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인방의 산책



K180 셀주크, 중앙 통제 AGS에게 보고


치명적 손상 감지, 이동 불가, 무기 작동 불가, 전원 계통 누전 감지


최대 절전 모드로 들어가겠습니다





드넓은 초록색 들판이 펼쳐진 해안가 절벽, 봄이 되어 꽃들이 피어나고 떨어질까 두려운 낭떠러지에 바닷새들은 둥지를 튼다. 저 멀리 수천만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던 인공섬들의 잔해가 보인다


오늘은 특히나 날씨가 좋은 날, 오르카호는 인공섬에서 식량과 연료 그리고 자재들을 찾기 위해 부상해 옛 항구에 정박했다


철충들의 공격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기에 가장 두려운 순간인 부상이 안전하게 끝나면 한 숨 놓을 수 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갑판에 대공용 바이오로이드들을 배치하고 오르카호의 함포를 전개하고 레이더를 가동한다. 다행히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이만" 깍득한 경례를 마친 마리는 스틸라인 군단원들을 이끌고 상륙한다. 공병과 수송전력에 특화된 스틸라인은 육상거점 공사와 자원탐사 임무를 거의 도맡아 한다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는 스틸라인 부대원들과 달리 이들의 보조를 위해 편성된 펙스 콘소시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고 심지어 토미워커 위에서 잠들기도 한다



물론 오르카호에 남은 인원들도 놀고 있진 않는다


포츈을 위시한 엔지니어들은 설비를 점검하고 왠지 모를 고함소리가 들리는 엔진실에서는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다(늘쌍 있는 일이라 이젠 별 신경 안 쓴다)


기동형 바이오로이들은 오르카호 주위를 돌아보며 정찰을 하고 저 멀리 위에서 다이카는 레이돔을 빙글빙글 돌리며 겸사겸사 우아하게 춤연습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함교의 지휘실에서 모든 상황을 통제지휘하는 지휘관들도 빼먹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근들어 사령관에게 애정공세를 보내고 있는 레오나는 사령관의 옆에 앉아 임무 계획표를 점검하고 있고


유미로부터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지도 데이터를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칸은 무언가를 우물우물 씹으며 기습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할 지형들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메이도 오늘만큼은 진지한 태도로 다이카에게서 들어오는 정보를 중얼거리며 읽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들과는 그다지 상관 없다




드넓은 초록색 들판이 펼쳐진 해안가 절벽, 봄이 되어 꽃들이 피어나고 떨어질까 두려운 낭떠러지에 바닷새들은 둥지를 튼다. 그리고 절벽 아래 모래사장에서 흥겨운 콧노래가 들려온다. 사람은 셋이나 이들이 남기는 발자국은 한 쌍 이다



"네오딤...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했잖니..." 오늘도 힘없이 네오딤을 타이르는 레이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식량이니 연료니 하는 문제는 네오딤에겐 그저 재미없는 얘기다.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며 즐거워하던 브라우니들도 없고 말동무가 되어주던 사령관도 지휘실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나가려 했을 뿐인데 레이시 언니, 아니 레이시 엄마는 위험하다며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네오딤의 염력 정도면 철충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레이시는 언제나 네오딤을 걱정한다


그렇지만 레이시 언니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네오딤은 그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다. 그래서 팬텀에게 호위를 부탁했다. 같이 산책나가자는 말에 눈에 띄게 좋아하는 팬텀을 꼬시기는 어렵지 않다


든든한 호위를 얻었으니 이번인 레이시 차례다. 아무리 오르카호가 크고 넓다 한들 결국은 잠수함이다. 전자기파의 미세한 파장 변화도 감지할 수 있는 네오딤에게 오르카호의 조명은 햇빛과는 너무나 다르다


레이시 언니도 불평은 안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언니에게 모처럼 진짜 햇빛을, 그것도 부상때 잠깐이 아니라 하루종일 쬐게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다


"언니, 언니도 같이 나가요" 네오딤은 레이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나... 나도? 괜찮아, 난 그냥 여기서 햇빛만 쬐도..." 그런다고 포기할 네오딤이 아니다


"내 성격 알잖아, 갔다가 팬텀이 한 눈 파는 사이에 내가 어디로 휙 가버리기라도 하면? 언제나 날 지켜봐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 네오딤 스스로가 생각해도 괜찮은 변명이다


역시나 레이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대신 너무 멀리 가지는 않기다? 오래 걷는 건 힘들어..." 그러자 네오딤은 근처에 있던 의자의 나사를 풀어 방석 부분만 떼어내 레이시의 앞에 갖다준다


"이건... 왜?"


