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라오문학] 마지막 순간.

백구한접시



적녹색 어지러운 조명이 깜빡인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폭발음과 함께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커피 잔 속 검은 음료




-최소한 내가 끓인 이건 커피라고 부를 수는 없겠다. 콘스탄챠는 기가 막히게 잘 끓이던데-




표면을 거친 파동이 흔들고 지나간다.




나는 뻣뻣하고 투박한 나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 미친짓을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다시 돌아갈까.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오르카 호로




굳게 먹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여름 바닥에 떨어진 얼음조각처럼 녹아들고 편안하고 행복하던 시절의 기억이 




물감이 흘러 퍼지듯 그 자리를 메운다.




"아니지...지금 끝내야지."




혼잣말을 내뱉고 고개를 흔들어 마음의 어지러움을 몸의 어지러움으로 잠재운다.




상황을 표시하는 상황판을 보니 역시나 지도 위에 온통 철충들의 존재를 알리는 붉은 점이 가득하다.




적어도 내가 있는 이 지하벙커 주변은 완전히 철충으로 덮혀 있다.




성공이네.




계획의 완전한 성공을 자축하는 기쁨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끝에 대한 지독한 공포감이 몰려온다.




이제와서 죽음 자체가 두려운건 아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사랑해준 그녀들의 곁이 아닌 이런 곳에서 나 홀로 끝을 낸다는건....




정말이지 심장 속 혈관 하나하나가 얼어붙은 것 같은 고통이다.




우리는 지난 십수년간 잘 싸웠다.




나라는 특출난 것 없는 인간을 위해 그녀들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주었다.




덕분에 지구 상에서 철충이 남은 곳은 이제 없다. 지금 내가 있는 유라시아 대륙 동북단을 제외하면.




다만 이곳이야말로 철충들의 본거지. 우리에게 오르카호가 있었다면 철충들에게는 이 곳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공업단지를 점거한 상태로 무한히 많은 철충들을 생산하고 배치하는 철충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남아있는 이상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고마는 우리들은 결국 철충에게 패배할 것이 분명했기에 우리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이곳에 대한 공격을 수도없이 감행했지만 철충들의 마지막 보루답게 너무나 많은 수와 화력의 철충들이 버티고 있어 기적적으로




사망자가 없이 퇴각한 것만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령관 각하?!! 사령관 각하!!!!]


[뭐야?! 진짜 사령관이야? 사령관! 대답해!]


[주인님? 거기 계신가요?]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까운 마리의 목소리가 단말기를 통해 울려퍼진다.




마리,메이,칸,라이바아,콘스탄챠,레오나......그 뒤로 보이는 오르카 호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




나는 화면에 떠오른 그녀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 올곶고 당당하면서도 나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빛을 바라보고 나면, 다시 그녀들의 품으로 돌아가 그녀들과 함께하는




영원할 것만같은 달콤하고 행복한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서.




"모두 들어줘."




[무슨 말이야!? 그보다 빨리 위치부터 알려줘! 당장 구하러갈게!]


[사령관 각하, 우선 저희에게 내리신 대기명령을 철회해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수색부대를 편성하고...]




"아니, 너희는 따로 해줄 일이 있어."




화면 속의 모두에게서 의문의 기색이 느껴진다.




마지막 인류, 그녀들의 주인인 나를 구출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걸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모든 병력은 개채식별명 하이브, 철충의 마지막 보루를 공격한다."




[하지만 사령관, 지난번에 공격해봤지만 그쪽은 철충이 너무 많아. 우리의 지금 병력으로는...]




"지금은 괜찮아. 병력은 반절도 안 남았을거야."




화면에 비친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의 얼굴에 의문, 이해, 경악의 빛이 차례로 스친다.




어째서 사령관이 철충의 병력상황을 상세히 집어낼 수 있었던가에 대한 의문,




그런 확신에 찬 대답에서 유추한 내 현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한 경악.




[사령관 미쳤어?! 지금 스스로를 미끼로 쓰겠다는거야?]


[주인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치코랑 리리스 언니가 달려갈게요!]




그녀들은 지금의 상황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오로지 내 신변을 걱정할 뿐이다.




메이, 그렇게 날카롭게 말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잖아. 연기가 서툴구나 아직도.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에 대한 구출작전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명령한다. 모든 전투원들은 화력과 병력을 총동원해서 하이브를 치도록.


