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업데이트에 대하여]


"하.. 시발 진짜.."



그해의 4월은 봄같지도 않은 시기였다. 움을 텄던 새싹의 싱싱한 대가리마저 익혀버릴 정도로 4월의 태양은 무덥기 짝이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는 시간이 꽤 지나버렸음에도 그해의 더위를, 그날의 풍경을 나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날 그시간 나 또한 새싹처럼 검은 머리칼이 꼬부라질 정도로 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땡볕 아래에서 장시간 줄을 서며 한창 물을 갈구하던 순간에 마주친 사건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내가 너희들을 진심으로 아꼈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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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게 4월만 되면 지랄이 나냐?"



4월의 저주, 만우절 369일차.. 뭐라고 불리던 상관없을 그 개같은 폭로전과 등판, 그리고 무수한 반박글의 향연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유일한 변화가 있었다면 내가 처음으로 닉변권을 써서 나이트앤젤을 마누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 시발.."



내가 하는 온라인 게임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쩌다 생긴 흥미로 시작해 재밌게 놀면서 스토리를 깨봤자 결국 마지막 엔딩은 어른의 사정. 아니, 어른의 개짓거리였다. 이젠 몸이라도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어른을 욕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으니 내 말도 어불성설일 뿐이었다. 어차피 나쁜 것은 어른이 아닌 개인일 뿐이므로.


"너희는.. 너희들은 어떻냐?"


늘 강직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마리, 차갑지만 귀여운 레오나, 겨우 딱지 뗀 메이, 메인이벤트까지 있는 칸, 음탕하지만 호탕하기도 한 아스널. 그리고..


"사령관. 넌 무슨 생각중이냐?"


라스트오리진의 주인공인, 최후의 인간이자 백전무패의 오르카호 사령관. 설정상 플레이어면서 이름도 정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다른 얼굴을 가진 별개의 존재. 스토리작가의 지능을 넘지 못해서 초창기엔 별별 해괴한 짓거리를 일삼았지만 그래도 바이오로이드 애들만큼이나 정이 많이 들어버린 녀석이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될까. 게임이 이 사달이 나버리면 니들은 거기서 그대로 멈취있는 걸까. 아니면.."


모두 죽는걸까. 차마 죽는다거나 사라진다는 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죽는다는 말이 맞기나 할까. 그저 수많은 로그의 집합체, 고르디우스의 매듭만큼이나 꼬여버린 코드 덩어리를 삭제하면서 장례식을 치르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만약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멈추는 것보단 죽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일어날 힘도 없이 병상에 누워 잠과 몽상만을 반복하는 삶보다야.. 아니다, 나는 결국 나아졌고 살아있다. 그러니 죽는 것보단 어떻게든 살아있는 것이.. 하지만 이들이 나아질 수 있는걸까? 나아지지 못하는 삶에서 죽음보다 나은 가치가 있을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게임을 종료하고 전공서적과 논문을 읽으며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를 따랐고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2시에 피곤한 몸을 다키마쿠라에 뉘이며 잠에 들었다..


.

.

..정확히는 그래야만 했다.





1

"숨은 쉬는데? 살아 있는 것 같아!"


2

"그리폰, 조금 더 정중하게 말하렴. 드디어 찾은 인간님인데... 우리 주인이 되실 분이잖아."


1

"흥, 주인은 무슨. 난 아직 주인이라고 인정 안했거든? ..잠깐만 콘스탄챠. 그 주사 놓지 말아봐."


2

"그게 무슨 소리니, 그리폰! 서두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1

"아니, 서두르고 자시고.. 뇌파를 봐. 이거 그냥 자고 있는 거잖아."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런 알람소리는 목록에서 없었는데.."


2

"그게 무슨.. 어머!"


1

"이봐! 인간! 빨리 일어나!"


2

"잠깐, 그리폰! 그렇게 거칠게 발길질을 하면 어떡하니!"


"악!!"


옆구리 쪽에서 거친 격통을 느낀 나는 손으로 부위를 주무르며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떤 자식이야!!"


"우왁!"