"여기 앉아, 오늘은 날 위해서 나가주는 거니까 대신 내가 에스코트할게' 에스코트. 오드리 언니에게 들은 단어다. 오늘 드디어 써먹는다



레이시도 전기력으로 날 수는 있지만 모처럼 네오딤이 자기를 위해 준비했다는데 거부할 이유도 없다. 그는 네오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짓고 방석에 앉는다. 네오딤도 밝은 미소로 화답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텀에게 향한다



"팬텀! 여기야 여기! 휴, 몰래 빠져나오느라 힘들었네, 오래 기다렸어?" 팬텀은 조용히 고개를 젓고 출발하자고 하더니 광학미채를 켜고 눈에서 사라진다


"팬텀? 팬~텀~! 누구 암살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투명화는 왜?" 네오딤이 소리치자 저 앞에서 팬텀이 광학미채를 끄고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이 빨개져있다. "미안... 습관적으로..."



산책을 하던 중, 네오딤은 저 멀리 인공섬의 빌딩 잔해들을 보며 언젠가 자신의 능력으로 저런 건물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레이시는 시선을 돌린다. 폐쇄된 섬은 끔찍한 인체실험을 받은 연구소를 연상시킨다


팬텀은 둘의 상반되는 반응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한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건 마찬가지지만 광학미채 슈트를 쓰는 팬텀과 달리 레이시와 네오딤은 인체실험과 수술을 통해 능력을 얻었다


둘 다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차이를 만든 것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팬텀은 그들을 지켜본다



걷고 날다 보니 어느새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네오딤은 콧노래를 부르고 레이시는 아름다운 화음을 섞고 있다. 팬텀은 조용히 속으로 따라부른다



어느새 레이시도 산책을 즐기고 있다. 조금 의욕을 내보기로 한다. "네오딤, 저 위로 가보는 건 어떨까? 경치가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아" 절벽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언니가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기쁜 네오딤은 웃으며 그러자고 한다. 전기에 취약한 팬텀의 망토 때문에 날아가진 못하고 비탈을 타고 올라가기로 한다



야자수가 울창한 비탈을 따라 걷던 팬텀은 오르카호에 돌아가면 이곳의 코코넛을 챙겨가자고 사령관에게 건의할 생각이다. 네오딤에게도 한 번 물어볼까? 그러나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네오딤이 공중에 떠서 무언가를 찾듯 손을 휘젓고 있다


"네오딤, 괜찮니? 철충이 감지된 거야?" 금속으로 이루어진 철충은 네오딤의 자기력에 쉽게 탐지된다. 레이시는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싶었다. 그러나 네오딤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니, 그건 아냐... 무언가 아주 희미하지만... 살아있어"


그러고는 팬텀과 레이시에게 어서 올라가자고 재촉한다. 레이시와 함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네오딤을 따라잡기 위해 팬텀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10분이나 달렸을까? 저 멀리 보였던 절벽에 어느새 도착했다. 여기저기 꽃이 수북한 들판, 바위 하나 외에는 별다른 건 없다


"팬텀, 저거 보여? 아직 살아있어" 그렇게 말하며 네오딤은 바위를 가리켰다. 그게 무슨 말일까?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위가 아니라 부서지고 녹슬고 이끼가 낀 셀주크였다. 지금도 동형기가 오르카호 근처에서 배치되어 화력지원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그 AGS


"레이시..." "그래, 이제 나도 느껴져. 미세하지만 전류가 흐르고 있어"


네오딤은 고개를 돌려 팬텀의 나이프를 가리킨다. "네 초진동 나이프, 장갑도 절삭한다고 했지? 도와줄 수 있을까?"


