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마지막 의무 - 1




"주인님.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주세요."




갈아입을 옷,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권총 및 칼, 걸으면서 먹을 음식, 텐트 및 침낭, 휴대용 토치, 그리고 책.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오르카호의 인원들 중 주인님에게 악감정 따위를 품고 있는 인원은 없어요. 제가 단언할 수 있어요. 주인님이 그렇게 걱정하시던 더치걸도, 주인님에게 매번 쓴소리를 늘어 놓는 바닐라도 모두가 주인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FN-11 구역으로 스쿼드를 발사한 뒤 기록을 말소하고, 오르카호를 FN-223 구역으로 이동 시키면 적어도 몇 십년 동안은 다른 아이들이 날 찾이 못하겠지. 일단은 그 정도만 생각해두자.




"주인님은 오르카호의 심장이에요. 주인님이 없어지시면 오르카호는 죽는 거라구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콘스탄챠라면 목을 매달지도 몰라요. 그 아이가 주인님의 존재를 얼마나..."


"미안해. 라비아타."


"미안하면! 제 말을 좀 따라주실 순 없는 건가요!? 이번이 몇 번째라고 생각하세요? 주인님이 처음 그 말을 꺼내셨을 때부터, 전 계속 주인님을 설득해왔어요! 그런데, 그런데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분명 힘들어지겠지. 네가 말한대로, 오르카호의 많은 아이들이 패닉에 빠질 거야. 몇몇은 자살하려 들지도 모르고, 몇몇은 날 찾기 위해 평생 동안 시간을 쏟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난 이 결정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어."


"주인님....."




모든 생각은 더치걸과 함께 할로윈 테마파크 C구역의 실상을 봤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 C구역에서 원형을 잃은 채 장난감으로 쓰이다 정지한 바이오로이드, 그런 친구의 모습에 오열하던 더치걸. 그 모습을 보고 난 마음 속으로 강하게 다짐했다. 인간은 지구에 존재해선 안 된다고. 나를 끝으로 인류는 마지막을 고할 것이라고.




언젠가, 나를 시작으로 다시 한번 인류가 지구를 뒤덮으면 어떻게 될까? 내 사상이 그 때까지 남아있을까?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지위가 동등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찾아올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것이고,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소모품으로써 사라질 것이다. 철충들이 모두 제거 됐다고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비아타. 너에겐 정말 감사하고 있어."


"...."


"힘으로 나를 막지도 않고, 다른 아이들에게 내 부재를 알리지도 않았지. 너한텐 아주 간단한 일일텐데 말이야."


"... 주인님이 오르카호를 위해, 바이오로이드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해왔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주인님의 결정을 막고 싶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 땐 어떻게든 주인님을 설득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미안해."


"..미안하단 말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시면 강제로 막고 싶어지잖아요."




킥. 함께 웃었다. 이젠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떨쳐버린 걸까. 인류 부흥을 위해 저항군을 결성하고 수 백년 동안 철충들과 맞서온 라비아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해준 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나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그녀 밖에 없기도 했지만, 첫대면 했을 때의 마음의 빚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는 계산으로 나는 라비아타에게 내가 떠날 것을 알려주었다.




저벅-, 저벅-. 함께 함교를 걷는다. 향하는 곳은 오르카호의 스쿼드 출격 포드. 야간 경계 인원은 없다. 브라우니들의 의아함과 기쁨이 섞인 소리가 상상 속에 피어오른다. 준비가 끝나면 사령관 권한으로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포드를 발사하고, 그와 동시에 오르카호는 잠수한 뒤 지구 반대편으로 순항할 것이다.




"내일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요."


"왜?"




커헉!?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렸다. 느낌은 팔꿈치가 아니라 몽둥이라 해야할 것 같지만.




"왜, 라고요? 콘스탄챠, 마리, 리리스, 앨리스, 샬럿, 메이, 레오나, 리제, 소완, 다프네... 그냥 오르카호 인원 전부라고 해도 되겠네요. 사령관 권한이 저한테 전부 넘어간 걸 보고 그 아이들이 저한테 어떤 소리를 해댈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그래서 준비해뒀잖아. 그 아이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게."


"겨우 그런 걸로 소란을 잠재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라도 그 아이들이 전부 덤벼들면 가만히 당할 수 밖에 없다구요."


"그럴리가 없잖아. 새로운 사령관, 아니, 예전 사령관이 다시 복임한 건데."




눈초리가 눈보라마냥 매섭다. 더 이상은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라 얌전히 걸었다.




포드에 도착하니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라비아타가 모든 준비를 마친 듯하다. 이 정도면 그냥 애초에 설득할 생각도 없던 거 같은데?




".... 정말.. 마지막이군요...."


"그래."




포드에 올라탄다. 라비아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보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라비아타.."




"...주인님은 멍청이에요."


"구제불능에 쓰레기, 얼간이라고요."


"멸망 전 인간들도 당신만큼 어리석진 않을 거에요."


"남자도 아냐. 그 훌륭한 물건이 아까우니 확 고자나 되버리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도 모르고 내팽개치다니. 당신 뇌는 토모 마냥 퇴화되어 있을 거에요."


"어디든 나가서, 맘대로 죽어버리세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저희들을 생각하면서, 비참하게 죽어버리라구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마지막 순간에 이런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어우야... 바닐라도 너한텐 한 수 배워야겠는데?"


"입 다물고, 당장 꺼져버리세요."


"라비아타."


"입 다물라고 했죠."


"정말 고마워. 사랑해."


"..."


"다른 아이들한테도 말했지만, 그래도 사랑해."


"..이 쓰레기!"




이크. 그녀가 내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 들었다. 잠깐, 그거 맞으면..!?




쪼옥, 츄-, 츄릅. 츄르릅, 하아-.. 츄우- 찔꺽....




외설스런 소리가 동공처럼 울린다. 그녀는 불타는 눈동자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마냥 움츠러들었다.




"... 푸하!"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드디어 만족했는지 라비아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인님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포드 안에서 육지로 사출되었다.






내 각막에 새겨진 마지막 라비아타는, 누구보다 연약한 모습으로 오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