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과거의 유물을 깨울 방법을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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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덴 없어?"


"응. 난 괜찮아. 땅이 깊지 않아서 찰과상만 약간 입었어."


"다행이다. 브라우니한테 네가 땅속으로 떨어졌단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미안..."


브라우니의 보고로 무사히 더치걸을 구해낸 뒤, 나는 더치걸을 내 방으로 불러 그녀와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크게 다치진 않았던 거 같지만, 랜서 미나의 보고로 해당 지하 통로가 멸망 전 전투 장소 중 하나인 걸 알고 행여 그녀의 아픈 기억을 건드는 게 아닌가 염려되었기 때문에 한사코 괜찮다는 더치걸의 말에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다행인건, 딱히 그녀에게 정신적인 피해는 없어보였다는 점이었다.


"괜찮다니 이 이상 뭐라 하진 않을께.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가서 편히 쉬어."


"응. 고마워, 사령관. 아, 그 로봇은..."


"안 그래도 확인해볼려고. 지금쯤 토미 워커가 가져왔을테니 공방에 가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멸망 전의 로봇이 발견된 건 오르카 호에선 처음이니까 그녀들도 기뻐할꺼야. 잘했어, 더치걸."


내가 더치걸의 머리를 쓰다듬자 더치걸은 배시시 웃으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나도 콘스탄챠에게 방 청소를 부탁한 뒤 공방으로 향했다. 공방에는 늘 그랬듯 닥터와 포츈이 있었고 웬일로 탑돌이를 챙겨 온 그렘린이 포츈에게 문의를 하고 있었다.


"포츈 언니~ 탑돌이한테 뭔가 쓸만한 부속품이라도 붙여 주실 수 있나요?"


"지난번에 사령관이 줬던 키트는 벌써 다 써버리고 또 부탁하면 언니도 힘들거든? 게다가 탑돌이는 추가 장비를 붙이기엔 구성이 단순해서 힘들다고 말했잖니."


"화염 방사기를 장착하면 철충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탑돌이가 먼저 과열될 거고, 중화기는 반동을 못이겨서 분해, 냉기나 전기는 회로를 손상시켜 제풀에 터지게 할 거라고 했던 거 말이지?"


"에잉... 그럼 그냥 갈게요. 스틸라인 온라인이나 해야지."


아쉬운 듯 혀를 차는 그렘린이 먼저 날 보고 인사하며 밖으로 나가자 뒤이어 반갑게 맞이하는 닥터와 포츈을 보고 나도 마주 웃으며 인사하고 말했다.


"괜찮아. 아주 팔팔해. 그나저나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오다니? 뭐 흥미로운 거라도 찾았어?"


"토미 워커가 회수했으니 지금쯤 도착했을텐데... 아, 저기 왔네. 수고했어. 토미 워커."


"수송 완료."


주변을 둘러보던 내 시야에 토미 워커가 머리 위에 있던 낡디 낡은 로봇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제 할일은 끝났다는 듯 성큼성큼 다른 곳으로 가자 곧 나를 비롯한 그녀들의 시선은 로봇에게 향했다. 그 로봇을 보고 내가 첫번째로 느낀 것은 상태가 더치걸이 말한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그녀들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녹슬고 군데군데 부서진 로봇을 보고 놀라움, 혹은 황홀함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어머...! 어머어머! 이 아이를 정말 우리 사령관이 회수하라고 명령한 거야? 누나 완전 기쁘거든!"


"정확히는 더치걸이 발견하고 난 쓸만한 정보라도 없을까해서 일단 회수한 거야. 그런데 그렇게 기뻐할 일이야?"


"우와~ 나도 이거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네.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포츈 언니가 저런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건 없어. 얘는 멸망 전쟁 이전에 이미 없어진 로봇이니까."


"그래?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을까? 멸망 전쟁 이전에 없어진 로봇이라니 뭔가 흥미롭네."


철충이 오기 이전에 이미 단종되어 없어진 로봇이 왜 지금까지 그 장소에서 바이오로이드의 흔적과 함께 있는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콘스탄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로봇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으로 몸소 현장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랐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우선은 설명을 부탁했다. 내 부탁에 포츈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아이는 버틀러. 형식번호 SR-01 버틀러 기종이거든? 연식과 개발 시기만 따지면 콘스탄챠나 바닐라 같은 아이들보다 훨씬 선배인 로봇이야."


"버틀러... 집사 로봇이었다는 거야?"


