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출발해최대 출력으로!”

 그래알았어!”

 

 포츈은 얼굴이 반쯤 파랗게 질려서 다급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크게 놀랐는지더 물어보지 않고 모든 인원이 승선하자마자 오르카를 최대 출력으로 발진시켰다급하게 토크를 올린 탓에 함내가 부들부들 떨리며 기관실로부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왔지만포츈이 패널을 몇번 두드리니 곧 오르카가 그 육중한 몸을 천천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그것도 잠시였다.

 

 어엇우리 오르카가 왜 이러지?”

 

 급하게 가속을 받아 전진하던 오르카는다시 무언가 긁히는 굉음을 내며 다시 브레이크를 밟은 듯이 급제동했다관성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리며 비틀거렸다포츈은 경고음을 내며 점멸하는 패널을 이리저리 조작했지만굉음이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고오르카는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무슨 문제야?”

 

 나는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지도 못하고 포츈을 재촉했다포츈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등 뒤의 기계팔까지 동원해 간헐적으로 붉은빛을 뿜어대는 항법 장치를 급하게 만지고 있었지만오르카 호는 여전히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나가질 못하는데…… 모니터가…….”

 

 갑자기 포츈과 내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포츈은 머리 위로 끼쳐오는 불온한 기색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함교 위에 드리워진 것을 올려다보았다.

 

 뭐야저건…… 오르카를 감싸고 있는데?”

 

 그리고나도 침을 삼키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내키지 않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함교의 창을 가로지른 시꺼멓고 거대한 촉수를 올려다보았다.

 

 제길…… 늦은 건가이젠…….”

 

 나는 함교 위에 드리워진 저것을 알고 있다나만이 저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니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도 나만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나는 네스트와의 전투로 피로해진 머리를 다시 채찍질했다머릿속에 밀려들어오는 정보를 다시 정리해나간다살덩이를 먹는 자바다에 들어간 모든 영혼을 찢는 자인간 영혼의 수확자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파편……내 안의 본능이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미친 심장이 마구잡이로 가슴 안에서 날뛴다그런데도 내 머리는 뻗어나온 가느다란 가지를 되짚어가며 굵은 줄기를 찾아가고 있었다고름투성이 살덩이와 수없이 뚫린 입들… 분노에 차서 이를 북북 갈아대는 소리와 우둘투둘한 살갗 밑에서 움찔대는 근육들… 그리고 다닥다닥 박혀있는 그 눈눈들……심해에 뿌리내린 광기의 근원이 서서히 내 악몽에서 풀려나 기억의 안개를 헤치고 존재의 편린을 내보이려 하고 있었다아아형언할 수 없는 자보아서도감히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그것그래저 창창밖에 드리워진 저것은

 

 콰앙!

 

 거대한 폭발음이 오르카 호의 함교를 뒤흔들며 유사와도 같은 광기의 구렁텅이에 서서히 빠져들어가던 나를 억지로 끌어올렸다나는 헉하고 무의식적으로 멈추어있었던 숨을 다시 내뱉었다가슴이 뻐근하고 갈비뼈 밑에는 칼로 쑤시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포츈은 당황한 눈으로 슬슬 거두어지는 촉수를 올려다보았다패널의 붉게 점멸하던 빛들이 점점 녹색으로 회복되기 시작했고간신히 오르카 호는 전진했다.

 

 앞으로 나간다출발!!!”

 

 포츈의 안도감에 찬 외침에 나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렇게 곧나는 나를 구해준 여신님과 만날 수 있었다.

 

 반갑소이다소관은 용이라 하오그대가 이 배의 함장이시오?”

 

 

***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뭐였을까?

 

 그날마치 전장에 강림한 여신과 같이 벽력같은 포격을 쏟아부어서 별의 아이의 마수로부터 나와 오르카를 구원해주어서였을까아니면푸른 빛이 약간 도는 흑단 같은 머릿결과 바다 같이 깊고 검푸른 눈동자에오똑한 콧날과 단호하게 앙다문 입을 갖춘 단아한 이목구비에 매료되어서였을까아니면대전략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 보여주는 그녀의 날카롭고 빈틈없는 식견과 풍부한 경험에 감탄해서였을까으뜸가는 공을 세워도 부하들에게 양보하고자신이 가진 전쟁에 대한 통찰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청렴하고 올곧은 성품에 감동해서였을까의외로 칭찬에 약한 귀여운 일면이 엿보여서였을까아니면…… 아니면…….

