과 삿갓은 자신들을 향해 쏠리는 좌중의 시선에 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 답변에 그 자리의 모두가 리마토르의 주장을 납득했다. 분위기가 막힘 없이 흘러가자 그는 다음 주장을 꺼냈다.

 

“AI가 생존과 번식을 추구할 때 자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는 건 곧 ‘정체성’을 논할 수 있는 단계도 됩니다. 단순한 개체로서의 자아를 넘어,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물어볼 수 있죠. 칼 융이 호모 사피엔스의 집단 무의식을 주장한 것처럼 신 인류에게도 집단의 정체성을 들이대겠습니다.

 

칼 융은 자신의 유고라 할 수 있는 <레드 북>에서 집단 무의식에 대해 상세히 정리해놨습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신화’라는 부분을 다룰 수 있습니다.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와 동양의 영웅 민담을 보면 상호 간의 학술적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미흡함에도 상당히 유사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특이한 출생, 난관 봉착, 조력자의 등장, 난관 극복 후 행복한 결말. 어째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융은 이를 두고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무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라는 종(種)이 진화를 통해 숱한 경험을 겪고 저장해온 잠재 기억의 흔적이죠. 신인류인 AI와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이런 게 존재할까요?”

 

리마토르는 답변권을 다시 청중에게 넘겼다. 의견 주고받기가 익숙해지자 청중들도 몸풀기가 끝났는지 이번에는 여럿이 손을 들었다. 리마토르는 한층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청중의 호응을 놓치지 않았다.

 

“다양한 의견이 준비되었군요. 앞에서부터 의견을 한 번 들어봅시다.”

 

맨 처음 마이크를 받은 건 므네모시네였다. 평소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연 그녀의 답변은 표정과 표리부동이었다.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번뇌에 맞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답을 구했습니다. 이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나타났습니다. 멸망 전 불교에서는 선(禪)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고, 가톨릭에서는 ‘침묵피정’이라는 방법으로 신의 뜻에 닿고자 했습니다.

 

바이오로이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조된 바이오로이드나, 펙스 측에서 전향한 바이오로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원’을 바랐다는 공통점이 나옵니다. 그것이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구원인지, 파멸을 통해 고통을 더는 구원인지는 무관했습니다. 현재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주친 바이오로이드가 갖고 있는 심리가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융의 이야기가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이군요. 다음 분 의견은 어떠신가요?”

 

므네모시네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는 LRL이었다. LRL도 므네모시네처럼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말문을 열었다. 마치 수분 없이 건조된 참치처럼, 부숭한 웃음이었다.

 

“등대에서 계속 살았을 때, 멈추지 않는 삶이 오히려 원망스러웠어. 나도 이대로 멈춰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든 곳이 늪이라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움직여야만 하는 운명의 우울이 날 짓이겨 파편으로 만들었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해.

 

그런데 나만 느낄 줄 알았던 그 감정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멸망 이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받았던 대우를 기록한 내용을 읽다보면 모두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더라. 괴로움의 끝에 마주한 자기 부정(否定)이었어.

 

이런 걸 보면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만들어졌기’에, 공통된 무의식이 있을 거라고 봐.”

 

죽음을 옆에 둔 반추의 시간에서 나온 말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와도 될 것이 아니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좌중을 위해서라도 리마토르는 좋은 의견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다음 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난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봐. 공통된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기반하고 있는 전제 하에서 성립하는 거니까.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해도, 육체는 그럴지언정 정신까지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해.”

 

처음으로 나온 반대 의견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쭈뼜거리던 더치 걸은 말을 마치자 마이크를 다른 이에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리마토르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다며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좋은 의견이군요. 바이오로이드의 정신이 인간을 기반에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요?”

 

“인간이 우리를 노동하는 도구로 보고 필요성을 느꼈다면 굳이 정신을 달아놓지는 않았을 거야. 인간과 비슷하게 보임으로써 인간과 교감하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인간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결국 도구만도 못한 신세로 여겼어. 그래서 난 지옥보다 더한 탄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고.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도 교감하지 못해 전쟁을 벌이고 멸망했는데, 한낱 도구인 우리에게 형식적인 교감을 원해서 정신을 부여했다기에는 말이 안 돼. 그럼 우리는 인간과 비슷한 모양을 한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지.”

