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 라오문학) 느림보

ㅇㅇ(117.111)



폭약이 터지는 굉음과 매캐한 화약 냄새,

불규칙적인 대지의 진동과 그 진동을 기록하듯 퍼지는 흙먼지들.

철충과의 전투가 마무리되어가는 전장 외곽 구석진 곳에 한 다이카 모듈이 털썩 주저앉는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장 안에 있었음을 보여주듯 정돈되지 않은 머릿결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옷깃. 짧은 한숨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은 다이카 모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섬을 개척하고 철충들을 섬멸하기 위한 전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령관의 지휘와 든든한 자매들이 함께하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형태의 전투에 이 다이카 모듈은 정찰기 중 하나로 편성되었다. 고성능 레이더로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본대의 지휘관들과 사령관에게 전송, 그에 맞는 전술을 수립하여 유연하게 대책을 수립해 철충들을 섬멸해나간다-라는 기본적인 전투 형태는 제조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다이카에게도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작은 변화가 있다면, 정찰을 통해 얻어낸 정보가 제대로 전송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훌륭하신 사령관께서는 방해 전파를 발산하는 새로운 형태의 철충 연결체들이 있다는 것, 철충들의 방해전파는 다른 주파수를 이용하는 무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까지 파악, 정찰 결과를 직접 무전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으로 전술을 수정해 대응에 나섰고, 정찰의 효율이 약간 감소하긴 했지만 사령관의 지휘 아래 여러 번 합을 맞춰 온 다른 정찰기 자매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못하는 듯 했다. 적어도 다른 기종의 정찰기 자매들에겐 말이다.



"여긴 그리폰, 10시 방향으로 20기 규모 철충 도주중"

"슬레이프니르, 본인 기준 7시 방향 연결체 포함 6기, 지원 바람"

신속하고 정확한 자매들의 브리핑 속에, 지휘관들은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전술을 수립해가며 철충들의 개체수를 조금씩 줄여 나갔다.

"다이카...3시 방향...셀주크 모델 발포 준비 중...유의 바람..."

하지만 무전을 통해 직접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전투에 배치된 유일한 다이카 모델이었던 그녀에게는 익숙하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방법이었고, 사령관과 지휘관들의 전술 수립에 아주 작은, 마치 스웨터에 인 보풀 한 개와도 같은 차질을 만들고 있었다.



스웨터의 보풀 하나와도 같은 오차. 발키리와의 약속에 늦은 사령관이라면 무시하고 입고 나갈 법한 작은 오차였지만, 수백, 수천명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전장에서는 그만큼의 오차도 죄없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하고 넘쳤다. 그녀의 느릿느릿하고, 나긋나긋한 브리핑은 그녀의 레이더에 띈 셀주크가 발포 준비를 마치고, 공중으로 자매들의 목숨을 앗아갈 폭약 덩어리를 쏘아올릴 때까지도 마침표를 찍지 못했고 결국-


-콰앙-!!!-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기 전에, 스틸라인의 한 분대가 철충들을 향해 용감하게 총알을 쏟아붓고 있던 근방에 그 화약 덩어리가 착탄했고, 약간의 흙먼지가 걷힌 후에 다이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려드는 다프네와 아군 ags 몇 기, 그리고 그곳을 폭격한 적 셀주크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둠 브링어의 전략 폭격이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적을 향해 총을 갈기던 브라우니가 수 미터 떨어진 곳에 마치 돌조각마냥 흝뿌려지는 모습은 어느 경험부족한 다이카의 정신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사려 깊은 사령관은 다이카를 전장에서 배제시키고 그 자리에 그리폰 하나를 추가로 배치시켰다. 떨리는 손발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녀는 전선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공터에 착륙했고, 발이 땅에 닿자마자 풀썩 소리와 함께 땅에 주저앉아버린다.



전장에서 겪던 극도의 흥분상태가 진정되자마자, 다이카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슬픔과 분노. 자책과 미안함, 걱정과 무력감...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녀를 덮쳐 왔고, 그 감정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를 향했으며, 그녀를 잠식해 왔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을텐데'

'나 때문에...나 때문에..."



육하 원칙을 모두 갖춘 깔끔한 문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시적이고 간드러진 문체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3시 방향 셀주크 발포 준비중」이라는 열 글자 남짓의 문장만 전달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내가 아니라 다른 자매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해냈을 일이었다. 나의 부족함, 나의 열등함 때문에 죄없는 자매가 적이 뿌린 화염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그 화염의 열기에 바스라진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흐아...으아아아아으윽...!"