"어머! 괜찮으세요?! 그리폰! 인간님은 바이오로이드랑 다르게 몸이 연약하시단 말이야! 어서 사과드려!"


"..미안 인간. 그렇게 아파할 줄 몰랐어."


"..."


군복무 시절 맡았던 매캐한 화약 냄새와 훈련중에 누웠던 딱딱하고 차가운 흙바닥. 얄쌍하긴 해도 엄연한 매트리스에 누웠던 전날 밤과는 확연히 다른 아침 풍경은 날 무척이나 당황시켰다. 마치 백화점에 처음 들어온 아이처럼 부산스럽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나에게 그녀들이 말을 걸었다.


"저.. 인간님? 그리폰을 미처 말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리폰이 솔직하지 못하긴 해도 그렇게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그러니 부디 용서해주시면 안될까요?"


"아.. 네.."


사람 만날 일 적진 않지만, 대화할 일은 확연히 적었기에 나는 그런 멍청한 대답으로 겨우 첫 운을 떼고 말았다. 그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라스트오리진의 첫 장면이 맞았다. 분명 그리폰과 콘스탄챠가 처음 사령관을 발견해(이때는 아직 사령관이 아니었지만) 주인으로 인식시키는 장면. 나도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꿈을 꾸는 게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비현실적이며 게임같은 시작은 자신이 꿈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랑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그럼 좀 있으면 잠에서 깨는건가?'


"흠흠.. 소개가 늦어 죄송해요 인간님. 저는 가정경비용 바이오로이드 콘스탄챠. 그리고 이 아이는 기동공격용 바이오로이드인 그리폰이라고 해요."


"아깐 미안해. 설마 그렇게 몸이 약해빠졌을 줄은 몰랐어."


"그리폰!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니!"


'뭐지.. 왜 안 깨지.. 평소엔 꿈인 걸 알면 금방 깨던데.."


"아 진짜 몰랐단 말이야! 알았으면 그랬겠어?!"


'그랬는지 어쨌는지 관심없고 잠이나 좀 자고 싶어.. 오늘 들을 수업도 많고 정리할 것도 많단 말이야.."


"몰랐다는 게 면죄부가 되진 않아!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래, 무엇보다 게임 망한다는 소식 듣고 처음 꾼 꿈이 그 게임 오프닝 장면이면 너무 처량하잖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다시 사과하면 되잖아! 인간! 어.. 인간? 왜 그래,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성기사.. 쿠울..'


"이, 인간님?! 인간님?! 정신 차려보ㅅ..!!"


.

.


'여긴.. 어디지.. 엄청 어두운데.. 아직 꿈인가..?'


이제껏 여러 꿈을 꿔왔지만, 대부분 몸이 무언가에 눌린 듯 무겁고 둔해진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안 그런 경우도 많았지만 주로 통계을 매겨보자면(비현실에 현실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몸을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소위 쫓기는 꿈에서는 유독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비율이 지배적이었다.


'몸도 무겁고.. 묘하게 축축한데.. 아니, 정확히는 축축하다기 보다는 어릴 때 목욕탕에서 했던 잠수놀이같은..'



안대가 씌워진 것도 모자라 그 위에 힘을 주어 누르는 것 같은 칠흑같은 암흑에 갇힌 눈과 달리 귀는 묘하게 웅웅거리면서 온몸엔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감돌아 등골을 섬찟하게 했다.


'몽중몽인가.. 요즘 많이 피곤한가 보네.. 4시간 수면은 너무 심했으려나.. 내일부턴 퇴근 좀 일찍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누군가 볼을 세차게 핥아대는 느낌이 들었다.


"왕왕!"


"아이고 깜짝이야!"


"그리폰! 또 무슨 짓을 한거니?"


"이번엔 나 아니야! 보리가 짖는 소리에 혼자 놀라서 깬 거라고!"


다시 눈을 뜬 풍경은 방금처럼은 아니지만, 웬 어두운 폐허의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 오늘 무슨 요일이지? 설마 월요일인가? 아니지.. 어제가 월요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콘스탄챠, 아무래도 곯아떨어질 때 머리를 세게 부딪힌 거 같아. 어쩌지?"