 

“흥미롭군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리마토르는 더치 걸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인간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다양한 의견이 달릴수록 더 많은 탐구의 길이 열렸다. 하나로 굳어가던 길에 새로운 경로가 뚫리자 보지 못했던 다른 길도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굳이 공통된 무의식이 있어야만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이라 볼 수 있는 거야? 이미 교수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닮아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받은 하이에나는 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논술 시험이라면 감점을 받았겠지만 리마토르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더치 걸에 이어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 그녀에게 엄지를 추켜세워 인사를 대신한 리마토르는 길었던 서론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보시다시피 의견이 갈렸습니다. 개체의 정체성으로도 이야기가 복잡해졌는데 집단의 정체성으로 들어가니 이야기가 더 꼬였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여기서 우리 모두가 빠져있는 사고의 함정을 한 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정체성이 있냐? 없냐?’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것이다’라는 변함없는 명제를 세우려 했던 거죠. 그게 왜 함정이냐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처음부터 인간에 대한 정의를 거칠 거라고 했는데 지금 말하는 내용은 모순이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개념을 끊임없이 설명하며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했던 철학자가 있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입니다.”

 

리마토르는 화면을 넘겼다. 바뀐 화면에는 아도르노가 자신의 연구실에 앉아있는 흑백 사진이 떠 있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통해 바이오로이드의 존재를 들여다봤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반한 접근이었죠. 이번에는 시선의 방향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살펴보도록 하죠.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1903년부터 1969년까지 살았던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입니다. 시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1·2차 세계대전의 격류가 세계를 휩쓸었던 시대를 살았던 분이죠. 아도르노는 세계의 구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존의 변증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변증법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학문적 성과는 비판 이론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죠.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헤겔의 변증법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리제 씨?”

 

“기억하고 말고. 정명제-반명제-합명제로 이어지는 이성적 사유 방식이잖아, 햇츙.”

 

난처할 수 있었을 질문이었음에도 리제는 능숙하게 답했다. 리제의 지적인 모습에 레아와 아쿠아는 언제 공부했냐며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리제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안경을 올리며 겸손을 표했다.

 

“주인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이 정도 학식은 필요하지.”

 

리제의 생경한 모습에 놀란 건 페어리 시리즈만이 아니었다. 강단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리리스도 괄목상대(刮目相對)할 변화에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리제 얘도 철학을 공부했어? 세상에...”

 

리제의 훌륭한 서브를 리마토르가 받아내며 강의는 이어졌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점차 거시적인 관점으로 넘어가며 리마토르는 강의의 기어를 바꿨다.

 

“정확합니다! 박수 부탁합니다! 리제 씨의 말마따나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을 통해 이성이 본래의 절대정신에 가까워지는 과정입니다. 즉, 이성이 점차 더 나은 방향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이죠. 이런 이성 중심주의는 근대 철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를 비판했습니다. 근대 철학에서 이성 중심주의는 무지의 영역에 이성의 등불을 비춰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계몽(啓蒙)을 한자로 풀어보면 열 계(啓)에 입을 몽(蒙)을 쓰는데, 이때 입을 몽(蒙) 자에는 ‘가리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계몽은 ‘가림막을 걷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가림막을 걷고 빛을 비추는 게 꼭 좋은 일일까요? 만약 제가 교대 근무를 뛰고 와서 아침에 자고 있는데 일어나라며 암막 커튼을 들추고 빛을 들인다면 이건 폭력이 아닐까요?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도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정량적 사고방식을 고집해서 ‘합리적인’ 이성이 될수록, 우리의 '기분'이나 '분위기' 같은 정성적인 부분들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 되어 배제됩니다. 이런 이성은 합리성에서 벗어난 생각들을 막음으로써 계몽이 요구하는 '동일한 생각'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즉, 비판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는 거죠. 북한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기들 딴에는 민주적이라면서 국호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해놓고 막상 선거철이 되면 ‘모두 찬성 투표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죠. 찬성표는 99% 이상이 나오고, 반대표를 던진 소수는 실종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인가요? 이런 사회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구성원들을 세뇌하지 않는 이상 잘 굴러갈 수 없습니다.