 

 점점 커져가는 나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대책없이 부풀어 올랐다업무상으로 마주하는 시간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그녀로부터 해전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핑계로 지휘관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처음에는 다른 지휘관들도 내가 가진 향상심에 뿌듯해하며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었지만점점 그녀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니 그녀와 나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타당한 의심이기도 했다그녀와 나의 사이에 점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니까결국제일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레오나는 그녀에게 모의 해전을 진행해보자고 요구했다.

 

 만약에 내가 이긴다면……사령관은 굳이 해전을 무적의 용에게서만 배울 필요는 없어지는 거잖아?”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레오나의 눈 밑에 낀 짙은 그늘을 보고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몇 주 동안 거의 모든 해전 관련 기록물 출납 대장에 레오나의 서명이 있던 건 다 이것 때문이었구나마음속에 품었던 의혹이 하나 해소되었지만다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내 예상대로 모의전은 무적의 용의 승리였다아무리 지금까지의 지휘관 간에 있었던 워게임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던 레오나라지만벼락치기식으로 급하게 얻은 지식으로는 멸망전쟁을 거치고도 전력을 온존했던 불패함대의 지휘관을 이길 수 없었다나는 상심한 레오나를 달래주기 위해 그날 밤에 잡았던 용과의 선약을 급하게 미루고 온전히 레오나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그렇게 내 품에 폭 안겨 칭얼대는 레오나를 몇 번이나 위로해주고 나서야 간신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몇 주간의 노력을 곱절로 보상받고 행복한 표정으로 새근거리며 지쳐 잠든 레오나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빗어 넘겨주면서손이 많이 가는 딸을 돌보는 아빠의 마음이 이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나는 150여 년 만에 처음 사춘기를 맞은 큰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저기…….”

 …….”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그대는 마지막 남은 인류이니만큼재건을 위해 여러 바이오로이드들과 통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단둘이 남은 회의실에서 이쪽으론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상에 펼쳐놓은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용의 모습은마치 나 화 안 났어.”라고 말하는 멸망 전에 있었다는 여자친구라고 하는 상상의 생물을 보는 듯했다몇 분째 심해저 망간단괴 채굴 사업 계획서에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챘지만토라진 용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은 요원하기만 했다.

 

 ……!”

 

 나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쥔 용의 부드러운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갰다용의 몸이 순간 흠칫 떨렸으나이내 평정을 가장하고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간만에 있는 부상일이잖아……같이 밖에서 바람 좀 쐬자고 한 거 잊었어오늘은 딴 데 안 가고 용이랑만 있을 거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결국 견디지 못한 용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어느새 달아오른 손을 스르르 뺀 용은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지곧 준비하고 올 테니 위에서 만납시다그럼.”

 

 언뜻 매몰차게 말하는 것으로 보였지만재빨리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서류들을 급하게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서는 용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을 꾸욱 삼켰다.

 

 

 

***

 

 

 

 수면등이 켜진 복도를 살금살금 발끝으로 지나가며 사령관용으로 마련된 숙소로 향했다도중에 복도를 순찰 중인 브라우니가 재빨리 직립하며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려 했지만간신히 손을 뻗어 만류하고 내 방의 문 앞에 섰다조심스럽게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 잠금이 해제되는 기계음도 손으로 가리고 문을 살며시 닫은 나는불을 켜자마자 콘스탄챠와 마주쳤다.

 

 깜짝이야콘스탄챠밤늦게 무슨 일이야기다리고 있을 거면 언질을 주지 그랬어……?”

 주인님주인님의 방을 청소하다가 발견했어요이거 가지러 오신 것맞죠?”