"으음.. 요일을 따진 지 너무 오래돼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멸망 전 달력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아마 토요일일 거에요."


"토요일? 아, 다행이다. 그럼 좀 더 잘 수 있겠네. 고마워 콘스탄챠."


그렇게 감사인사와 아쉬운 작별을 나눈 뒤 나는 다시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깐만. 토요일? 어제가 월요일이었는데 어떻게 오늘이 토요일이지? 말이 되나? 안 되지. 될 리가 없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따지기 시작했다. 붙임성 떨어지는 내가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파라소셜리즘인가 뭔가 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무슨 소리야, 오늘은 화요일이잖아. 화요일은 일정이 잡혀있단 말이야."


"네? 그럴리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발행된 달력이 60년전 것이긴 해도 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달력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토요일이 맞아요."


"60년? 지금이 몇 년인데?"


"2171년 5월 4일이에요."


"2171년?"


말도 안 되는 연도에 듣고 나서야 나는 이 뜬금없는 토론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축축했던 두번째 꿈에서 깨어나 라스트오리진 오프닝 배경인 첫번째 꿈으로 돌아왔다는 것.

둘째, 이 디테일한 설정의 꿈에서 한번 더 깨어나야 한다는 것.


'자다 깨서 그런가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정리는 좀 된 것 같네. 꿈에서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다시 자면 되나? 아니지. 그랬다간 또 두번째 꿈으로 갈지도 몰라. 꿈.. 꿈이 관련된 게 뭐가 있었지? 아, 인셉션에서는 분명..'


"저기.. 그리폰이라고 했지?"


"어? 어, 어.. 맞아. 잠은 좀 깼어?"


묘하게 안쓰럽게 쳐다보는 눈빛을 무시한 채 나는 그녀에게 해괴한(정상적인 정신이 박혔다면 하지 않았을) 부탁을 전했다.


"아까처럼 옆구리 좀 걷어차줄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페허의 돌벽에 스스로 머리를 찧는 건 무서웠기 때문에 차라리 남이 때려준다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합리적 판단을 도출한 자신의 영특함이 잠깐 자랑스러웠다.


"..."


안쓰러움이 역겨움으로 바뀌는 그리폰의 눈빛을 보기 전까지.


"너.. 그런 취향이었어? 기분나빠.. 그럼 아깐 왜 그렇게 아파한거야?"


"아까? 아까 내가 아파했다고?"


왠지 대화의 앞뒤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 상황에 '아까'라는 부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처음 일어났을 때 내가 그.. 널 좀.. 세게 차서 니가 소리지르면서 '어떤 자식이냐'고 화냈잖아!"


"무슨 소리야. 난 지금 막 일어났는데."


내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따지고 들자, 그녀의 눈빛이 조금 더 안좋은 방향으로 바뀐 게 느껴졌고,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도 왠지 모르게 비슷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저기.. 인간님? 혹시 오늘이 무슨 날짜에 무슨 요일인지 기억하세요?"


"넌 내가 방금 들은 것도 기억 못하는 바보로 보여?"


"앗,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대답하실 수 있으신가요?"


"당연하지.. 그야.. 그야.. 1715년 4월.. 2일.. 월요일.. 어제는.. 어제는 무슨 요일이었지? 토요일?"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짙고 희미한 심해.. 마치가 심해 속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들도 나와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인지 표정은 더욱 어둡게만 변해갔다.


"콘스탄챠.. 저거 설마.."


"그리폰.. 잠깐만.. 인간님, 저희의 이름은 기억하시나요?"


"그거야 당연히..!"


바보같은 질문이다. 내가 즐겨하던 ...에 가장 먼저 나오는 ...의 이름을 모를리가 없다. 그건 날짜보다도 잘 아는.. 잘 아는...


"그, 그, 그로 시작하는.. 뭐였지..?"


"인간님.."


"잠깐만 기다려. 분명 알아. 기억한다고! 네 이름은.. 네.. 이름은..."


"인간님.. 인간님의 이름은.. 기억하시나요?"


"내 이름..? 내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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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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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끄적여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