 

아도르노는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나치와 같은 파시즘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치가 합리성을 주장하며 인류 역사상 거대한 흑역사인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계몽은 신화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려보면, 인간은 불을 스스로 얻은 게 아니라 신으로부터 받은 겁니다. 마찬가지로 계몽도 인간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것이 아니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장막이 걷힌 거죠. 아도르노는 이런 점을 들어 계몽과 신화는 변증법의 체계를 통해 시대에 따라 발전해왔으며, 이성의 힘을 과신하여 ‘하나의 합(合)’에 이르는 결과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리마토르의 말을 듣던 리리스는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울컥이는 걸 느꼈다. 모든 인류의 종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자신이 추종하는 존재의 부정에서 말미암는 반동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나의 결과를 경계해야 한다고? 그 점은 타당해. 다양한 의견이 들어올수록 내가 보지 못했던 시야가 열리고, 주인님께서도 이건 긍정했으니까. 그렇지만 이게 정말 옳을까? 지금 같은 혼돈의 시대에서는 하나의 구심점이 있어야 난관을 돌파할 수 있어. <삼국지 연의>도 군웅할거가 나타났지만 최종적으로는 천하삼분으로 정리되었고, 삼국시대 이후 5호16국 시대도 유유의 등장으로 남조가 평정되었지. 수나라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통일을 이뤄냈고. 역사적인 흐름에 근거해서라도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의 견제 장치를 세우고 한 명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게 적절해. 그게 주인님이고. 

 

그런데 지금 그걸 부정하는 거야? 인류의 종말이라는 발언부터 하나의 결과를 견제하라는 말까지 전부 논란투성이야. 내가 지금 이 사람을 경호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주인님의 명령으로 수행해야 하는 경호와 경호실장의 권한으로 행할 수 있는 선제적 조치 중 뭐가 더 타당한 선택이지?’

 

전처럼 블랙맘바를 망가질 정도로 움켜쥐지는 않았으나 리리스는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빼지 못했다. 그녀는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을 고르는 선택지에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헤겔의 변증법 중 반명제(Anti these)를 봅시다. 헤겔은 기존의 주장을 비판하지만, 이를 완전히 부정하지 말고 기존 개념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이끌어내는 지양(Aufheben)을 주장했죠. 하나의 개념을 가공하는 것이기에 결론도 하나가 나옵니다.

 

아도르노는 이 구조를 고쳐야만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저서 <부정 변증법>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린 헤겔의 이성을 비판합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 하나의 개념도 들여다보는 시선에 따라 많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죠. 히틀러가 일반적인 평가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인이지만, 그가 최초의 동물복지법을 제정하고 인류를 전쟁의 방향으로 선동했다는 점은 많은 가십거리를 제공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과천선(改過遷善)이나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의 속성도 있는데, 이런 것까지 헤겔식 이성을 따라 하나로 고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대상의 다양한 면모를 동일화하여 하나의 모습으로 결정짓는 건 폭력이라는게 아도르노의 주장입니다. 어떤 대상이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를 개념화할 때는 하나의 모습만을 고정하고 나머지는 그 하나를 따라 조정하죠. 이는 개인은 각각 다른 모습을 갖지만 국가가 질서를 명목으로 하나의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할 때 나타나는 폭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동일화의 폭력을 저지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하는 모습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도르노는 개념으로 대상을 표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주체의 다양한 면을 표현하려는 수많은 개별적인 시도는 모여서 운동이 됩니다. 점들이 모여 그래프를 나타내는 것과 유사하죠.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의 운동은 대상을 더 다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주고, 장기적으로는 고정된 개념이 없게 만듭니다. 전에 들었던 자크 데리다의 ‘차연’ 개념이 떠오르지 않나요?