 

 나는 콘스탄챠가 내민 손에 담긴 녹빛의 하트 모양 상자를 보고는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콘스탄챠는 엷은 미소를 띠며 내게 웃어보이려 애썼지만발갛게 상기된 코끝과 눈가에 있는 눈물 자국을 숨길 수는 없었다요즘 들어 아이들에게 상처만 주는 것 같아 내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날 처음 찾아내 준 그녀내가 가장 신뢰하는 그녀용이 없었으면그 반지는 분명…….

 

 잘 간수하시고 꼭 전달해 드리세요.”

 

 콘스탄챠는 조심스럽게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건네받은 작은 상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당장이라도 꺾일 것 같이 위태로운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오늘만큼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콘스탄챠에게 뻗어가려는 내 손을 간신히 참아 멈추고 나는 몸을 돌렸다정말 끝까지 잔인한 짓이었지만나는 입술을 악물고 끓어오르는 자기혐오를 씹어삼키고 등 뒤로 그녀에게 말했다.

 

 콘스탄챠알겠지만 이 반지에 대한 건…….”

 저는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고마워.”

 

 나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에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당장이라도 다시 문을 열고 콘스탄챠를 품에 안고 달래주고 싶었지만그건 콘스탄챠의 배려를 무시하는 처사이고무엇보다 내가 마음에 정한 그녀를 배신하는 짓이었다오늘만큼은 나는 한 여자만의 남자가 되어야 했다.

 

 

 

***

 

 

 

 엘리베이터를 타는 고작 십여 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심호흡하고 마음속에 지워진 짐을 깨끗하게 덜어내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당장이라도 내 마음에 담긴 감정을 전하는 것을 기다리기에는 긴 시간이었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천천히 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풍경을 먼저 즐기고 있어서 미안하군그대도 어서 올라오시오.”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새까만 하늘을 따라 새하얀 별들이 점점이 박혀있었고시원한 바닷바람이 짭짤한 내음을 싣고 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와 선체를 간지럽히고는 하얗게 부서져 사라졌다그리고 가장 높은 망루에 달빛을 받아 환히 빛나는 나의 여신님이 있었다.

 

 나는 대꾸도 못 하고 홀린 듯이 망루를 올라갔다용이 내민 손을 잡고 두셋이 간신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좁은 망루에 올라서자대책 없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용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흘끗 보고는난간에 두 손을 짚고 눈을 감으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만끽했다용의 머릿결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며 청량한 향기를 내뿜었고나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따라 어찔거리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아까는……미안했소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지.”

 아니야용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있었다면 오히려 내가 더 불안했을 거야날 그만큼 특별하게 생각해주지 않는 건가하고.”

 호오……그렇다면 그대는 일부러 내 마음을 시험하려고 나와 잡은 약속까지 번복하며 발할라의 지휘관에게 간 것이오?”

 아니그럴 리가 없잖아…….”

 후훗농담이오.”

 

 용은 다시 필사적으로 된 내 표정을 보고는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쥐며 웃었다나는 다시 섬뜩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멋쩍게 웃었다거의 자업자득이지만오늘은 정말 정신 건강에 해로운 날이다구체적으로는 30구역에서 센츄리온 제네럴 부대를 만났을 때만큼

 

 그래도……나도 놀랐다오부끄럽지만당시 내 주변의 남자들은 무뢰한들밖에 없어서 교류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이런 종류의 감정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나도 놀랐어용처럼 멸망 전부터 살아왔던 아이들은 다들 어딘가 달관한 듯한 태도가 은연중에 보이거든감정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지그래서 더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아프면 아프다고슬프면 슬프다고 정직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으니까어른스럽다면 어른스러운 거겠지만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

 …… 소관은 멸망 전에 생산된 개체이긴 하나도중에 동면한 시간도 길어서 그들만큼 나이를 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주면 좋겠소만.”

 

 용의 귀여운 항변에 나는 다시 웃음지을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만 보여주는 약간 소심하고 짓궂은 구석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정말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게 틀림없군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재확인하자품속에 숨겨놓은 상자가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나는 묘하게 열을 띤 것처럼 느껴지는 그 상자에 손을 뻗어 꽉 쥐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소?”

 뭐가?”