그 자리에서 다이카는 울고 또 울었다. 그녀의 비명과 울음소리는 저 멀리서 울리는 폭발음이 삼켰지만, 그녀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과, 그녀를 집어삼키는 자책은 누구도 덮어주지 못하였다. 생산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이 어리고 여린 다이카 모듈에게 자신의 결함으로 인한 아군의 죽음은 자신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는 적의 총알보다도 아프고 쓰라리게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령관은 여전히 침착하고 냉철했다. 적의 포격에 피격된 브라우니들은 곧바로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있게끔 처리하고, 그 자리에는 바로 병력을 보충시켜 전선이 와해되지 않게 하였다. 그와 매번 함께했지만, 볼때마다 놀라운 그의 빈틈없는 지휘에 탄복한 불굴의 마리 4호가 감탄의 탄성을 내지를 무렵즈음엔, 이미 섬의 철충의 9할 이상이 정리된 후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이카의 주변을 에워싸던 총성이 거의 멎어갈 무렵 즈음엔 다이카의 눈물도 그쳐버린 후였다. 눈물은 멎었지만, 초점 없는 눈으로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의 귓가에, 불쾌한 기계음이 들렸다. 흠칫하는 소리와 함께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니, 반쯤 파괴된 철충 연결체가 기동하고 있었다. 이젠 죽는구나, 우느라 지쳐 탈진해버린 그녀가 현실 감각마저 조금씩 멀어지는듯 눈을 감으며 해탈한 듯 피식 웃자, 철충은 팔에 달린 화기를 충전하듯 남은 동력을 모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힌참을 울고 난 뒤여서일까, 왜인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던 다이카가 각오하듯 입술을 꽉 문 후에도 철충의 포격은 그녀를 덮치지 않았다. 이상함을 감지한 다이카가 눈을 떠보자, 철충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총구를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곤 계속해서 불쾌한 기계음과 함께 단 한 발의 저격을 위해, 화기를 충전시키고 있었다.



저항할 지도 모르는 눈앞의 적을 보고도, 다른 곳으로 총구를 향하고 있는 철충. 순간적으로 다이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철충의 총구가 향한 곳을 쳐다봤다. 그 끝에는, 다이카보다 저격 우선 순위가 높은 대상, 전투가 끝난 전장을 돌아보고 부하들을 치하하러 나온 사령관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령관, 그리고 이 가엾은 다이카에겐 운이 좋게도, 반파된 탓인지 다이카의 눈앞의 철충은 평소보다 몇 배 이상 긴 시간동안 화기에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있었다. 다이카가 무전기를 꺼냈다. 아직,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사령관님이 위험하다」는, 아까보다 더 짧은 문장이 다이카의 입에 도달했을때는, 힘빠진 바람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끝없는 자괴감과 슬픔에 빠져 울부짖느라 한계에 달해버린 다이카의 성대는, 평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닌 갈라진 바람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설령 그녀의 목이 정상이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혀는 사령관에게 위험을 경고하기엔 너무나도 느렸다.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절박했다. 아무리 반파되었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사령관을 겨누고 있는 이 철충은 연결체, 자신의 화기로 저지할 수 있을 확률은 너무나도 희박했다. 제발, 저주스러울 정도로 느린 혀야, 빌어먹을 정도로 약한 목아,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사령관께 경고해라, 그녀는 속으로 절규하고, 또 울부짖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으론, 도저히 뜻을 지닌 문장이,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끄읍...흑...흐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었다.



손 안의 무전기에다 대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부르짖었다. 미친 여인처럼,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절규했다.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함을 탄식하느라 갈라져 버린 목이, 매캐한 화약과 흙먼지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목구멍 안쪽으로부터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누군가를 잃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이 여리면서도 강인한 다이카는 지난 수 시간동안 너무나도 똑똑히 배웠다. 사령관, 내지는 그 옆의 누군가가 지닌 무전기로부터, 다이카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비통한 절규가 새어나왔다.



사령관의 충견, 성벽의 하치코가 지닌 맹수의 육감은 이 여인의 울음으로부터 주인에게 닥친 위험을 경고했다.

"하찌꼬가 지킬게요!"

저 멀리서부터 주인을 겨눈 총구 앞에 방패를 세운 충견, 그 누구보다도 견고한 성벽이 사령관을 가로막았고, 자신의 모든 동력을 끌어모은 철충의 포격은 땅에 두 다리를 곧게 내리고 버틴 성벽에 자그마한 흠집도 내지 못했다. 주인이 명령하기 전까진 절때 쓰러지지 않는, 불락의 요새다운 모습이었다.



저 멀리서, 카학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피와 가래를 내뱉은 다이카의 옆에, 모든 동력을 상실한, 이젠 고철이 되어버린 철충이 불쾌한 기계음과 함께 작동을 멈추고, 땅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나의 사령관은 든든한 성벽 뒤에 생채기 하나 없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 있다. 해냈다, 내가, 이 머저리같은 다이카가 해 냈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그녀의 눈가에서, 아까보다 뜨겁고도 깊은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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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악! 이뱀! 죄송하지 말입니다! 잘못했슴다!!!"

어디서 셀주크의 포격에라도 맞았는지, 온몸에 붕대를 감은 브라우니가 꾀병을 들켜 이프리트에게서 도망다니며 오르카 복도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다이카가 본 것은 그로부터 두달 하고도 보름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