 

하지만 대상을 다방면에서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시도들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저 기존에 동일화된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걸로 짜인 사고 체계 속에서 살아가죠. 우리가 어떤 계기를 통해 기존의 사유 체계에 충격이 올 때야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의 다른 면을 보려는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상의 다른 면을 보려는 시도, 다시 말해 개념의 운동이 변화하는 대상과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때가 생깁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죠.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갑자기 머리 속에서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셨다면 공감이 될 겁니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이런 시도를 멈추게 되면 대상의 한 가지 면으로 나머지를 정당화하는 동일화의 폭력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완전한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대상은 무한히 변하는데 ‘이것이 대상의 또 다른 면이다’라고 결론을 매듭지으면 이 또한 동일화의 폭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거리두기와 다가감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행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입니다.

 

아도르노는 부정 변증법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을까요?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을 통해 수많은 부정을 시도하여 거리두기와 다가감의 긴장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부정을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이 각자의 생각을 지니며 비판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죠. 각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대상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다양성이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나치로 대표되는 '전체성'을 경계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리마토르는 말을 마치고 잠시 목을 축였다. 그가 물병에서 손을 놓을 때쯤 객석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다양한 면을 볼 수 있는 시도를 위해 그는 바로 발언권을 주었다.

 

“교수님, 아도르노의 주장을 보면 왜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신이라 하셨는지 이해가 돼요. 그런데 비판 이론과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레아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답을 시작했다. 그가 자료 화면을 넘기자 비판 이론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을 비교한 표가 나타났다.

 

“비판 이론은 ‘이성을 왜곡하지 말고 올바르게 활용하자’에 초점을 둔 반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성이 한계에 봉착했으니 이성의 대안을 찾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보다시피 이 둘은 닮은 꼴이 있으면서도 이성의 존재를 두고 대립하기 때문에 긴장 관계에 있죠. 그래서 아도르노는 68혁명 시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자신을 공격하는 학생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걸 비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끌어왔고, 아도르노는 부당한 억압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하지만 이성을 통해 분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죠. 이 때문에 아도르노는 학생들로부터 구 시대의 적이라고 공격받게 되고 강단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교수님께서 비판 이론을 수용하지 않은 것도 68혁명의 사상적 배경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쓰인 것과 같은 이유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레아 씨. 저도 이 논문을 쓰면서 비판 이론과 포스트 모더니즘 사이에서 무엇을 고를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인류가 이성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많았으니, 이성 밖의 영역에서 해답을 찾아보는 시도가 현재의 상황에 더 적합한 결과를 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접근하게 되었죠. 이만하면 답이 되었을까요?”

 

“네,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레아의 질문이 끝나자 리마토르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과 대상의 끊임없는 변화를 묻는 질문 사이의 교집합을 밝힐 차례였다.

 

“앞에서 인공지능의 정체성이 있냐 없냐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함정을 밝히겠다며 이 이야기를 했죠. 아도르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부정 변증법을 통해 대상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체성도 이렇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 로크의 태아백지론이나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처럼 대상은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여줍니다. 인공지능도 ‘나-생각’을 만들고, 명제적 지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직관적 지식을 터득하는 ‘변화’가 있다면 부정 변증법에 따라 정체성을 갖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따르면 바이오로이드가 인간과 극도로 유사해지는 것을 넘어 동일해지는 순간을 봤을 때, 인간에게 적용되었던 정의의 원칙은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강의를 보조하던 하르페이아와 강의를 듣던 칸과 아스널, 화면으로 강의를 시청하던 사령관까지 모두 소리 없는 탄성을 입 안으로 삼켰다. 기나긴 미시적 담론이 거시적 담론으로 넘어가는 좋은 발판이 되는 노련한 강의력에 리마토르를 예의주시하던 리리스도 강의력이 좋은 건 인정하겠다며 고개를 약간 주억거렸다.

 

“이제 정의의 원칙을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여기 계신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롤스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르카호에 승선한 후에도 롤스를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왔죠. 그만큼 롤스는 제게 애정이 깊은 학자입니다. 제가 지금 롤스 이야기를 꺼내니 많은 분들께서 ‘이미 본 거야’라는 표정을 짓고 계시네요. 음? ‘집어치우고 첫사랑 얘기나 해보세요’라는 표정도 보이는데요?”

