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 호의 회의실은 영 좋지 못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로열 아스널이나 멸망의 메이는 오랜만에 마음껏 때려부술 일이 생겼다며 씨익 미소짓고 있었지만 사령관을 비롯한 나머지 지휘관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는 레모네이드 알파가 미 대륙을 지배중인 펙스의 세력현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육군 병력으로는 구 미군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을 주체로 각 회사들의 전력이 연합해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해군은 저항군의 함대와 비등비등한 규모입니다.”

 

잠시 그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아왔다 곧 다음 말에 다시 썩어 들어갔다.

 

“다만 저항군 함대는 60년간 동면 후 깨어난 상태입니다. 당시로부터 60년간의 세월이 흐른 만큼, 펙스 해군을 통제하는 레모네이드 감마가 휘하 함선들을 개수하거나 신규 건조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세력보고를 듣던 사령관은 굉장히 수심이 어린 얼굴로 알파에게 말했다.

 

“알파.”

 

“네.”

 

“네 말대로라면 세력격차가 너무 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저들에게 공격을 하는 건 자살 행위인 것 같은데.”

 

알파의 표정도 잠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얼굴을 다잡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 뉴욕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철의 왕자’의 데이터를 얻어간 오메가와 충성파 레모네이드들이 회장들을 그 기술로 되살릴 위험이 큽니다. 그리고 그들이 되살아난다면..”

 

“놈들이 미 대륙을 시작으로 다시 세상에 멸망 전 인류를 풀어놓게 되겠지.”

 

무적의 용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말없이 용에게 동의했다. 사령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결국 공격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극소수를 제외한 지휘관 일동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리와 용은 뉴욕 상륙전에서 죽어나갈 인명들을 본능적으로 계산하며 눈을 꾹 감았고, 레오나는 스틸라인과 호라이즌의 제파가 휩쓸고 간 뉴욕에서 고가치 표적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다 예측되는 피해에 눈을 크게 떴으며, 칸은 눈을 감고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릴 방안을 짜고 있었다.

 

그 현장에서 그나마 밝은 것은 단 둘이었다. 멸망의 메이와 로열 아스널이었다. 먼저 메이가 말했다.

 

“흥, 왜 벌써부터 패배한 개들처럼 죽상이야?”

 

그 말에 아스널을 제외한 모두가 메이를 노려보자, 메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까짓 도시, 그까짓 시설. 핵 발사허가만 있으면 손가락 하나로 폐허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당장 무적의 용의 전략 핵잠수함에 실린 다탄두 핵미사일만 120기, 탄두 수를 합치면 960발이야. 미 동부 거점이란 거점마다 전략핵탄두를 한 발씩 꽂아 주고도 500발이 남아. 원한다면 미 대륙 전체에 핵샤워를 시켜줄 수도 있다구?”

 

그 말에 회의실의 모두가 전율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무적의 용의 함대에는 핵미사일도 장착되어 있었다. 요즘 메이가 동침 문제로 영 체면을 구겨서 그렇지, 원래 그녀는 ALCM같은 비교적 얌전한 물건 대신 ICBM같은 보다 거창한 물건들을 다룰 권한도 가진 지휘관이었다.

 

“제정신인가? 그 공격을 한다면 펙스 충성파와 저항군의 전면 핵전쟁이야. 멸망의 메이, 세상을 두 번 멸망시키고 싶은 거냐?”

 

마리가 소리쳤다. 그녀는 20세기 냉전시대의 인류가 두려워하던 그것이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이는 마리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세상을 두 번 멸망시킨다고 했지? 난 펙스를 처리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말했을 뿐이야.”

 

그 말에 마리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런 마리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참으로 오랜만에 잔인한 미소를 지은 메이가 사령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발사허가를 내려줘, 사령관. 내 권한이 있다면 미 대륙의 핵사일로까지 일시적이지만 장악할 수 있어. 미국과 용의 전략핵을 합치면 총 1,251발. 펙스 충성파라는 존재는 당신의 명령 한마디에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야.”

 

오만하고도 소름끼치는 말에 알파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백 발의 핵미사일에 강타당한 펙스의 본거지, 뉴욕 맨해튼 섬이 섬광과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광경이 재생되고 있었다.

 

메이 옆에서 부관으로 참가하고 있던 나이트 엔젤이 오랜만에 멋진 대장을 보고 짐짓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장, 할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대체 그치만이라는 대사는 어디서 배워와서는..’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뭣 하러 핵을 날리지? 핵보다 더 좋은 무기가 있지 않나.”

 

메이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로열 아스널? 대체 전략 공격보다 더 효율적인 무기가 어디 있다는 거지?”

 

“바로 여기 있지.”

 

아스널이 자기 배를 탕, 하고 쳤다. 그 모습에 메이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옆의 부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앤, 저게 대체 뭔 뜻이야? 쟤 미친 거 아냐?’

 

그러자 부관이 한심한 눈으로 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에휴. 대장한테 기대한 제 잘못이죠. 오늘은 좀 멋진가 했더니 역시나네요.’