전투 방식에 대한 부분은 자율에 맞긴다."




잠시간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네, 각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다만, 저희가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까지...살아주십시오..]


[마리?! 너 미쳤어? 사령관이 위험하다고! 지금 명령 운운할때야?]


[저라도...저라도 가겠어요 사령관님.]


[사령관.....멋진 남자로 남고 싶어하는건 이해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 줘. 우리는 사령관이 필요해.]


[저희가 더 열심히 싸울테니까...더 잘 싸울테니까 지금이라도 구출명령을 내려주세요 주인님...]




"이건 명령이다! 절대로 하이브에 대한 공세보다 나의 구출을 우선하지 마!"




[........명령 완수하고 사령관이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부디 조금만...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화면이 꺼지고 검게 변한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처럼 창백해진 꼬맹이만 남아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내가 힘들 때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그래도....




"내가 이겼다."




하이브, 철충, 오늘로 모든 것이 끝난다.




지금 철충은 내가 있는 지하벙커의 외곽을 포위하고 포격만을 반복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마지막 인류이자 최후의 보루인 내가 여기 있으니 바이오로이드들도 나를 호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양동을 고려해도 우리 부대의 일부만 막을 병력만이 하이브에 위치하고 있을터.




무시하기에는 나라는 미끼가 너무나 매력적이라 가능한 많은 전력을 투사했을 것이다.




화면에 표시되는 철충의 개체수가 그것을 증명한다.




지금 하이브에 남아있는 철충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병력을 막지 못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들에게 구출되고 십수년, 정말 많은 전투가 있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들을 전장에서 위기에 몰아넣은 적도 




수도없이 많다. 




기적적으로 사망자는 없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거니와 나는 그녀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내 뜻대로 작전의 성공을 위해 희생시켜도 좋은. 칩으로 내던져도 좋은 목숨이 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바라본 불 꺼진 통신용 패널에는 아까의 겁에 질린 꼬맹이 대신 무언가 준비가 끝난 남자가 비췄다.




"좋아 훨씬 좋네."




본격적으로 철충들이 돌입 시도를 하는 것인지 포격 소리는 멎고 총탄과 대형철충의 돌격이 벽에 부딛히는 둔탁한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나는 남은 커피 비슷한 무언가를 들이키고 그 지독한 맛에 얼굴을 찌푸린 채.




둠브링어를 위한 생산시설에서 남아있던 재고분을 포함해 처음부터 이 지하벙커 주변에 엄청난 분량으로 설치해두었던 온갖 폭약들....




그것에 연결된 기폭장치의 스위치를 내려쳤다.




---------------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빛이 하얗게 덧칠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느껴지는 동시에 느껴지지 않고.




나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인님?! 주인님!!!"




"포츈! 빨리!! 이쪽에 주인님이 계셔!"




"지금 가거든? 휴대용 의료기구도 전부 가지고 왔으니까 숨만 붙어있으면 살릴 수 있거든?! 호흡이 멈추지 않게 기도 확보해줘!"




"사령관...피가...피가..."




"메이! 기절하지마라! 이송 중에 둠브링어가 호위를 해야한단 말이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수복실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말도 할 수 없고. 팔다리도 성한 곳이 없지만 언젠가는 회복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마지막 순간을 그녀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다.




"바보 사령관! 누가 자기를 희생해서 승리해달래?! 우리가 더 열심히 하면 되는데! 바보!"




"아무리 소첩이라도 상공의 이런 모습은 괴롭사옵니다..몸이 회복되시면 이리도 소첩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벌을.드리지요..."




"주인님이 누워계신동안 하치코랑 켈베로스랑 산책 꾹 참았어요! 나으시면 그러니까....아무튼 많이 산책해주세요!"




"사령관 각하..다시는 이런 바보같은 작전을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단련시켜드리겠습니다. 칸이나 레오나와도 합의된 사항이니 각오해주시기를..."




"주인님, 우리 모두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주세요."




아마도 내 몸이 나으면 전보다 더 바빠질 것이다. 




평화로워진 이 세상에서 나는 내 마지막 순간을 그녀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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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되게 힘드네 좀 더 연습해서 나중에 다시 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