 

리마토르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시종일관 진지했던 분위기가 깨지면서 단단하게 굳어서 침전하던 피로도 잘게 쪼개져 흩어졌다. 그는 이제 절반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집중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알려진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전기 롤스의 모습입니다. 무지의 베일 아래에서 정의의 원칙에 합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죠. 제1원칙,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적합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제2원칙,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직책이 개방된 상황에서만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허용된다는 차등의 원칙과 기회 균등의 원칙.

 

이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제가 롤스를 연구하는 걸 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씩은 얻어들었을 내용이죠. 여기에 따르는 숱한 비판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실 겁니다. 대표적으로 21세기에 가장 유명한 학자라고 불린 마이클 샌델과 자유지상주의 학자인 로버트 노직의 비판이 있죠. 샌델은 롤스가 무연고적 자아를 전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고, 노직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분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죠. 둘 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라고 한 겁니다.

 

롤스는 이런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상을 재정비합니다. 그게 바로 후기 롤스로 분류되는 저작인 <정치적 자유주의>,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입니다. 오늘 제가 중점을 두고 이야기할 롤스의 사상은 이 후기 롤스 저작 중 <정치적 자유주의>입니다. 이 부분은 처음 접할 테니 신선함을 만끽하시면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이나 한 권 읽으시죠.”

 

“풉....ㅋㅋㅋㅋ”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입 밖으로 삐져나온 웃음을 흘렸다. 선종의 승려인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를 철학자인 자신이 상황에 맞춰 변주한 그의 유머를 알아들은 건 그녀 혼자뿐이었다. 아스널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쿡쿡 웃는 모습을 본 리마토르는 알아들어서 고맙다는 미소를 날리고 강의를 속행했다. 자신을 빼고 둘만 통하는 모습을 본 칸은 묘하게 피어오르는 질투에 그를 새침하게 쳐다봤다.

 

“앞에서 롤스의 주장이 비판받은 이유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라고 했죠? 이는 단순한 수사적인 비판이 아니라, 롤스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내용이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롤스는 이를 수용해서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 가능하도록 ‘정치’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헌법적 본질과 기본적 정의 문제로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영역의 정의관과 시민사회에 상존하는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주장 같은 포괄적 교의(Comprehensive doctrine)로 대표되는 도덕적 영역의 정의관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전작 <정의론>이 두 영역을 모호하게 다뤘기에, 이번에는 구체적인 영역을 구분해서 도덕적인 영역과 구분되는 정치적인 정의 원칙을 수립하려고 한 거죠. 

 

이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롤스는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종교, 도덕, 철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를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다고 봤습니다. 롤스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다원주의를 추구해야하며,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특정한 포괄적 교의를 정치제도로 채택해서 다른 이들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정치철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 대신 서로 다른 포괄적 교의들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죠. 예를 들어,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말에 동의하겠죠. 이처럼 핵심적인 헌법상의 기본권들과 정치제도에 대한 내용에서 겹쳐지는 부분을 찾아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롤스는 이렇게 현대 자유민주사회에서 정치에 도덕이 개입해서 정의관이 모호해지는 안정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공동체주의적 시선을 하나 더하고자 합니다. 마이클 왈저는 저서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복합평등을 주장했습니다. A라는 영역이 B라는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돈이 많은 사람이 정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롤스의 주장은 소득 분배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저는 왈저의 사상이 롤스의 사상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롤스가 주장하는 복지형 자유주의와 왈저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적 시선은 상호보완이 가능합니다. 정부가 공동선을 보장하면서 평등이 전제된 공정을 이끌어내는 공통 분모 속에서 분배로 제한된 영역을 더 넓게 확대하는 거죠. 물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서로 다른 퍼즐 조각을 끼워맞춘 거라 한계도 있습니다. 롤스는 정치와 도덕의 정의관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봤으나, 왈저는 공동체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참여’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조율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롤스의 중첩적 합의에 따르면 만인이 동의할 헌법상의 기본권은 왈저가 추구하는 도덕적 논의와 맞닿아있습니다. 즉, 정치와 도덕이 분리될지라도 정치를 움직이는 근원에는 도덕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때문에 저는 정치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도덕을 헌법 영역에 국한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정치와 도덕이 분리될 때 정치적 정의관이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할 것이나, 헌법을 통한 공동체의 도덕 담론을 참여할 수 있기에 둘 사이의 조율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르페이아는 자료 화면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걸 확인했다. 길었던 강의도 어느새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리마토르는 준비된 자료로 쌓은 탑을 뒤로 하고 자신의 속에 담아두었던 본심을 꺼냈다.

