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9) 좌우좌가 비밀의 방을 훔쳐본 날




 튕기 듯이 일어나 숨을 몰아쉰다. 연하늘빛 머리는 치적치적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었고, 한참은 앳된 가슴굴곡이 들어날 정도로 얇은 잠옷은 끈덕지게 소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연신 자기 몸과 주변을 살피더니 그대로 털썩 침대에 몸을 눕힌다. 




 "크, 큭큭. 고작 이 정도의 악몽으로 짐을……흐윽."




 LRL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최근 악몽을 꾼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아무도 오지 않는 등대를 홀로 지키던 그때로 돌아간다. 지금 이 행복한 순간순간들이 꿈처럼 느껴지는…….


 그럴 리가 없다고 되뇌며 버티고 버텨봐도 자신 주변 풍경은 허름해진 등대 한편에 쌓인 책장의 책들과 케케묵은 담요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은 또 권속을 만나기 전 생활로 돌아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권속과 함께 했던 꿈같은 나날들을 독약인 줄 알면서도 곱씹는다.


 그렇게 수십 년을 동료들과 권속을 부르짖으며 안대로 숨겨뒀던 한쪽 눈이 바스러질 때까지 밤하늘과 섞이지 않는 칠흑빛 바다를 비추다 보면, 동료들과 권속의 시체가 떠오르는 부분에서 항상 잠이 깬다.


 


 오늘은 특히 더 생생한 탓에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끝에 2층 침대를 오르는 사다리를 반쯤 오른다. 같은 방에서 지내는 더치걸을 확인하고서야 LRL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래도 벌렁이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아서 다시 내려와 침대에 누웠음에도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버리면 어쩌나, 지금이 정말 꿈이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소녀는 갑자기 몹시도 권속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밤 늦은 시간에는 꼭 제때 자라던 시녀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을 어긴 프린세스의 말로가 바로 칠흑의 천사라며.




 ……그러고 보니 최근 악몽의 저주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을 터.




 철렁하는 마음에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다. 


 추적추적 들러붙은 잠옷으로 인해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굴곡이 품위를 뽐내고 있었다.


 


 ……차, 찾아가는 것은 오늘 뿐이노라, 권속이여. 밤시중을 들게 하는 영광을 내려주겠노라.




 밤시중의 뜻은 몰랐지만, 시녀들과 기사단 단원들이 가끔 언급하는 것과 밤, 그리고 시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권속과 함께 잠을 자는 것이리라.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니 조금까지만 해도 술렁였던 가슴이 신기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LRL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더치걸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방을 나서 살금살금 권속의 방으로 향했다.










 '무엇이냐, 권속의 방에 아직까지 불이 들어와있다니?'




 이상함을 느끼며 함장실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자, 희미하게 달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한 명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소녀는 깨닫는다. 소녀는 이 목소리가 가끔 권속에게 찾아와 몇몇 요주의 기사단원이 교태를 부리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조금씩 살금살금 다가가 들키지 않게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삐져나온 훨씬 커진 교성은 소녀의 목소리를 앗아가고, 피부를 맞댄 열기는 소녀의 움직임을 빼앗는다. 한쪽 눈으로 받아내는 살색 풍경은 소녀의 사고를 흩트린다.


 




 교성이 잦아들고, 열기가 식어가며, 살색 풍경의 움직임이 스러졌을 때 소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 강해 보이던 새로운 기사단장과 함께 기세 등등하던 그 단원들이 시체처럼 쓰러지며 패배했다. 그와 달리 여유롭게 일어서서 목을 축이던 권속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소녀는 그럴 리 없다며 머릿속으로 되뇌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웅크려 이불을 뒤집어 쓴다.




 '뭐, 뭐야. 그건!'




 소녀의 한쪽 눈꺼풀 안쪽에 강렬하게 박힌 풍경을 토대로 웅크린 몸을 살짝 펴서 양손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본다. 가랑이쯤에 한 손을 고정시키고 남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 아랫배를 지나 배꼽 위를 우습게 넘어섰을 때 가녀리다 못해 앳된 자그마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 다들 죽은 거야. 죽은 게 분명해! 역시 지금 인간님도 다른 인간님들과……'




 동료들에게 들었던 끔찍한 인간님들의 행동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몸을 헤집는데도 기쁜 듯이 몸을 떨었던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착각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을 때 침대가 기울며 누가 자신 옆에 조용히 누웠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소녀는 이미 꼼짝없이 그녀가 권속이라 부르던 인간의 품 안이었다.




 허리에 팔이 감겨왔을 때 소리를 지를 뻔했던 소녀는 바로 위 침대에 더치걸이 있음을 떠올리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한 손이 천천히 올라와 틀어막은 입을 조용히 비집고 들어와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 누가 좀 도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힘들만큼 가슴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으로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열기 이상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맞닿고 있었다. 그리고 목덜미에 인간님의 입술이 닿았을 때 오싹함을 느끼며 소녀는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으며 다가올 그 행위에 각오를 다졌다.














 눈을 뜸과 동시에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와 덜커덩거리는 마차 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팔을 밧줄로 구속당한 남자 세명이 보였고, 그중 한 명은 천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이봐, 자네, 이제야 깨어났군."



 정면에 있던 허름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국경을 넘어가려 했던 거지? 너도 저기 저 도둑이나 우리처럼 제국군이 잠복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갔었잖아."



 "빌어먹을 스톰클록 녀석들. 니놈들이 오기 전까지 스카이림은 좋은 곳이었어. 제국군들은 조용하고 느긋했다고. 제국군이 매복해서 너희를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난 이미 말을 훔쳐 해머펠로 달려가고 있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