 

‘야,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내가 오늘 멋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것도 모르니까 그 흉부의 비대한 지방덩어리 사용법도 모르는 겁니다, 이 땅꼬마야.’

 

‘이이익! 너 말 다 했어?!!’

 

메이와 나이트엔젤이 늘상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의외로 회의실 모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잊혀져 버린 메이가 나앤에게 ‘그치만..그 동작 정말 뭔지 모르겠는걸..’이라고 한 탓에 부관이 다시 머리를 잡는 것과 별개로, 그들을 제외한 회의실 인원 전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칸의 옆에 앉아있던 부관이 손을 들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의 그녀에게 아스널이 말했다.

 

“내 계획의 중추가 될 인재가 거기 있었군. 내 할말을 대신해 주겠나?”

 

그러자 그 인재, 탈론페더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탈론허브를 모든 펙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사령관님의 위대함을 미 대륙 전체에 알리는 겁니다!”

 

아스널이 매우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칸에게 말했다.

 

“신속의 칸, 정말로 훌륭한 부관을 뒀군.”

 

칸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사령관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내 개인의 자유는 없는 거냐?! 지금 너희들끼리 돌려보는 것도 모자라서 북미 대륙에 그걸 대놓고 뿌리겠다고? 야, 이건 선 세게 넘었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사령관. 그대의 강력한 빅 칙 스나이퍼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물건이니까. 아무리 오메가라고 해도 그걸 한번 보면 꿈에서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야!”

 

평정을 잃은 사령관이 아스널에게 소리치는 것과 별개로, 지휘관들은 다들 얼굴을 붉힌 채 그 이야기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 중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불굴의 마리였다.

 

“생각해 보니, 인간의 취향은 다양한 법입니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과 관계를 맺는 작품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로 사심이 아닙니다.”

 

“네 어두운 사심을 충족하려는 욕구가 넘쳐흐르잖아!”

 

하지만 사령관의 절규는 아랑곳하지 않은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이 연이어 이어졌다.

 

“흠..정신공격이라. 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기왕이면 중년물도 좀 찍어보지 그래, 사령관?”

 

“듬직한 모습은 나쁘지 않지. 나도 동의한다.”

 

“소관은 사령관께서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오..”

 

레오나, 칸, 무적의 용의 말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면 다들 진지하게 턱을 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강화된 사령관의 육체는 지금 저것들이 침을 흘리는 걸 숨기려고 저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말았다. 그가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내 의견은 없는 거냐?”

 

그때 테이블 저쪽에서 하늘색 머리가 손을 들었다. 사령관이 얼굴이 빨개진 슬레이프니르 옆에 앉은 그녀를 보고 발언을 허가했다.

 

“그래, 흐레스벨그. 한번 의견을 말해봐.”

 

“솔직히 지난번 신작인 모모X젠틀맨의 매지컬 퓨전!은 펙스 놈들의 뇌를 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제가 친히 가지고 온 이 흐즈믈르그X뽀끄루X백토X모모X젠틀맨의 다이나믹 매지컬 퓨전! 시나리오를 보시면 더 펙스에게 효과적인 선전물을 만들 수 있..”

 

사령관이 말없이 뭉크의 절규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아니, 이것들이 개방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지들이랑 나랑 그 짓을 하는 영상을 펙스 충성파에 뿌려서 거기 애들을 전향시키겠다니 미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의 뒤에서 흐레스벨그의 개소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멸망 전 일본의 예를 볼 때, 이런 형태의 공격을 ‘민메이 어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작전에 ‘사령관 어택’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날 회의에서는 사령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무적의 용의 주도로 가칭 ‘사령관 어택’계획이 통과되었다. 계획에 따라 대규모 컴퓨터 서버가 증설되어 수복한 하와이에 세워졌고, 탈론허브의 자료가 정기적으로 컴퓨터에 이동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최종적으로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때, 드디어 탈론허브가 대망의 북미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뉴욕 본사에서 씩씩거리고 있던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그 소식을 들은 건 탈론허브 상륙 약 1개월 후였다. 그녀가 휘하 바이오로이드를 보고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거기 트래픽이 얼마라고?”

 

“그으..”

 

“빨리 말해!”

 

“평균적으로 저희 오메가 산업이 보유한 네트워크 총량의 71.5%가 해당 사이트의 시청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최저 69%, 최고 74%입니다..”

 

이번에는 오메가가 뭉크의 절규를 온몸으로 표현할 차례였다. 옆에서 부관이 수줍은 얼굴로 오메가의 책상에 종이 한장을 놓고 잽싸게 물러났다. 종이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TalonHub 주간 시청률 통계

1위: 매지컬 5단 합체! 절체절명의 마법소녀! 호응도 95.245%

2위: 알파 헌팅 호응도 92.24%

3위: 제이미는 노란 누나가 좋아! 호응도 91.56%

4위: Dragon rider 호응도 89.98%

..

 

오메가가 서류를 보더니 다시 뭉크의 절규 포즈를 취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의지가 시험받고 있습니다!’



2편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