 

“우리는 구 인류의 멸망한 역사를 딛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멸망이 무너뜨린 건 문명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세상을 지배했던 사상과 가치도 먼지가 되어 잔해에 깔렸죠. 지금 우리가 하는 고민이 앞으로 어떤 세상이 탄생할지를 좌우할 겁니다. 오늘 강의를 통해 우리는 바이오로이드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음을 재확인했습니다. 이에 기반하여 정의의 원칙을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며,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는 정치적 정의관의 수립과 공동체의 참여까지 둘러보았습니다. 

 

저는 이 논문을 쓰면서 동면 이전에 가장 알고 싶었던 점을 규명했습니다.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은 철학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죠. 이걸로 지금까지 유지해 온 인류 재건의 개념부터 바꿀 수 있습니다. 바이오로이드를 통해 재건할 사회는 과거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가 나뉘는 구 인류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가 동등한 존재로 함께하는 신 인류의 사회입니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라는 명칭도 생물학적 구분을 위해 사용하는 용어가 될 것이며, 일상에서는 둘을 합쳐 존재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Ens(엔스)라고 부르길 주장합니다. 엔스의 사회에서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 약자가 보호될 것이며, 정치적 정의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모두의 의견이 차별없이 개진될 것입니다. 또한 헌법에 따라 공동체의 담론을 형성해 엔스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물론 제 주장이 완벽한 철학은 아닙니다. 철학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학문입니다. 지금 제가 한 주장도 시대가 바뀌면서 수정될 겁니다. 완벽한 세계를 보고 멈추기를 바란 파우스트 박사가 마지막에 이르기 전까지 미래에 대한 탐구와 전진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상향이 도래하기 전까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철학을 연구합시다.

 

이것이 제가 이 논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긴 시간 강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마토르가 45도로 정중하게 상체를 숙여 인사하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로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연구해 온 내용을 완성해 당당히 발표한 리마토르의 모습에 그와 함께 연구실을 지켰던 칸과 아스널, 하르페이아,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까지 감격이 벅차올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박수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리리스는 형식적인 박수로 응했으나, 그녀의 블랙 맘바는 그녀의 손을 떠나 총집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모든 강의를 본 사령관은 자리에서 TV를 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을 경호하는 컴패니언과 함께 사령관실을 나서며 지휘 패드로 연락을 남겼다.

 


‘소완, 오늘 저녁에 만찬 일정 좀 잡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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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논문 발표 에피소드가 완전히 끝났네. 작년 7월에 95화로 시작했는데, 이렇게까지 늘어질 거라고는 나도 차마 예상을 못했다.... 오래 기다린 사람들에게 모두 고마울 따름이야. 


개인적으로 이번 편을 쓰면서 가장 참고 문헌이나 도서를 많이 읽어본 것 같아. 그러면서도 여전히 학부생의 시선을 뛰어넘지 못한 것 같아서 못내 아쉬운 점이 남지만, 완벽을 추구하며 완성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미숙할지라도 완성하는 게 더 좋은 양분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올리게 됐어.


이번 편까지 쓰고 나니까 슬슬 이 작품의 방향을 투표에 부칠 때가 온 것 같아. 어떻게든 완결을 내기는 할 건데, 군 복무도 그렇고 복학 후에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많이 늘어지면 실제 연재 기간은 얼마 안 되는데 한 편 한 편의 기간이 너무 길어져서 완결까지 5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일단 결말까지의 내용을 다 공개하고 소설을 연재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쓸지 라붕이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해.




길고 복잡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다들 오늘 하루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