"맞아. 부유한 인간들을 케어하거나 혹은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조된 게 이 아이거든. 바이오로이드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이전엔 이 아이들이 인간들을 돌보거나 업무를 보조했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


"버틀러는 '높은 범용성을 바탕으로 한 다목적 로봇'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어. 그래서 다른 AGS처럼 화려하거나 육중하게 생기지 않고 딱 인간 정도의 크기와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지. 게다가... 얘네들은 개조도 아주 쉬웠어. 그래서 시중에 판매된 버틀러들은 주인에 따라 모두 모습이 제각각이었다고 해. 똑같은 기종이라도, 겉모습이나 하는 일이 완전히 달랐다는 거지. 콘스탄챠 언니 같은 메이드로 개조하거나 가수나 무용수처럼 화려한 예능용으로 개조한 건 빙산의 일각일 거야."


닥터와 포츈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버틀러라는 이름의 로봇을 내려다봤다. 멸망 전쟁 이전에 제조되어 인간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상용화가 되었다면 분명 이 로봇도 인간을 도우며 살다가 멸망 전쟁 때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 생각하던 나는 이어진 포츈의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거든? 아무리 이 아이가 인간에게 사랑받았다 해도 멸망 전쟁 당시까지 활동하진 못했을 텐데..."


"왜?"


"버틀러 기종은 분명 많은 인간들이 구매했지만, 바이오로이드가 만들어질 때쯤 고질적인 단점이 부각되었거든. 너무 범용성을 추구한 나머지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특화되지 못했거든. 그래프로 따지면 육각형인데 크기가 작은 육각형이라는 거였고 그래서 바이오로이드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땐 이미 모든 기종의 지원이나 개조가 중지되어서 이미 판매된 버틀러들은 고장나면 수리받지 못하고 폐기처분 되었거든. 결과적으로 철충이 감염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게다가 이렇게 오래 방치되었을 정도면 분명 철충의 감염 흔적이 있을 법도 한데 그게 전혀 없어. 즉, 이 버틀러 기종은 작동했을 때 생체 회로를 이식받아 활동했을 거야. 그래서 얘가 기동을 정지하고 나서도 철충이 감염시키지 못했을 거고. 하지만 적어도 각종 기록이나 자료에 따르면 버틀러를 판매한 회사가 생체 회로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없어. 그럼 가능한 건..."


"이 기종의 주인이 개인적으로 생체 회로를 장착했다는 건가?"


내가 나름 추측을 하자 닥터는 현재로선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며 홀로그램으로 더치걸이 있었던 지하 통로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오빠가 말한 장소를 찾아봤는데 확실히 평범한 지하 통로가 아니였어. 이 지하 통로는 적어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번에 탈출할 수 있는 일종의 비상구 같은 곳이야. 깊이나 길이는 아직 확실하게 조사하진 않았지만."


"그럼 어딘가엔 이 지하 통로로 연결될만한 장소가 있단 말이지? 거길 찾아볼 필요가 있겠어."


"우리 사령관, 누나가 꼭 부탁 좀 할게. 이 아이를 다시 만들어 보고 싶은데 허락해줄 수 있을까?"


"나야 상관없긴 한데... 멸망 전에 단종된 로봇을 다시 만드는 게 가능해? 설계도도 없을 텐데?"


"오빠. 나랑 포츈 언니의 실력을 알면서 그래? 제조 기록이야 조금만 찾아봐서 참고할 수 있으니까 만드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아. 다만..."


자신 있게 웃으며 말하던 닥터는 고민거리가 있는지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오빠는 다른 언니들하고 얘가 발견된 장소 인근을 수색해줄 수 있을까? 분명 지하 통로가 연결된 장소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장소가 어쩌면 비밀을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르고."


"흠... 어려울 건 없지. 어떻든 간에 전력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면 될까?"


"누나랑 닥터가 제조하는 동안 우리 사령관이 단서가 될 장소를 찾고 연락해주면 좋겠거든?"


"알았어. 미나의 보고가 신경 쓰이기도 했으니까 조사해보도록 할게. 맨날 사령관실에서 혼자 쉬기만 하는 것도 죄책감이 들던 차에 잘 됐네."


"오빠. 그래도 무리하지 마. 오빠가 또 쓰러지면 이번엔 진짜 큰일이니까."


닥터의 걱정에 나는 걱정말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밖으로 나와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멸망 전의 로봇이 가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간만에 다시 일을 하는 흥분감과 설램으로 누구와 함께 수색조를 짜야할지 고민하던 나는 이 일에 적격인 그녀들을 떠올리고 연락을 시도했다.