팬텀은 나이프를 꺼내 네오딤이 가르키는 부분을 잘라냈다. 여기저기 녹이 슬었지만 의외로 멀쩡한 부분이 남아있는 회로가 드러났다


"흐음... 여기서 전원계통이 아마... 아, 여기다. 여기서 자기력이 느껴져!" 그렇게 말하고 네오딤은 자기력으로 전선 두 개를 꺼내더니 레이시를 바라봤다. 레이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두 전선의 끝을 잡고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 능력은 불안정하고 세밀한 조정도 어려워" 하지만 네오딤은 레이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바로 배터리를 충전시켜주지 않으면 비상 프로토콜 때문에 바로 내장회로가 파괴될거에요, 지금까지는 태양전지로 어떻게든 버텨온 모양이지만..."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손해볼 건 없다는 의미다. 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네오딤과 팬텀에게 잠시 물러나라고 한 후 손에 힘을 집중한다


천천히 전압을 높이던 레이시는 두통을 느낀다. 능력을 쓸 때면 언제나 느끼던 두통이지만 이렇게나 오랫동안 생체전기를 방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파바밧!'


적정 전압에 도달하자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던 레이시가 갑자기 신음하며 쓰러진다. 몸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고 팔다리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언니!!" "레이시!" 깜짝 놀란 네오딤과 팬텀이 달려가려 했으나 레이시는 다시 일어나서 가까이 오지 말라며 손을 젓는다. "위험해!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가까이 오지 마!"


사실 괜찮지 않다. 생체전기의 역류로 인해 머리가 쪼개질듯한 고통이 느껴지는건 물론 근육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네오딤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다


레이시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능력을 안정시키고 다시 전선을 잡아봤다. 이런, 충전이 불충분했나? 약간의 전류가 느껴지긴 하나 여전히 너무 미약하다



레이시는 다시 한 번 전류를 방출한다. 이번엔 아까보다 순조롭게 적정 전압에 도달했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배터리도 슬슬 충전되기 시작하는 걸까? 조금씩 전류가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 번 팔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이번에도 두통이 엄습해왔다. 아니, 아까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그러나 레이시는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버텼다. 솟구쳐오르려하는 전류를 억누렀다. 그리고 환호성이 들렸다


"언니!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살아난 게 느껴져! 언니? 언니!!" 그 말을 들으며 레이시는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천장이다. 평소에도 가끔 신세지곤 햤던 수복실, 왠지 소란스럽다


"언니!! 괜찮아? 나 때문에 괜히..." 네오딤이 울고 있다. 옆에서는 팬텀이 안도의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네오딤, 팬텀 언니는 괜찮아요, 지금은 푹 쉬게 해드리는게 어떨까요?" 그렇게 말하며 다프네는 네오딤의 어깨를 두드린 후 수복실에서 데리고 나갔다


"...그럼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괜찮으시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팬텀도 나갔다. 그러고보니 그 셀주크는? ...우선은 자는게 나으려나...



이틀 후 레이시는 네오딤에게 이끌려 오르카호에 새로 배속되었다는 셀주크를 만나러 갔다. 무기를 새로 달고 녹을 벗기고 상당수의 부품을 교체했다는 셀주크는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셀주크의 강철제 바디를 쓰다듬는 레이시는 그 안의 전기회로는 바뀌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시는 셀주크의 메인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르카호에 새로 배속된 걸 환영해, 몸은 어때?"


"덕분에 철충과의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군요, 레이시 씨? 감사합니다"


"어머! 이런 셀주크는 처음인데? 너 뭔가 특별한 아이구나?" 네오딤도 웃으며 날아올라 셀주크의 등에 걸터앉는다. 엔진열 이상의 따뜻함이 느껴지는건 기분탓일까?





"포츈 언니..."


"왜 그러니 코코?"


"저 셀주크 방금 레이시 언니에게 고맙다고 한 거예요?"


"응응 그렇단다. 누나도 저런 셀주크는 처음이거든?"


"왜 나는... 히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