 그대와 같은 위치에 서는 자들이야말로 항상 뱃속에 우환을 안고 사는 법이라오나만을 바라보고신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완벽하고 공명정대한 존재로 남아있어야 하지그래서 고민을 삼키고마음을 숨기고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과 귀를 모두 닫으려 한다오지금 그대가 지고 있는 만큼의 막중한 것은 아니지만나도 비슷한 것을 짊어져 본 적이 있소그러니까……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찔끔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품에서 손을 빼내어 등 뒤로 숨겼다용은 깊고 짙은 눈으로 내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끝없이 펼쳐진 심원한 바다와도 같은 눈동자가그날 이후로 내 눈 깊숙한 곳에 간신히 억눌러둔 무언가를 들여다보려는 듯했다문득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저 바다에 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잠기고 싶었다아니아니야불현듯 든 몹쓸 생각에 나는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강인한 그대를 그리도 두려워하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가까운 훗날에 내게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군나도 그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정진하겠소.”

 

 용은 씁쓸하게 시선을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한심하게도 그녀를 안심시켜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아니아니야나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해주던 그 아이까지 슬프게 만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그날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무력한 날 구해준 건 바로 너인데수많은 말들이 목구멍에서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끝에서 굴러떨어지려는 상자를 다시 움켜쥐었다내가 너를 가장 신뢰하고 있다는 증표.

 

 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대여이건 설마…….”

 

 용의 시선이 백금 고리에 박힌 다이아몬드에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었다나 역시 순간적으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반쯤 울컥해서 저지른 짓에 굳어버리고 말았다더 좋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더 나은 말이 있었을 텐데나름 준비해간다고 생각해놨던 어구들은 이미 거품처럼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그렇다면 남은 것은 애드리브뿐이겠지.

 

 아니야널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야단지…… 단지 내 마음이 강하지 않아서일 뿐이야너에게만큼은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그렇지만조금만 기다려줘나도 노력할 테니까…….”

 

 두서없는 말들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라 입 밖으로 흘러넘쳤다나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갈라진 목소리를 바로잡았다.

 

 내 속마음도 제대로 너한테 내보일 수 없는 겁쟁이이지만그래도 너와 남은 평생을 같이 보내고 싶어내 마음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징표이고내 맹세를 보증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엉망진창인 서약이지만…… 부디 받아주겠어?”

 나 역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오그렇지만 한 군의 지휘관이 삿된 감정을 품는 것은 안 될 말이오그대도 그런 것은 다 헤아리고 있었겠지그래서 내가 거절해도 뒤탈이 없도록 보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게 그…… 반지를 주려는 것이고.”

 그래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서로를 위해 숨기고 싶었어하지만영영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네 입장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해서 정말 미안해.”

 

 용은 다시 반지에 두었던 시선을 무릎 아래로 떨궜다그와 함께 내 마음도 점점 가라앉아갔다나는 속으로 자조했다그래이기적으로 굴었던 벌을 받은 거겠지그리고 나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를 슬프게 만든 업보일 지도 모르지그렇게 상자를 든 손을 거둬들이며 체념하려는 찰나내 앞에 새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그 모든 것을 헤아리고도…… 나에 대한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이라면……그대는 정말 치사한 사람이오.”

 

 달빛을 등지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인인 내게 어울리지는 않겠지만그대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나는 달달 떨리는 손을 간신히 가누며 그녀의 약지에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서약의 반지를 끼워 넣었다마치 원래부터 그녀의 몸과 일부였던 것처럼 반지는 딱 들어맞았다.

 

 부디 앞으로 이 몸을 부탁드리오……아니부탁드립니다저 역시 서방님의 견마가 될 테니.”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감촉에 둑이 터진 듯이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바닥에 떨어진 별빛들이 부딪혀 흩어지며 반짝였다.

 

 나는 흐느끼는 소리를 이를 악물고 참아내려 애쓰며 그녀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줘……정말로 부끄러우니까…….”

 글쎄정말 진귀한 광경을 보았으니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그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자랑하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합니다.”

 비밀…… 안 지키면…… 단둘이 있을 때는 앞으로 용용이라고 부를 거야…….”

 서방님?”

 

 달빛 아래에서 그녀와 나의 그림자가 겹쳐졌고그렇게 둘만의 밤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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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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